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타 거포 김인환
“안녕하십니까! 송석현이라고 합니다!”
송석현은 김인환에게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했다.
김인환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래, 잘 부탁한다.”
김인환은 송석현과 키는 비슷했지만 어깨며 팔뚝이 한 치수 이상 차이가 났다.
덩치는 남달랐지만 얼굴은 길 가다 흔히 보는 딱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아마 얼굴만 슬쩍 본다면 김인환의 몸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거다.
“여기 형석이랑 내 개인 트레이너랑 해서 내일 출발할 거야. 다들 여권 챙겼지? 여권 놓고 다니는 놈은 바로 빠꾸시켜 버릴 거야.”
“네, 잘 챙겼습니다.”
“그래, 앞으로 한 달 정도는 함께 지낼 건데 오늘 밥 한 끼 먹으면서 좀 친분을 다지자고 같이 부른 거야. 괜찮지?”
김인환과 김형석은 별말이 없었다.
송석현은 큰 목소리로 답했다.
“네! 좋습니다.”
“좋아. 그럼 일본에 가기 전에 한국 음식 왕창 먹자고. 청국장 어때?”
* * *
네 사람은 청국장을 먹은 후에 2차로 삼겹살까지 먹었다.
술 하나 없이 밥으로만 2차를 간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한 사람당 2인분 이상씩 먹는데도 위화감이 없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 보자.”
김인환과 김형석은 먼저 자리를 떴다.
김정률은 송석현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오늘 고생했다, 분위기 맞춘다고.”
“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네가 좀 이해해. 인환이는 원래 낯도 많이 가리고 말도 없어. 그래도 애가 착하고 좋은 놈이니까 쫄지 마. 덩치만 저렇지 애는 순딩이야, 순딩이.”
“예, 제가 잘해 보겠습니다.”
“형석이는 안 가겠다는 거 내가 우겨서 같이 가자고 한 거라 애가 팅팅거리는 거야. 네가 싫거나 그런 거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
“안 가신다고요?”
“쟤도 원래는 은퇴 각이 잡혔거든. 근데 공은 아직도 괜찮아. 부상이 문제지. 이참에 따뜻한 나라에서 재활하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붙잡은 거야.”
12월이면 구단에선 선수단 정리에 들어간다.
1월을 앞둔 지금 아직 선수단에 남아 있다는 건 아직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뒀단 얘기다.
스프링캠프에 합류하지 못하거나 그 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정리 대상에 오르겠지만…….
“둘 다 좀 까칠하고 짜증 낼 수도 있으니까 그냥 넘겨 버리라는 얘기야. 그게 너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니까 쫄지 말라고.”
“예,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준비 잘해. 내일 보자.”
“네, 들어가십쇼.”
김정률이 자리를 먼저 떴다.
송석현은 홀로 남아 어스레한 2군 경기장을 바라봤다.
* * *
일본까지는 눈 깜짝할 새였다.
탑승 수속이 더 오래 걸릴 뿐이었다.
네 사람은 일본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연습장으로 했다.
“급하게 알아보느라 좋은 데는 못 구했어. 그래도 이 정도면 완전 최하급은 아니고 중상에서 중급 정도? 어때? 괜찮지?”
김정률과 동갑인 김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됐지.”
“오늘은 첫날이니까 가볍게 몸만 좀 풀고 여기 구경하고 돌아갑시다. 시차 적응해야 할 거 아니냐.”
김정률의 농담에 김인환이나 김형석이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송석현도 웃을 타이밍을 놓쳐 딴 곳을 바라봤다.
“……일단 구장을 좀 둘러볼까?”
저녁은 소바였다.
오키나와에서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한 끼를 해결한 후 네 사람은 숙소로 돌아왔다.
송석현은 첫 해외여행이자 해외 전지훈련을 기념하기 위해 다시 숙소에서 나와 거리를 거닐었다.
거리 사진을 찍고 편의점에도 들러 간식거리를 샀다.
편의점 비닐 봉투를 끼적거리며 돌아오는 길.
숙소 앞을 나서는 김인환과 마주쳤다.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송석현이 묵례했다.
김인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답답해서 좀 걸을까 하고 나왔지. 넌? 뭐 심부름 나온 거야?”
“아, 이거요?”
송석현이 봉투를 들어 올렸다.
“아니요. 그냥 여기가 신기하기도 하고 해서 좀 둘러보던 중이었습니다.”
“그래? 해외는 처음인가?”
“네, 처음입니다.”
“음…… 그래. 많이 돌아다녔어?”
“아뇨. 제가 여긴 잘 몰라서요. 혹시 길을 잃을 수도 있고 해서 편의점만 갔다 오는 길입니다.”
“그래…….”
김인환은 더는 별말이 없었다.
송석현은 김인환의 대답을 기다리다 먼저 말했다.
“선배님,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송석현이 김인환을 지나쳐 숙소로 가려 하자, 김인환이 송석현을 불렀다.
“내가 여기 구경시켜 줄까? 난 자주 왔는데.”
“예?”
“……부담스러운가?”
“아닙니다.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혹시 귀찮게 하는 걸까 봐요.”
“아니야. 괜찮아. 시간 되면 같이 가지.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는 거 괜찮지?”
“네, 전 좋습니다.”
계획도 없던 데이트가 잡혔다.
송석현은 김인환의 반걸음 뒤를 따르며 걸었다.
걷는 내내 김인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횡단보도 앞에 두 사람이 신호를 기다리는 차에 김인환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미안하다. 내 소개도 제대로 안 하고, 너한테 제대로 묻지도 못했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하.”
“형한테 얘기는 들었어. 신고로 들어왔는데 재활군이라고. 많이 힘들지?”
“괜찮습니다. 정률 선배님이 워낙 잘해 주셔서 저는 만족합니다. 선배님 덕에 해외 전지훈련도 오고, 네……. 하하, 좋습니다.”
김인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도 들었을 거 아냐, 재활군이 어떤 곳인지. 말만 재활군, 3군이지 구단이 케어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너도 힘들 거야. 다들 뭐 힘들어하고 있으니까.”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김인환은 다시 말이 없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길까지 왔을 무렵 김인환이 말했다.
“그런데 정률이 형이 왜 갑자기 전지훈련을 오자고 한 거야?”
“아……. 선배님한테 말씀 안 해 주셨나요?”
“별말이 없었어. 일단 무조건 오라고, 그렇게만 말했어.”
“그게요…….”
송석현은 김정률이 지난 한 달간 어떤 훈련을 했는지 귀띔했다.
“입스 극복 훈련이 제법 효과가 있어서요. 선배님께서 희망을 좀 보신 거 같습니다.”
“효과가 있어……? 아니 그것보다, 입스 극복 훈련이라는 게 있었어?”
“예, 국내 서적에도 잠깐 소개된 부분인데 제 친구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인터넷을 뒤져서 드릴을 찾아봤습니다. 이번에 일본에 온 것도 입스 극복 훈련 개발자가 일본 프로 팀 코치 출신이라서 겸사겸사 온 것도 있습니다.”
김인환이 걸음을 멈췄다.
“그래서? 그 코치가 누군데?”
“풀네임은 기억이 안 나고 무슨 ‘히로꼬? 히로토?’였던 거 같은데……. 정률 선배님이 지인에게 부탁해서 찾아본다고만 해서 저도 더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 음…….”
김인환은 우뚝 서서 생각에 잠겼다.
송석현은 김인환의 뒤에서 기다렸다.
“가자, 숙소로.”
김인환이 걷는 속도를 높여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자 김인환은 김정률을 따로 불렀다.
송석현은 먼저 방에 들어가 씻고 잘 준비를 했다.
덜컥.
송석현이 핸드폰을 보는 사이 김정률이 방에 돌아왔다.
“석현아.”
“네, 선배님.”
“인환이랑 아까 무슨 얘기 했어?”
“인환 선배님이랑요? 그냥 이런저런 얘기 했습니다.”
“그래?”
김정률이 웃으면서 침대로 돌아왔다.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재밌어서, 저놈이 저렇게 버닝하는 거 오랜만이거든. 빨리 코치를 찾으라고 난리다. 히로토 코치 어딨냐고 어찌나 묻던지.”
“아아, 아까 선배님 얘기도 했거든요. 일본에 온 이유 중에 코치 찾는 것도 있다고.”
“풀 죽어 있던 놈이 이제야 좀 활기가 생기는 거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말해 줄걸.”
김정률은 김인환과 김형석에게 자신이 어떻게 입스를 극복 중이고 어떻게 훈련을 시작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아직 앳되디앳된 송석현의 조언으로 훈련을 시작했다고 말하면 두 사람이 과연 믿을까?
설령 믿더라도 여기서 더 진전이 없다면 자신은 거짓말을 하는 셈이다.
김정률이 김인환, 김형석과 친하기에 함께 전지훈련을 왔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김인환은 영점이 고장 난 거포였고 김형석은 고질적인 허리 부상을 달고 사는 투수였다.
일본에서 찾은 히로토 코치가 혹시 두 사람에게 전환점을 마련해 주지 않을까, 기대감을 갖고 두 사람을 불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에 말을 아꼈는데 생각보다 김인환의 반응이 뜨거웠다.
“저…… 그런데 히로토 코치 행방은 찾으신 겁니까?”
“어, 생각보다 찾기 쉽더라. 아무래도 프로구단 코치까지 한 사람이라 몇 다리 건너니까 아는 사람이 있더라고.”
“그러면 일본에 있는 겁니까?”
“응, 후쿠오카에 있다더라. 정확히 후쿠오카 어딘지, 전화번호는 뭔지 몰라서 며칠 더 기다려 보려고. 그래도 금방 찾을 거 같아.”
“빨리 찾았으면 좋겠네요.”
“찾아도 문제다. 실력이 좋으면 이미 계약이 돼 있을 거 같은데.”
“정 그러면 방향성이라도 알려 달라고 졸라 보면 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바빠도 그 정도 시간은 있겠죠.”
“그렇겠지?”
다음 날 아침.
송석현은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떴다.
제대로 된 첫 해외 전지훈련.
비록 스프링캠프는 아니지만 송석현에겐 이마저도 감지덕지였다.
송석현이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으…… 후우.”
고개를 돌려 김정률을 깨우려 보는데 김정률이 보이지 않았다.
“……응?”
화장실을 가도 김정률은 없었다.
옷을 챙겨 입고 식당으로 내려가도 없었다.
“어, 정률이는?”
아침을 먹기 위해 내려온 김형석이 송석현을 보자 물었다.
“어디 가셨는지 안 보이시는데요.”
“이 시간에? 이 시간에 어딜 가? 저녁에 같이 잔 건 맞아?”
“네, 그럼요.”
“뭐야? 아침나절부터 어딜 갔어, 이놈이?”
김형석은 전화기를 들었다.
김정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었다.
“방에는 없는 거 맞지?”
“네.”
“이 아침부터 누구랑 통화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일단 밥 먹자. 통화하는 거 보니까 별일은 없겠지.”
송석현은 김형석, 김인환과 아침을 함께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김정률은 내려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통화 중이었다.
아침 훈련할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김정률에게 연락이 없었다.
세 사람은 옷을 차려입고 로비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
“…….”
김인환과 김형석은 둘 다 말이 없었다.
김인환은 어제 송석현과 얘기를 나눴지만 오늘은 처음 만날 때처럼 침묵을 지켰다.
위잉.
호텔 자동문이 열리면서 김정률이 들어왔다.
송석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어, 그래. 다 나와 있었네. 아, 훈련하러 갈 시간이구나. 벌써 그렇게 됐네.”
김형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아침부터 어딜 갔다 왔냐? 훈련하는 시간은 지켜야지.”
“어, 어. 미안. 아침부터 전화할 데가 있어서 말이야. 아무튼 잘됐네, 너희 셋 다 여기에 있어서.”
김정률이 말했다.
“나 잠깐 갔다 올 데가 있으니까 너희 먼저 훈련해. 빠르면 오늘 저녁, 늦으면 내일이나 모레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