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아침부터 안 보이더니 여기서 뭐 하냐?”
김정률이 송석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송석현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오냐오냐. 오늘 같은 날은 쉬어야 한다니까. 너 휴식일도 루틴이야. 체력 남는다고 휴식일도 생략할래?”
히로토 코치는 김정률, 김인환과 인사한 후 송석현을 가리켰다.
“내가 데려온 거예요. 오늘 쉬는 날이라 석현 군을 도와줄까 싶어서요.”
“하하, 코치님은 쉬지도 않으세요?”
“저는 이게 쉬는 겁니다.”
“그럼 오늘 언제까지 하시게요?”
“오전 훈련만 하고 그만하려고 합니다. 오늘 휴식일이니까요.”
“그래요? 그럼 저희가 합류해도 되죠?”
히로토 코치가 난색을 표했다.
“아…… 어쩌죠, 석현 군 훈련을 도와주기로 한 거라. 오늘 훈련할 거면 원래 루틴대로 오늘 오후에 코칭하면 안 될까요?”
“아, 아. 괜찮습니다. 저희는 따로 훈련할게요. 원래 하던 대로 석현이 봐주세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예, 저희도 그냥 심심해서 나온 거라 훈련을 빡세게 할 생각은 없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고, 감사는 저희가 드려야죠, 쉬는 날에도 이렇게 나와 주신 건데.”
히로토 코치는 송석현에게 돌아왔다.
“김정률 선수가 오늘은 너 가르쳐도 좋다고 허락했어. 오전 동안은 나랑 같이 훈련하자.”
송석현은 김정률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했다.
개인 트레이너를 고용한 것도 김정률이고 일체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김정률이다.
인색한 선수는 모든 일정과 훈련을 자신에게 맞추기도 한다. 모두가 김정률처럼 아량이 넓진 않았다.
“그럼 마저 해 볼까?”
송석현은 토스배팅에 이어 프리배팅을 이어 갔다.
프리배팅인 만큼 송석현은 바깥쪽 밀어 치기로 일관했다.
몸 쪽 붙는 공마저 바깥쪽으로 밀어 쳤는데 선상을 벗어나는 공이 없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김정률과 김인환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쟤가 신고라니, 뭐가 잘못된 거 같지 않아?”
“배트 다루는 솜씨는 저보다 나은 거 같은데요. 일단 스윙 자체가 퓨어해요. 폼이 특이하긴 해도 스윙의 궤적이 일정하다는 건 자기 폼이 있다는 거니까.”
“야구 책을 본다고 저런 게 되나?”
“저도 안 봐서 모르죠.”
“너는 생긴 건 공부 잘하게 생겼는데 그런 것도 안 봐?”
김인환이 목을 긁적거렸다.
“형은 봐요?”
“아니.”
“형도 안 보면서 왜 저한테 그래요?”
“물어본 거야, 그냥.”
송석현이 친 공이 우측 담장을 넘어갔다.
김정률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제 갓 20세가 밀어서 홈런을 치네.”
“그러게요.”
“뭐, 너는 당연한 거라 감흥이 없으려나?”
“음? 벌써 정리하는 거 같은데요?”
“벌써?”
송석현은 프리배팅을 마치고 배트를 내려놨다.
차렷 자세로 선 송석현이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저건 뭐야?”
“저건 저도 처음 보는데.”
히로토 코치는 송석현에게 몇 가지를 더 주문한 뒤 손뼉을 치며 훈련을 마쳤다.
불과 20분도 되지 않는 훈련 시간.
김정률과 김인환이 히로토 코치에게 다가갔다.
“벌써 훈련이 끝났습니까?”
히로토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뭘 더 해 봐야 사족이에요. 이미 스윙 폼 자체는 흠잡을 게 없어요. 자세를 유지하면서 스윙 플래인을 맞추는 거 보면 자기 스윙이 있는 타잡니다. 이런 타자는 오히려 스윙 연습을 적게 가져가는 게 좋아요.”
김인환이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적은 거 아닙니까? 아니면 저희가 오기 전에 이미 많이 하신 겁니까?”
“아뇨. 오늘 많아야 한 오십 번은 했을까요.”
“스윙을 그렇게 적게 해도 되나요?”
“그럼요. 스윙 자체는 많이 가져가면 안 돼요. 오히려 스윙은 하루에 많아도 백 번을 넘기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김인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루에 1시간, 많게는 2시간, 3시간도 배트를 돌리는 게 훈련의 정석이다.
하물며 스윙 백 개는 쉬지 않고 빠르게 돌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다.
“일본에선 그렇게 합니까?”
히로토 코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본도 똑같이 많이 합니다.”
“그러면 코치님의 방법입니까?”
“저만의 방법은 아닙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저처럼 스윙 자체는 적게 가져가는 선수도 있어요.”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그게 정말 도움이 될까요?”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많이 하면 좋다. 아니에요. 꼭 많이 한다고 좋은 게 아니에요. 많이 할 때와 안 할 때를 구분해야 합니다. 스윙이 완성됐다면 스윙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해요. 만약에 스윙이 완성됐는데도 하루에 2~3시간씩 스윙 연습을 한다? 그러면 오히려 스윙이 망가질 수 있어요.”
“……그런 건 처음 듣는데요. 스윙이 망가진다고요?”
“스윙이라는 건 많은 체력을 소모하고 근육을 쓰는 일입니다. 하면 할수록 지치고, 지치면 나쁜 버릇이 들게 마련이에요. 지칠수록 스윙이 퍼지는데, 알게 모르게 습관처럼 몸에 배입니다. 훈련이 필요하면 단계적으로 필요한 부분만 조금씩 수정해야지, 무턱대고 스윙을 많이 한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에요.”
히로토 코치의 단호한 말에 김인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김인환은 여태 타고난 힘과 더불어 성실함을 무기로 프로 생활을 버텼다. 훈련을 빼먹은 적이 없고, 안 되는 날이면 야구방망이를 수백 번 돌리는 게 일상사였다.
잘 치는 날이라고 쉬는 법은 없었다.
잘 치든 못 치든, 연습 또 연습에 몰두했다. 하루에 천 번이 넘는 스윙을 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여태 성적이 좋지 않아도 김인환은 자신은 충분히 연습을 해 왔기에 마음 한편이 떳떳했다.
한데 히로토 코치는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연습은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이지, 연습 자체가 목적이 돼선 안 돼요. 결과가 안 좋으면 과정도 안 좋은 법입니다. 연습에 매몰돼선 안 돼요. 프로라면 더더욱.”
김인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히로토는 마치 김인환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거리낌 없이 말했다.
연습에 매몰된 선수, 딱 자신을 말하지 않는가.
결과는 내지 못하면서 연습만 하는 선수.
“어…… 음……. 마실 거 가지고 올까요?”
송석현은 분위기가 얼어붙자 음료수를 가져왔다.
음료수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넸다.
김인환은 음료수를 내려놓곤 배트를 잡았다.
“저도 한번 봐주시겠어요?”
* * *
송석현과 김정률은 훈련은 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앉아 음료수를 홀짝거렸다.
“아, 어쩌죠. 히로토 코치님이 괜한 소리를 해서 눈치 보여요.”
“무슨 소리?”
“제 칭찬을 너무 하셔서 인환 선배가 좀 기분이 상하신 거 같아서요.”
김정률이 피식 웃었다.
“너 칭찬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다른 문제지.”
“인환 선배의 표정이 굳었던데요?”
“그거야 뭐…….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너 때문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훈련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빨리 끝난 송석현과 달리 김인환은 1시간이 넘도록 배트를 돌리고, 코칭받고, 돌리고, 코칭받고…… 쉬지 않았다.
히로토 코치는 자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고, 김인환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점심시간이 다 가서야 훈련이 끝났다.
김인환은 땀에 흠뻑 젖어 녹초가 됐다.
“오늘은 이만하고 쉬도록 하죠. 저도 피곤하네요.”
히로토 코치는 별다른 말 없이 먼저 숙소로 들어갔다.
김정률은 히로토 코치와 김인환을 번갈아 보더니 김인환에게 다가갔다.
“뭐, 싸웠어?”
“아뇨.”
“그런데 분위기가 왜 냉랭해?”
“그래요? 저는 잘 몰랐는데.”
“무슨 얘기를 했길래 계속 훈련하다 말고 얘기하고 또 했어?”
“제가 바깥쪽 낮은 공이 약점이라고 하니까 보통은 톱 핸드가 일찍 돌아서 그런 거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어퍼 스윙을 하게 되면 톱 핸드에 힘이 많이 들어가게 된다나? 제가 고칠 방법이 없냐고 물으니까 교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다른 방법을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뭐 방법이 있대?”
“배터 박스 앞에 바짝 붙고 박스 안쪽에 서래요, 바깥쪽 공이 빠지기 전에 치는 방법밖에 없다고.”
“네가 한 거랑 정반대네? 넌 뒤에서 쳤잖아.”
“네, 어차피 제 스윙의 문제라, 공을 조금 더 오래 본다고 변화구를 치는 건 아니니까 차라리 변화구가 덜 꺾일 때 치는 게 낫다고 해서요. 앞으로 그 방향으로 가 보려고요.”
“음…… 그러면 몸 쪽 공은 쥐약이지 않아?”
“그렇기는 한데 일단 바깥쪽 공을 치는 게 중요하니까요. 몸 쪽 공을 던지면 그때 고민해 봐야죠.”
김정률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단점이 없는 스윙은 없다.
어떤 스윙이든 강점이 있고,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김인환은 거포의 장점을 잃지 않기 위해 자세는 유지하되 배터 박스 뒤쪽에서 공을 더 오래 보는 방법을 고수했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괜찮겠어?”
김정률의 질문에 김인환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몸 쪽 공은 버리고 바깥쪽 공을 공략한다는 얘기는 장타율 감수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다.
바깥 쪽 공은 잘 치더라도 장타가 나오기 힘들다.
약점을 보완하는 만큼 강점도 줄어든다.
“너 석현이랑 얘기하고 나서 뭔가 깨달은 거 같더니만 왜 폼을 극단적으로 바꾸는 거야?”
김인환이 쓰게 웃었다.
“석현이처럼 치는 건 석현이가 때가 안 묻어서 그렇대요. 나쁜 버릇이 안 들어서 자기 스윙으로 어디든 칠 수 있는 건데 저는 배트가 빨리 뒤집힌대요. 제가 석현이처럼 하면 배팅볼은 몰라도 바깥쪽으로 빠지는 프로 선수의 변화구를 안타로 만들긴 힘들 거라고 해서요.”
“후우우, 모르겠다. 네 장점은 결국 장탄데 말이야.”
“저도 그거 때문에 고민했는데 프로는 일단 살아남는 게 우선이라고 하는 게 마음에 딱 와닿았어요. 스윙을 전부 다 뜯어고치려고 하면 늦는대요.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개선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니 바깥쪽 공부터 하나씩 해 보려고요.”
“그래, 뭐. 일단 해 봐. 스윙을 뜯어고치는 데 들이는 시간보단 그게 훨씬 빠르겠네.”
김인환은 뒷정리를 하는 송석현을 바라봤다.
“저도 어릴 때부터 제대로 스윙을 배웠다면 좋았을 건데……. 석현이가 부럽네요.”
“부러워하지 마라. 우리나라 타자들은 다 너 부러워한다. 세상에 너보다 장사가 어딨냐?”
“힘만 세면 뭐 해요, 맞히질 못하는데.”
“이젠 맞힐 거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김인환이 한숨을 쉬었다.
“저는 저 나이 때 코치가 하란 대로만 했는데…….”
한 달의 전지훈련도 어느덧 마지막 주에 이르렀다.
김정률은 팔 스윙이 언더와 사이드 중간쯤까지 올라왔다.
김인환은 배터 박스 상단에 바짝 붙는 자세에 익숙해졌다.
송석현은 군살이 더 빠지고 근육이 붙었다.
김형석만 훈련을 참가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해외 전지훈련을 마치기 닷새 전.
히로토 코치는 네 사람에게 이색적인 제안을 했다.
“혹시 괜찮으면 여기서 연습 경기 좀 해 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