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스
“여기는 료스케, 타이세이, 히로시.”
“오하이오 고자이마스.”
“여기는 김정률, 김인환, 송석현.”
“만나서 반갑습니다.”
히로토 코치의 소개로 양 팀 선수들이 인사를 나눴다.
히로토 코치가 먼저 일본 선수를 소개했다.
“여기 료스케는 소프트뱅크에서 지금 1군. 맞지?”
“아직 레귤러 1군은 아닙니다, 하하.”
“그러면 1.5군이라고 하면 되나?”
“한 1.7군 정도로 해 주십쇼.”
“그래, 여긴 1.7군 료스케. 포지션은 좌익수. 우투우타. 차세대 일본을 대표하는 거포가 될 수도 있어요. 얼굴 잘 익혀 둬요.”
“코치님도 참, 하하.”
료스케는 키가 185cm 정도에 몸도 다부진 선수였다.
“타이세이는 지금은 2군 수련을 하고 있지만 차기 소프트뱅크 마무리를 노리는 포크볼러. 직구 구속이 150km/h를 넘어요.”
“마무리라뇨. 아직 1군 문턱도 못 밟았는데요.”
“머지않아 밟을 건데 왜? 하하하, 난 벌써 기대하고 있다고. 제구가 많이 좋아졌다고?”
“예, 코치님 덕분입니다. 이제는 날리는 공은 없어졌습니다.”
“내 덕은. 선수가 잘한 덕이지.”
타이세이는 조금 말랐지만 다부진 체형의 선수였다.
야구 선수라고 안 했다면 아마 지나가는 행인이라고 해도 됐을 정도로 평범한 인상이었다.
“여긴 히로시. 현재 1군 유틸리티 내야. 발이 빠르고 아주 영리해요. 내가 본 선수 중에는 최고의 2번 타자?”
히로시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히로토 코치는 이어 한국 선수를 소개했다.
“여기는 김정률 선수. 아마 너희들은 TV에서 봤을지도 몰라. 국가 대표에도 나왔던 투수거든. 통산 선발 100승이 넘는 베테랑이야.”
“오오.”
일본 선수들이 선망의 눈으로 김정률을 바라봤다.
김정률은 멋쩍어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이제는 맛이 갈락 말락 하는 투순데요, 뭘.”
“현재는 재활 중이라 오늘은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야. 아마 전력으로 나섰다면 너희들은 공도 못 건드렸을걸.”
히로토 코치는 김정률을 한 번 더 띄워 줬다.
“그리고 여긴…….”
히로토가 김인환을 가리켰다.
일본 선수들의 눈빛이 변했다.
김정률도 야구 선수답게 탄탄한 몸을 가졌지만 김인환은 헤비급 보디빌더처럼 보일 만큼 온몸이 두텁고 단단했다.
“여긴 김인환 선수. 힘만으로는 내가 본 사람 중에 최고야. 료스케 너도 김인환 선수에 비하면 성인과 중학생 차이?”
료스케보다 타이세이, 히로시가 더 놀란 눈이었다.
료스케는 기분 나쁜 얼굴보단 오히려 수긍하는 눈치였다.
“딱 봐도 몸이 단단한데요?”
“현재는 타격 폼을 수정 중이라 오늘은 장타를 못 보여 줄 수 있어. 아마 홈런을 치기 시작하면 전부 장외 홈런이 나올걸.”
“그 정돕니까?”
김인환은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일본 선수들은 김인환의 허벅지와 팔뚝을 유심히 봤다.
“여기는 신인. 아직 고등학교 졸업장도 못 받은 송석현 선수야. 내가 본 선수 중에 가장 클린한 스윙을 가졌어. 타격 재능은 일본에서도 통할 수 있어.”
통역을 들은 송석현이 두 손을 들어 엑스를 그렸다.
“아뇨. 아닙니다. 드래프트도 못 받았는데요.”
“포수라 오늘 경기에서는 많이 못 뛸 거야. 그래도 나중에 봐. 유심히 보면 너희들도 배워 갈 게 많을 거야.”
소개가 끝나자 양 선수들이 악수를 나눴다.
일본 선수들은 먼저 자리를 뜬 후 히로토 코치가 세 사람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오키나와 베어 팀과 함께 뛸 겁니다. 오키나와에선 꽤 잘하는 팀이에요. 프로로 전향하는 선수들이 종종 나오는 팀입니다. 상대는 히어로 매직이라고 독립야구단이에요. 여기도 꽤 잘합니다. 한국 프로에서 뛰다 넘어온 선수들도 뛰었던 팀이에요.”
김인환이 말했다.
“예, 들어 본 거 같습니다.”
“포지션은 가서 정하겠지만 아마 김인환 선수는 1루나 지명 타자로 뛸 거 같아요. 김정률 선수는 중간에 계투로 뛸 거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가서 몸 풀고 인사하러 가죠.”
세 사람은 코치의 인솔하에 오키나와 베어 팀 감독을 만났다.
감독은 히로토 코치와는 안면이 있는 듯 반갑게 맞았다.
“감독님이 석현이한테도 한두 타석은 꼭 내주겠다고 말씀하시네. 타석수가 더 많으면 좋겠지만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야 할 거 같아.”
송석현이 히로토 코치와 오키나와 베어 팀 감독에게 허리를 숙였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수들이 모여 몸 풀기와 간단한 훈련을 병행했다.
한국에서 100승 투수가 왔다는 소리에 선수들이 술렁였다.
김정률은 이목이 집중돼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훈련을 이어 갔다.
연습 경기라지만 프로 선수들이 참가하자 선수들 얼굴에도 긴장감이 흘렀다.
경기는 히어로 매직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플레이볼!
송석현과 김정률, 김인환은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히어로 매직의 선발은 키가 큰 우완 투수였다.
퍽!
-스트라이크!
“공이 좋은데?”
“140km/h는 나오겠어요.”
“지금 140이면 어깨 풀리면 145는 나온다는 건데……. 일본 아마야구가 센 건 알고 있었지만 보통이 아니네.”
투수는 전형적인 투피치였다.
큰 키에서 나오는 내려찍는 직구, 커브.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며 효율적이었다.
직구로 카운트를 잡고 커브를 결정구로 삼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순식간에 투아웃.
4번 타자로 배정된 김인환이 대기 타석으로 향했다.
“악!”
김인환이 배트링을 끼고 스윙 몇 번을 했을까.
투수의 공이 3번 타자의 옆구리를 맞혔다.
김정률이 혀를 찼다.
“공은 파워풀한데 벌써 제구가 날리네.”
“커브 각이 좋은데 벌써 커브가 저렇게 빠지면 결정구로 삼기 애매하겠는데요?”
“내가 스윽 보니까 여기 애들이 어느 부분은 프로 수준인데 또 어떤 부분은 딱 아마추어 같아. 밸런스가 안 맞는 거지.”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 아니에요? 프로 수준이면 약점만 보완하면 프로로 갈 수 있다는 건데.”
“얀마, 그렇게 쉽게 약점이 보완되면 죄다 프로 하게? 그게 안 되니까 여기서 뛰는 거지. 아무튼 나나 인환이나 큰일 났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가 왔다고 했는데 망신당하는 거 아닌가 몰라.”
타석에 김인환이 들어왔다.
김인환은 타석 맨 앞, 안쪽에 바짝 붙었다.
포수가 김인환의 위치를 확인하곤 눈을 위아래로 훑었다.
한국의 차기 4번 타자라는 소문이 이미 한 바퀴 돈 뒤였다.
투수는 주자를 보지도 않고 오로지 김인환만 노려봤다.
“또 빈볼 던지는 건 아니겠지?”
“아깐 빠진 공이었잖아요. 설마요.”
투수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직구를 던졌다.
김인환의 어깨가 움찔했지만 참아 냈다.
“오, 저걸 참네.”
“볼 배합이 좋네요. 바깥쪽 공을 노리는 걸 알면서도 빠지는 바깥쪽 공으로 범타를 유도한 거 같아요.”
“포수라고 볼 배합을 먼저 보네. 내가 생각해도 좋은 공이었어. 너라면 다음 공으로 뭐 요구할래?”
“당연히 바깥쪽 커브죠. 빠지는 커브.”
“그럼 투볼인데?”
“포볼을 줘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2아웃이라 한 타자만 잡으면 아웃인데 4번 타자랑 정면 승부할 필요 없죠.”
김정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포수들도 다 너처럼 생각하니까 인환이가 그 고생을 한 거지. 아무도 쟤한테 승부를 안 하거든.”
포수는 다음 공도 바깥쪽 직구를 요구했다.
펑.
-볼.
김인환은 이번에도 움찔했다.
“이번엔 너 무슨 공을 요구할 거야?”
“커브죠. 직구 두 개 보여 줬으니 존 가운데 코스에서 바운드되는 커브요.”
“주자가 있는데?”
“어차피 아웃 하나면 되는데 4번 타자를 잡는 데 주력해야죠.”
포수가 송석현의 말을 들은 것처럼, 투수가 커브를 던졌다.
완벽하게 떨어지는 커브.
김인환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하, 바깥쪽 공은 고르는데 변화구는 못 고르네.”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점점 선배도 고치겠죠.”
포수와 투수가 사인을 주고받는 시간이 길어졌다.
“아무래도 약점이 노출된 거 같은데요. 타자가 바깥쪽 공에 예민하게 굴고, 커브에 배트가 쉽게 돌아가니 승부는 피할 거 같아요.”
“한국이나 여기나 똑같네, 똑같아.”
“이럴 땐 그냥 루킹 삼진을 먹을 각오로 배트만 요란하게 흔들고 안 내는 게 상책인데…….”
“그게 되면 쟤가 2군에서도 허우적거리진 않지. 쟤가 성격은 얌전하고 소심한데 배트만 잡으면 조급하고 안달복달해서 말이다. 공만 보면 배트가 나가.”
KPBL 역대 최고의 장사라는 타이틀에 맞지 않는 초라한 1군 성적.
김인환은 배드볼 히터였다.
보통 배드볼 히터는 선구안은 부족해도 컨택 능력으로 밥값을 한다.
김인환은 선구안도, 컨택도 떨어지는 배드볼 히터였다.
배드볼 히터는 풀스윙, 밀어 치기, 플라이, 직선타 등 상황에 맞게 스윙하는데 김인환은 언제나 풀스윙이었다.
성적이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는 스타일.
김인환은 연달아 떨어지는 커브볼에 풀카운트로 몰렸다.
“이러면 여태 훈련한 게 아쉬워지는데.”
김정률이 혀를 차는 사이 포수가 미트를 바깥쪽으로 내밀었다.
무릎 높이에 가져다 대는 미트는 직구를 요구하는 게 분명했다.
“치지 마라, 치지 마라.”
김정률이 두 손을 모았다.
투수는 주자를 신경 쓰지 않고 와인드업하고 공을 던졌다.
공은 스트라이크존의 바깥쪽 라인을 약간 벗어나는 빠진 직구였다.
김인환의 배트가 돌았다.
“아이고.”
김정률은 보지도 않고 한숨을 내뱉었다.
탕!
“……?”
“……!”
김인환의 배트 끝에 걸린 공은 좌익수 방향으로 직선으로 쭉 뻗어 나가더니 그대로 담장을 넘어갔다.
좌익수 방향에 서 있던 료스케는 따라갈 생각조차 못 하고 고개만 돌려 담장을 봤다.
포물선 하나 없는 직선타.
바깥쪽으로 빠지는 직구를 밀어 쳐서 직선타로 좌익수 방향 홈런을 만들었다.
주자는 ‘어어?’ 하면서 공을 구경하다 김인환이 뛰는 걸 보고서야 2루로 달렸다.
“……와.”
“……나도 놀랐다, 이건.”
“인환 선배는 정말 무섭네요. 사람이 아닌 거 같아요.”
“너무 잘하는 것도 문제야. 맞으면 넘어가니까 아예 상대를 안 하잖냐.”
“대박, 초대박. 진짜 탈인간인데요? 메이저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한국에서도 선풍긴데 메이저에 가면 헬리콥터 프로펠러 대신 쓰겠다, 야.”
두 사람은 벤치를 나와 김인환에게 하이 파이브를 날렸다.
벤치의 다른 일본 선수들은 누군가는 얼빠진 얼굴이고, 누군가는 크게 웃었다.
홈런을 맞은 투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고개를 연신 흔들었다.
“후, 확실히 바깥쪽 공은 칠 수 있어요.”
김인환이 벤치에 앉자마자 활짝 웃었다.
김정률이 말했다.
“그래, 뭐라도 하나 건져 가면 다행이지.”
김인환의 홈런 이후에 투수는 두 점을 더 내줬다.
그렇게 3회가 되자 또 김인환의 차례가 왔다.
투수는 아예 스트라이크 하나 없이 바깥쪽 공만 던졌다.
스트라이크 중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바운드 커브 하나 없었다.
“지독하네.”
“저라도 저런 타자한테는 좋은 공 하나도 안 줄 거 같은데요.”
이후 김인환은 계속 볼넷을 얻어 냈다.
그렇게 6회가 되자 감독이 김정률을 불렀다.
“다음 이닝에 뛸 수 있냐고 묻는데요.”
통역사의 말에 김정률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몸 풀고 있으랍니다.”
“오케이, 오케이.”
김정률이 몸을 푸는 동안 송석현은 멍하니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어느덧 6회.
다행히도 오키나와 베어 팀이 이기고 있다.
늦어도 7회에는 들어가야 한 타석이 아닌 두 타석에는 설 수 있다.
“후우.”
송석현이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툭툭.
김인환이 송석현의 팔을 가볍게 쳤다.
“교체. 다음 타석은 나 대신 네가 나가래.”
“저요?”
“어, 너도 몸 좀 풀어. 다음 이닝에 나가야지.”
송석현은 활짝 웃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이자 감독도 사람 좋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원할게. 잘해 봐.”
김인환이 송석현의 어깨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