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에 대하여
상식.
상식이란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식, 가치관, 판단을 말한다.
모든 분야엔 상식이 있다.
물론 야구도 마찬가지다.
세상 어디에나 상식이 있는 게 상식이라면 시대가 변하는 것도 상식이었다.
한국 프로야구는 시대의 흐름에 항상 몇 발자국 뒤처졌다.
한국 프로야구가 2000년대 들어 크게 발전했으나 학생 야구부터 프로야구까지 몸으로 배우고 익히는 데만 치중할 뿐,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연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 * *
“정체요?”
송석현은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뭐, 야구 박사야? 너 어떻게 그런 걸 다 줄줄 꿰고 다니냐?”
김형석이 웃음을 보이자 송석현도 따라 웃을 수 있었다.
농담이었구나.
“줄줄 꿰는 게 아니라 이 정도는 조금만 검색해도 나옵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저도 막 찾아본 거구요.”
“열정이 대단하네. 이런 걸 찾아봤다고?”
“저 혼자 한 건 아니구요……. 제 친구 중에 야구 오덕이 있는데 그 친구랑 있으면서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그 덕에 저도 검색하고 찾아보고 하는 게 몸에 배여서요. 사실 완전 노 베이스에서 야구 서적을 읽는 건 오래 걸려도 야구 선수들은 금방 읽고 이해하거든요. 시중에 풀린 야구 책 중에 읽은 만한 책 추려도 50권이 채 안 될걸요. 오히려 번역된 책들이 너무 없어서 매일 새로운 거 없나 검색하는 게 제 취미이다 보니……. CSR도 검색하다 알게 된 겁니다.”
“요새 애들은 너처럼 다 그렇게 공부하나? 대단하네, 어린애가 이런 것도 알고.”
“그냥 취밉니다, 취미. 이론이죠. 실전이랑 같겠습니까? 제가 할 것도 없고 친구도 야구 이론에 빠삭하다 보니 같이 지내면서 귀동냥으로 들은 게 많아서요.”
김인환이 손을 들었다.
“CSR이 뭔지는 이해했어. 그런데 베이브 루스도 너처럼 스탠스 좁게 하고 쳐?”
“아아, 그거요?”
송석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이건 제가 그냥 하는 거예요. CSR이 장타력을 높이는 데 가장 주효하다면 굳이 스탠스를 넓히고 히팅 포인트를 높이고, 레그 킥을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전부 파워는 올려도 정확도를 낮추는 방법인데요. 그래서 말이죠.”
송석현이 자리에 서서 타격 자세를 보였다.
“요새 메이저리그에선 어슬레틱스스탠스가 유행이잖습니까? 스탠스를 좁히는 대신 상하 반동을 넣어서 타격하면 정확도는 높이고 파워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으니까 저도 어슬레틱스로 해 본 거죠.”
“……그게 뭐야? 어슬레틱스?”
송석현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베이스가 없어도 너무 없다.
최근 트렌드만 모르는 게 아니라 야구 이론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다.
송석현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자신도 야구를 배울 때 코치가 하란 대로 하면서 몸으로 익혔지 야구 이론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한 적이 있던가.
프로는 다를 줄 알았지만 프로도 똑같다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스탠스가 다리 넓이에 따라서 컨택, 슬러거, 노스텝, 어슬레틱스가 있잖습니까? 어슬레틱스는 컨택스탠스랑 비슷한데 대신 무게중심을 앞다리가 아니라 양쪽에 비슷하게 두는 겁니다. 상하 움직임으로 통통 튕기듯 스윙하는 거죠. 요새 메이저리그는 커터나 싱커처럼 빠른 변화구가 많으니까 여기에 대처하려고 나온 스탠스죠.”
김인환과 김형석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송석현이 하는 말은 분명 야군데 여태 들어 본 적이 없는 내용이라 나설 수 없었다.
알은체를 했다가 후배 앞에서 망신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송석현도 두 사람의 반응을 읽고 더 쉽게 얘기했다.
“그러니까 자세하게 설명하자면요…….”
* * *
송석현은 근 1시간이 넘도록 때아닌 강의를 했다.
왜 스탠스를 좁게 서는지, 왜 팔꿈치를 몸에 붙여야 하는지, S각이 무엇인지 등등 입이 마르도록 얘기를 이어 갔다.
송석현이 물을 마시는 사이 김인환이 물었다.
“그러니까 팔꿈치를 몸에 붙이면 선구안이 좋아진다는 거야?”
“선구안이라기보단 컨택이 더 쉬워지는 거죠. 히팅 포인트를 낮추고 팔꿈치를 몸에 붙이면 배트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각도가 낮아지고, 그러면 공과 배트가 만나는 면이 더 넓어지죠. 그 말은 배트로 공을 칠 수 있는 임팩트 에어리어, 그러니까 음…… 컨택트 존이라고 하죠? 공을 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져요. 그래서 제가 공을 뒤에서 때릴 수 있는 거죠.”
이쯤에서 김형석은 아예 뒤로 빠졌다.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투수인 자신이 고생할 필요가 무언가.
“보통은 그렇게 때리면 밀리는데 톱 핸드가 접혀 있어서 CSR 값이 커서 밀리지 않고 공이 나간다는 거고.”
“예, 경수인 선배도 비슷하게 포수 미트에서 공을 꺼내 친다고 할 정도로 임팩트가 뒤에 있는데 이건 저랑 달라요. 경수인 선배는 노 스트라이드지만 스트라이드를 넓게 해서 하체 힘으로 공을 밀어내는 거예요. 저는 하체 힘은 줄이는 대신 CSR 값을 키워서 치는 거라 체력 소모가 적고 공을 맞히기 더 쉬워요.”
“공은 왜 맞히기 쉬운 거야?”
“하체 이동이 크지 않으면 그만큼 몸의 중심이 안 흔들리니까 공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자세를 갖춰서 치기 좋죠.”
“아…….”
“물론 이런 타격도 단점이 있어요. 팔꿈치를 계속 임의적으로 붙이면 바깥쪽으로 스트라이크가 후한 심판을 만났을 때 답도 없죠. 그냥 눈 뜨고 코 베이는 거예요. 아예 배트가 닿지 않으니 못 치는 거예요.”
“그러면 곤란한데.”
김인환의 약점은 바깥쪽 변화구.
바깥쪽 공을 치지 못한다면 송석현의 조언이 의미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송석현이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그 정도로 정밀 제구를 할 투수는 전 세계를 뒤져도 많지 않아요. 공 하나만 빠져도 볼인 지점이니까 후하게 쳐도 공 두 개 정도예요. 바깥쪽 공 한 개에서 한 개 반을 포기하는 대신 정확도를 높이는 거죠. 장점 아닌 장점이라면 애초에 바깥쪽 공 공략이 안 되니까 바깥쪽에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변화구는 아예 배트가 안 나가요. 공이 잘 들어오면 루킹 삼진, 아니면 볼. 조금 더 선택의 폭이 넓어지죠.”
“그런가?”
“이건 저도 확신할 수 없어요. CSR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CSR을 높이는 타격은 결국 당겨 치기가 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면 애매하게 바깥쪽 공을 노리느니 버릴 건 버리고 나머지를 확실히 당겨서 넘겨 버리는 게 CSR 타격의 목표예요.”
김인환이 이론적 토대가 부족하다고 한들, 평생 야구만 하던 남자다.
송석현의 설명이 자세해지자 실마리가 잡혔고, 실마리가 잡히자 이해할 수 있었다.
“아예 바깥쪽 공을 버리는 게 되나?”
“이건 이론이라 저도 확답을 드릴 순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해 보니까 고교야구 수준에선 무조건 통했어요. 그 정도로 던질 수 있는 투수는 없으니까. 프로는 모르겠어요. 제가 아직 안 겪어서요.”
얘기가 끝났다.
김형석은 기지개를 켰다.
“훈련 흐름이 완전히 끊겨 버렸네. 정률이도 없고 어수선한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고 내일 제대로 하는 건 어때?”
김인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형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이따가 들어갈게요.”
“너는 더 하고 오게?”
“네, 지금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김형석은 두말하지 않았다.
감이 왔을 때, 이거다 싶을 때 해야 깨우침이 있다.
송석현이 하는 말이 그저 이론에 불과한 허상이든 새로운 이론이든, 실마리가 잡혔다면 파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나 먼저 들어간다.”
컨디셔닝코치와 김형석이 먼저 들어갔다.
송석현은 김인환의 요청에 야구장에 따로 남았다.
“네가 내 자세를 좀 봐 줄 수 있어?”
“제가요?”
프로 3년 차 선수의 폼을 봐 달라고 하는 게 무슨 가당찮은 소린가.
송석현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지만 김인환은 완고했다.
“어차피 네가 말한 CSR 이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지금 여기 너밖에 없어. 네가 봐주는 게 맞지.”
“저도 그냥 이론만 좀 공부하고 나머진 제멋대로 해석한 거라서요. 제가 어떻게 선배님한테 조언을 드립니까?”
“너한테 책임지란 얘기 안 해. 한번 무슨 느낌인지 감을 잡아 보려고 하는 거야.”
“그래도…….”
“일단 공 좀 던져 줄래? 공 던지면서 한 번씩 봐줘.”
김인환의 강권 아닌 강권에 송석현도 공을 들었다.
김인환은 자세를 잡고 송석현의 공을 기다렸다.
탕!
김인환이 친 공이 파울이 됐다.
아까보다 스탠스를 좁힌 데다 배트가 공보다 빨리 돌아간 덕이었다.
“계속 던져 줘.”
김인환이 치는 공은 자꾸 파울이 됐다.
스탠스를 좁혀 배트 시동이 빨라지자 타이밍도 빨라진 덕이었다.
김인환은 앞발을 조금 더 안쪽으로 뒀다.
클로즈드 스트라이드.
배트가 나오는 시간이 길어지지만 몸 쪽 공을 공략할 때 쓰는 자세였다.
탕!
김인환이 친 공이 중견수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워닝트랙까지 바로 날아갔다.
“좋았어.”
송석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선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시점이다.
김인환은 1라운더 출신이다.
단순히 힘만 좋다고, 야구 센스만으로 1라운드 픽이 될 순 없다.
탕!
탕!
김인환의 공이 치는 족족 담장을 향해 날아갔다.
* * *
송석현은 녹초가 돼 침대에 누워 있었다.
김인환의 성실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공을 치고 송석현에게 묻고, 또 공을 치고 또 송석현에게 물었다.
김인환의 열정을 마주하다 보니 절로 진이 빠졌다.
“오늘 훈련 잘했나?”
“아, 선배님. 오셨습니까?”
김정률은 저녁 늦게야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 훈련은 열심히 했고?”
“예, 열심히 했습니다.”
“형석이는 공 좀 던졌어? 넌 잘 받았고?”
“아니요. 그게 오늘 훈련 일정이 좀 어그러져서요.”
“나 없으니까 시작부터 뺑끼구만, 하하.”
“아니, 그건 아닌데……. 아무튼 오늘은 좀 다른 의미로 힘들었습니다.”
김정률은 침대에 앉았다.
“나도 오늘 힘들었다. 후쿠오카에 갔다 왔거든.”
“후쿠오카요? 아, 그러면 그 코치 만나고 오신 겁니까?”
“그래, 만나고 왔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개인 트레이닝 센터를 준비하고 있더라.”
“아아, 다행이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고 오신 겁니까?”
“한 달 동안 코치로 고용하기로 했다.”
“정말요? 한 달이나? 와!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히로토 코치가 이리로 오는 겁니까?”
김정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이번 전지훈련이 돈이 제일 많이 나가는 거 같다. 이리로 내일이나 모레에 올 거야. 너 얘기하니까 신기해하더라, 어떻게 자기를 알았냐고. 덕분에 얘기가 잘 풀렸어.”
“유능한 코치니까 선배님 입스를 꼭 치료해 줄 겁니다.”
“그래야지. 올해도 복귀 못하면 난 강제 은퇴 각인데. 형이 또 올라가야 너도 끌어 주고 할 거 아니냐. 안 그래?”
송석현도 따라 웃었다.
“예, 그럼요. 끌어 주십쇼. 잘 끌려가겠습니다.”
“짜식, 어린 놈이 넉살은. 하하하, 오늘 뭐 했어? 별일 없었어?”
“아, 별일은 아니고, 오늘 김인환 선배님이랑 같이 훈련을 하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