무사 만루
“야! 방금 그거 뭐야?”
“죽이는데?”
송석현이 벤치로 돌아오자 김정률과 김인환이 소리까지 지르며 난리였다.
다른 일본 선수들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박수를 보냈다.
“공이 완전히 몰렸어요.”
송석현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몰렸어도 그렇지. 장외야, 장외. 저길 넘어갔다고!”
“에이, 저게 무슨 장외예요? 관객석도 몇 줄 안 되는데.”
“저 관객석을 한참이나 넘었으니까 문제지.”
“그냥 몰려서 그래요. 공이 빨라서 더 반발력도 좋았고요.”
“너 이 자식,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어린 놈의 자식이 벌써 저만한 공을 날려?”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운은 무슨. 작정하고 쳐도 저기까지 치는 놈이 몇이나 된다고. 안 그러냐, 인환아?”
“예, 그렇죠. 힘만 세다고 될 일도 아니죠.”
“이야, 어떻게 너 같은 애가 신고로 들어왔지? 요새 스카우터들은 눈이 삐었나?”
송석현과 김정률, 김인환이 떠들썩하는 동안 타이세이는 마운드를 발로 툭툭 쳤다.
담장을 까마득하게 넘어가는 공을 볼 땐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이제 고작 스무 살짜리에게 홈런, 그것도 장외 홈런을 맞았다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투수! 투수! 진행해야지!”
심판은 넋이 나간 타이세이를 불렀다.
타이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공을 받았다.
팡! 팡! 팡! 팡!
스트레이트 볼넷.
타이세이의 공은 일정한 탄착군도 없이 여기저기 난사됐다.
히어로 매직 감독이 공을 잡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이쯤 해서 바꿀까?”
타이세이는 자기가 쥔 공을 한번 보고 오키나와 베어 벤치를 한번 봤다.
옅은 미소를 띤 송석현과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김정률, 김인환.
타이세이가 공을 꽉 쥐었다.
“조금만 더 저한테 맡겨 주실 수 있을까요?”
“공을 더 던지려고? 오늘 가볍게 몸을 푼다고 하지 않았어?”
“공을 더 던지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타이세이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히어로 매직 감독은 뒷짐을 지었다.
1초, 2초 그리고 10초.
고민의 시간이 끝난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던지고 싶은 만큼 던지고 나와. 저 꼬마랑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거지?”
“……제대로 붙어 보고 싶습니다. 방금 전에는 제가 너무 방심했어요. 아니, 오만했습니다. 클로저는 공 하나도 허투루 던지면 안 되는데.”
“투수는 그런 호승심이 있어야지. 해봐. 이번엔 멋지게 설욕하고 와.”
타이세이가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독이 마운드를 내려갔다.
타이세이는 마운드를 발로 꾹꾹 누르곤 모자를 고쳐 썼다.
“후, 해 볼까.”
* * *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타이세이가 원래 투구 폼으로 돌아가자 타자들은 맥을 못 췄다.
직구 하나만으로 배트가 밀리는데 포크볼은 아예 스치지도 못했다.
김정률이 다음 이닝에 올라와 공을 던졌다.
첫 공은 투심 그립의 직구.
타자는 1구 만에 땅볼로 아웃됐다.
“오, 진짜 이게 더 떨어지는데?”
김정률은 5구 만에 2타자를 잡아내곤 이닝을 마무리했다.
김정률은 벤치로 돌아오자마자 싱글벙글했다.
“야, 신기하다. 그립 하나 바꿨다고 각이 더 좋아졌네.”
김인환이 말했다.
“그러다 언더로 전향하는 거 아니에요?”
“그럴까? 하하, 언더로 던지니까 진짜 변화구가 너무 쉽네. 구속이 좀 안 나와서 그렇지, 아픈 데도 없고.”
“제가 보기에도 싱커는 진짜 좋아요. 웬만한 언더 투수들보다 좋은 거 같아요. 나중에 위에서 던질 때도 한번 던져 봐요. 싱커가 먹히면 지금보단 패턴이 더 늘 거 아니에요.”
“나도 오버로 던졌을 땐 다 해 봤지. 그땐 지금처럼 각이 안 나왔어. 뭐, 오버로 던져서 이만한 각이 나오면 누가 언더를 하겠냐? 죄다 오버로 던지지.”
“그래도 시도해 보면 좋죠, 뭐.”
“그른가아?”
마운드에는 타이세이가 올라왔다.
“쟤는 또 올라오네. 불펜 투수 아니었어?”
“그러게요. 안 내려가나? 선배랑 자존심 대결, 뭐 이런 거 하는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 그리고 난 이번 이닝이 끝인데.”
“왜 안 내려가지? 이닝 먹는 연습이라도 하나?”
“아까 전문 마무리로 키운다고 하지 않았냐?”
“그렇다고 들었는데요.”
송석현은 말없이 타이세이를 지켜봤다.
타이세이는 송석현과 승부할 때와 달리 투구 폼이 더 얌전하고 깔끔했다.
엎어치기 하듯 던졌던 폼과는 전혀 달랐다.
“폼이 원래 두 갠가…….”
3분.
타이세이가 세 타자를 상대한 시간이었다.
플라이 아웃, 스트라이크아웃, 스트라이크아웃.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바로바로 공을 던졌다.
다음 이닝엔 오키나와 베어의 다음 투수가 나왔다.
키가 작고 뚱뚱한 사이드암 투수였다.
탕!
탕!
탕!
탕!
“아이고야. 난리 났네, 난리 났어.”
김정률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히어로 매직의 타자들은 투수의 공을 받쳐 놓고 쳤다.
투수는 직구 구속이 130km/h 내외였다.
변화구는 슬라이더 하나.
문제는 구속 자체가 빠르지 않아 밋밋한 직구와 슬라이더가 타자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거 역전당할지도 모르겠어요.”
송석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료스케가 타석에 들어섰다.
1사 1, 3루. 작전이 가장 많이 나오는 상황.
히어로 매직에선 따로 작전이 없었다.
오키나와 베어 감독은 마운드로 올라가 투수를 바꿨다.
바뀐 투수는 키가 큰 좌완 투수였다.
투수는 연습 투구로 연달아 공을 던졌다.
“공 좋은데요?”
높은 타점에서 내려찍는 직구.
송석현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저 정도면 한국에 데려가면 좌완 유망주라고 물고 빨아 줄 텐데 말이야.”
“얘들이 실업야구 수준이라고 해도 쉽지 않네요.”
“애들마다 편차가 있고 기복은 있어도, 만만한 놈들은 없어.”
“저 투수 직구는 쉽게 공략 못하겠는데요?”
“공이 눈에 좀 익어야겠는데. 구위가 괜찮아. 한 142km/h는 나오는 거 같네.”
연습 투구가 끝났다.
료스케가 타석으로 걸어 들어왔다.
거포라지만 스탠스가 그리 넓진 않았다.
배트를 가볍게 돌리며 멍한 눈으로 투수를 봤다.
팟!
투수가 1구를 던졌다.
료스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바깥쪽 직구.
초구 선택으로 가장 무난하고 안전한 공.
살짝 빠지는 직구에 료스케가 앞다리를 살짝 들어 뻗었다.
탁!
배트 끝에 걸치는 공.
료스케는 겨드랑이를 붙인 채 톱 핸드를 쭉 밀었다.
공은 1루수 키를 넘었다.
선상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공.
툭!
공은 파울 지역으로 나가지 않고 라인 선상으로 떨어졌다.
주자가 달리고, 타자 주자는 2루에 들어섰다.
싹쓸이 2루타.
료스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보호구를 벗어 코치에게 건넸다.
“와.”
김인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장난 아니네.”
“그러게요. 배트 컨트롤이 좋네요.”
“쟤가 2군이라고? 와, 당장 고트에 오면 1군이네.”
“파울인 줄 알았는데.”
“보통 마지막 스윙은 잡아당기기 마련인데 의식적으로 밀어 치네. 거포가 저 정도 컨트롤이면 투수들 머리 아프겠다.”
투수의 얼굴은 그새 땀으로 흠뻑 젖었다.
역전.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리라는 말은 투수도 알고, 타자도 안다.
바뀐 투수는 초구를 신중하게 고르기 마련이다.
조금 전 투수의 초구도 실투가 아니었다.
치더라도 병살이 나오도록 유도했는데 선상 싹쓸이 안타.
자신이 못한 게 아니라 상대가 잘한 거지만…….
탁!
탁!
연이은 안타로 점수 차는 더 벌어졌다.
투수는 세 타자를 더 내보낸 후에야 이닝을 마쳤다.
다음 이닝에도 마운드에 오른 타이세이는 3타자 연속 범타 처리를 했다.
8회가 지나고 9회.
7점 차로 경기가 많이 기운 상황.
타이세이가 또 마운드에 올랐다.
“쟤는 왜 안 내려가는 거야? 오늘 뭐 인생 투구할 생각인가?”
김정률은 타이세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연습 경기라지만 타이세이는 프로다.
엄연한 실력 차가 존재하는 만큼 눈치껏 1~2이닝 정도만 소화하고 내려와야 하지 않는가.
오키나와 베어는 김정률과 김인환을 진즉 내렸다.
송석현이 대타로 나와 홈런을 때렸지만, 송석현은 말만 프로지 고등학교 졸업장도 못 받은 어린애다.
히어로 매직은 료스케, 타이세이, 히로시를 시작부터 여태 한 명도 안 빼고 있다.
“이 팀이랑 저기랑, 뭐 사이가 안 좋은가?”
김정률의 물음에 송석현과 김인환은 어깨만 으쓱했다.
두 사람이 알 도리가 있나.
팡, 팡, 팡, 팡.
타이세이는 타자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줬다.
김정률이 팔짱을 꼈다.
“쟤도 슬슬 힘이 빠지나 본데. 왜 안 바꾸는 거야?”
김정률의 의문에도 타이세이는 또 볼넷을 줬다.
두 타자 연속 스트레이트 볼넷.
양 팀 벤치는 서로 의아했다.
침착한 건 타이세이와 히어로 매직 감독 둘밖에 없었다.
“또 볼넷을 주네.”
“뭔가 이상한데요?”
“밸런스가 무너진 거 같진 않은데.”
타이세이는 세 타자 연속 볼넷을 줬다.
다다음 타자는 송석현.
송석현은 배트를 들고 대기 타석으로 향했다.
송석현이 나가자 김인환이 목소리를 낮춰 김정률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쟤, 석현이한테 홈런 맞은 거 복수하고 싶은가 본데?”
김인환이 입맛을 다셨다.
“……제 생각도 그래요.”
“배짱도 좋네. 다 잡을 자신 있다 이건가.”
“실력으로 보면 불가능할 거 같진 않은데요.”
“음, 그건 그렇지.”
“이거 히로토 코치님 입장만 곤란해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독이 잔뜩 올랐는데, 저놈. 석현이가 선풍기 좀 돌려야 저놈 분이 풀리려나.”
타이세이는 또 볼넷을 내줬다.
밀어내기로 1점.
그제야 양 팀 벤치에선 타이세이의 의도를 알곤 술렁였다.
다음 타자는 송석현.
장외 홈런을 때린 주인공.
아직 앳된 티를 못 벗은 고등학생.
일본 프로야구 1군 진입을 목전에 둔 차기 마무리의 자존심이 반 쪼가리가 났다.
이미 맞은 홈런을 되돌릴 순 없어도 분풀이 정도는 할 수 있다.
“이거참.”
송석현도 돌아가는 상황이 어떤지 이젠 모를 수가 없었다.
타이세이는 자신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티를 팍팍 냈다.
“우리 막내 자존심이 구겨져야 일이 끝나겠네.”
“석현이가 이길 수도 있잖아요.”
“아까는 투수가 한복판 직구를 던진 거고. 솔직히 만만하게 본 거지. 제대로 승부하면 석현이도 쉽지 않아. 프로의 포크, 그것도 포크볼의 달인들이 득실거리는 일본의 포크볼은 구분하기 힘들어. 어차피 홈런도 쳤겠다, 시원하게 방망이 붕붕 돌리고 와야지, 뭐.”
“으음.”
김인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구는 투수가 유리한 게임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세 번 중에 한 번만 이겨도 타자가 승리라고 불리는 게 야구다.
첫 타석에 대포를 쐈으니 다음 타석에 아웃당하는 게 대수겠냐만, 알아도 투수한테 지고 싶은 마음이 들 리가 없는 것도 타자다.
“후아.”
송석현이 타석에 들어섰다.
포수도 투수도 타자를 보지 않는다.
마치 없는 사람 취급한다.
송석현은 배트를 살짝 들어 빙빙 돌렸다.
무사 만루.
양 팀 벤치와 그라운드의 선수들이 송석현을 바라봤다.
대놓고 프로의 자존심을 건드린 햇병아리의 최후를 보고 싶을 터다.
“하!”
투수가 기합과 함께 1구를 던졌다.
몸 쪽으로 붙는 공.
송석현의 배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