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훈련
“전지훈련요?”
송석현은 귀를 의심했다.
지금은 비활동 기간이다.
전지훈련을 가려면 최소한 1월 말은 돼야 팀이 움직인다.
지금 2군은 해외에서 교육리그를 뛰고 있는데, 갑자기 송석현을 교육리그에 넣을 리는 없다.
“그래, 인마. 형이랑 따땃한 바람 좀 쐬고 올래?”
“어떤 전지훈련을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2군 교육리그에 합류하라는 말씀이신지……?”
“아니. 내가 무슨 단장도 아니고 너를 어떻게 교육리그에 바로 꽂냐? 그게 아니라, 나랑 일본으로 전지훈련 가자고.”
“아아.”
송석현은 뒤늦게 김정률의 말을 이해했다.
비활동 기간에도 모두가 쉬는 건 아니다. 특히 1군 선수들은 따로 친한 선수들과 삼삼오오 모여 개인 훈련을 한다.
사정에 따라 제주도, 일본, 미국, 호주 등으로 나가는데 베테랑 선수들의 경우 연봉이 부족한 저연차 선수들을 자비로 데려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송석현이 김정률과 오래 2군에 있다 보니 김정률이 스타 선수였다는 걸 망각했다.
“어때? 관심 있어?”
“저야 물론 당연히 좋긴 한데…….”
“돈은 걱정하지 말고. 형이 너한테 돈을 받겠냐?”
“……그래도 될까요?”
“돼, 돼, 인마. 어차피 포수도 필요하고, 형이 너한테 도움 받은 것도 있는데 이 정도도 못 해 주겠냐? 마음 편히 가면 돼.”
송석현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원래는 가려면 진즉에 갔어야 했는데 올해는 내가 좀…… 그래서. 어영부영하다 보니 안 갔어. 스캠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아서 좀 짧긴 해도 겨울에 실내에서 하는 거랑 따뜻한 바람 맞으면서 하는 건 또 다르거든. 이번 주까지 준비해서 다음 주중에 가는 거로 하자.”
“그러면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지금 미국이나 호주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고. 일본으로 가야지, 오키나와로.”
“일본요?”
송석현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면 저번에 말씀드린 코치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입스 치료 훈련을 만든 사람?”
“예, 선배님이 효과를 보셨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원작자한테 체크 한번 받아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음…….”
김정률이 고민에 잠겼다.
전에는 큰 믿음이 없었기에 ‘일단 우리끼리 해 보자.’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직 100%는 아니지만 언더핸드 수준에선 공을 확실히 채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팔 통증을 신경 쓰지 않고 공을 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반절은 성공한 셈이었다.
“그래, 한번 찾아보자. 일본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 좀 있으니까 자세히 찾아봐 달라고 부탁할게. 프로 팀 코치였다니까 그래도 물어물어 찾다 보면 아는 사람이 있겠지.”
“이미 입스 고친 경험이 있으니까 선배님한테 도움이 될 겁니다.”
“아, 갈 때 너랑 나랑 둘만 가는 게 아닐 수도 있어. 다른 애들한테도 연락 한번 돌려 볼 참이거든. 괜찮지?”
“예, 그럼요. 괜찮습니다.”
“그래, 됐다. 그건 됐고…….”
김정률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너 이브하고 크리스마스 날 외출이지?”
“네, 그렇죠.”
“뭐 하냐, 너는?”
“저요? 저는 이브 날 친구들이랑 같이 놀고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집에서 식구들끼리 밥 먹을 거 같습니다.”
“에이, 그게 다야? 10대의 마지막 날인데, 응? 뜨겁게, 빡! 없어?”
김정률이 허리를 앞뒤로 씰룩거렸다.
“……없는데요.”
“왜 없어, 생긴 것도 멀쩡한 놈이? 여자 친구 없어?”
“……예.”
“너 좋다는 애도?”
“…….”
김정률이 송석현을 끌어당겨 안았다.
“짜식, 너 설마 모쏠이냐?”
“프라이버시입니다.”
“……무슨 마음인지 다 안다.”
송석현이 김정률의 품을 빠져나왔다.
“선배님은 이브 날 뭐 하십니까?”
“나? 나도 뭐…… 집에 가서 식구들이랑 밥 먹지 않을까?”
“선배님은 왜 데이트 안 하십니까?”
“후.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2군에 처박히니까 여자 만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내가 보러 가는 것도 귀찮고. 형 옆구리가 쓸쓸한 지 좀 됐어.”
“안 만나시는 겁니까?”
“여자는 뭐, 나중에 만나면 되지. 힘들게 2군도 아니고 재활군 하면서 꾸역꾸역 만나는 것도 웃기지 않냐? 나중에 1군 가면 모를까.”
“아…… 예.”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여권도 만들어서 와.”
“아, 여권. 깜박했네요.”
“부모님한테도 잘 말씀드리고. 첫 전지훈련을 해외로 간다고 하면 걱정하시니까.”
“예, 감사합니다.”
“좋아. 그럼 공 좀 더 던져 볼까? 어차피 며칠 쉴 건데 오늘은 좀 달려야지.”
송석현이 포수 마스크를 다시 쓰곤 자리로 돌아갔다.
팡! 팡!
“가시죠!”
* * *
송석현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맞춰 집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만난 건 김영석이었다.
“자, 선물이다.”
“선물?”
김영석은 뜬금없이 쇼핑백을 내민 송석현을 쳐다봤다.
“뭐 해? 받아.”
“갑자기 이건 왜?”
“받아, 인마.”
김영석은 쇼핑백을 받고선 열어 봤다.
“신발이네? 운동화야?”
“별건 아니고. 컨버스화 하나 샀어. 너 OT도 가고 하려면 옷 좀 빼입어야 할 거 아니냐. 내가 옷은 모르겠고, 너 맨날 후줄근한 운동화 신고 다니잖아. 이런 거라도 신으라고.”
“아니…… 뭐 이런 걸……. 내 생일도 아닌데.”
“고마워서 그런다. 네 덕에 일이 좀 잘 풀렸어. 정률 선배 입스 극복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하나.”
“그게? 정말? 도움이 됐어?”
“그래, 효과가 있었어. 덕분에 선배랑 나랑 관계도 좋아졌어. 같이 전지훈련도 가기로 했고. 다 네 덕이다. 내가 나중에 더 거하게 쏠게.”
“오오오, 대박! 그게 도움이 됐다고?”
김영석의 눈이 반짝였다.
오덕에게 가장 기쁜 일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거 아닌가.
집에서 매일 욕을 먹어 가면서도 야구 책을 사 모은 그간의 묵은 한이 단숨에 풀렸다.
“이번에 전지훈련 갈 때 그 코치 찾아가기로 했어. 제대로 좀 배워 보려고.”
“야, 야. 앉아 봐. 제대로 얘기 좀 해 봐. 어떻게 입스를 고치게 된 거야?”
“뭐 그리 급해?”
“일단 자세하게 좀 얘기해 봐. 어떻게 된 거냐고. 궁금해 죽겠다.”
송석현은 김정률의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은 언더토스는 패스했고, 언더로 70% 이상 투구 중이야. 공도 제대로 채고 있고 제구도 잘돼. 아직 타자 세워 놓고 라이브 피칭은 안 했지만 확실히 달라. 유의미한 변화가 있다, 이거야.”
“대박. 그럼 입스 고친 거야?”
“아직 고치는 중이지. 하지만 이대로 잘 풀리면 못 고칠 것도 없을 거 같아.”
“이야, 그러면 너한테도 도움이 좀 되는 거지? 김정률이 잘 풀리면 너를 그냥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을 거 아냐. 좀 푸시 해 주겠지? 김정률이면 고트에서 나름 네임든데.”
“아무래도 힘 좀 써 주지 않겠어? 선배가 사람 좋기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이번에 나랑 좀 친해졌거든.”
“하기야. 그러니 너랑 같이 전지훈련 간다고 하겠지. 아무튼 축하한다. 이러면 무난하게 1군까지 프리패스 하는 거 아냐?”
“프리패스는 무슨. 어디까지나 나 고졸 신고 선수야. 2군에서 능력 검증 빡세게 받아도 1군 올라갈까 말까라고. 그래도 재활군에서 영영 썩어 방치되는 거보단 훨씬 낫겠지.”
“그래, 잘됐네. 잘 풀렸네. 고트 1군 가는 게 쉽진 않아도 김정률이랑 그 정도로 친해졌으면 나중에 김정률 인맥으로 어디 하나 연결시켜 주지 않겠냐?”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정미남과 김나영도 나타났다.
네 사람은 모이자마자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우리 넷이냐?”
“우린 언제 여덟 명이서 보냐?”
“니들 둘은 대학 갈 거 아니냐. 거기서 CC 하면 되겠네. 이야~ 다음 이브 때는 석현이랑 나랑 둘만 보겠는데?”
“야, 나는 왜 끼는 거야? 나도 내년부터 니들이랑 못 볼 수가 있어요.”
“내년에 생길 거면 진즉에 있었겠지. 뻥은.”
김나영이 손뼉을 두 번 쳤다.
“이러지 말고 좀 들어가자. 여기서 말하다 얼어 죽겠다!”
* * *
-그~대 기억이~ 그~대 사랑이~ 내 마음~ 파고드는~ 가시~가 되어~.
네 사람의 종착지는 노래방이었다.
정미남과 김영석이 마이크를 하나씩 잡고 열창하는 동안 송석현은 화장실을 다녀왔다.
“거긴 어때? 할 만해?”
화장실 앞에 있던 김나영이 물었다.
“깜짝아. 왜 거기 있어?”
“나도 화장실 가던 참이야.”
“갔다 와.”
“거긴 할 만하냐니까.”
“할 만하지. 지금은 너무 할 게 없어서 문제지.”
“흠.”
김나영은 팔짱을 낀 채 송석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 잘 지내니 됐다.”
그 말을 끝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송석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싱겁긴.”
네 사람은 카페에서 남은 수다를 떤 뒤 흩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엔 송석현과 김나영이 동행했다.
두 사람이 동네에 다 와 갈 무렵 눈송이가 흩날렸다.
“내일 화이트 크리스마스겠네.”
송석현의 말에 김나영이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요새 눈이 자주 오네.”
“그러게.”
김나영이 손바닥을 뻗었다.
손바닥에 작은 눈송이들이 내려앉았다.
“전지훈련 바로 가는 거야?”
“다음 주에 가지 않을까 싶다.”
“2월에 돌아오나?”
“1월 말이나 2월 초?”
“그다음엔 뭐 해?”
“보통은 스프링캠프를 가지. 그런데 다 가는 건 아니야. 1군이랑 2군 다 가기도 하지만 2군에서 추려서 가는 경우도 많아. 나 같은 경우에는 스캠은 못 갈 거야. 국내에 있겠지.”
“그러면 안 좋은 건가?”
“스캠 합류 못 하면 감독 눈에 못 띄는 거니까 좋은 건 아니지.”
“야구도 쉽지 않구나.”
“세상만사 뭐든 쉬운 게 있냐?”
김나영은 손바닥 위로 흩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봤다.
“그러게. 쉬운 게 없네.”
김나영의 눈이 앞서가는 송석현의 손으로 향했다. 김나영은 잠시 망설이다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었다.
“아, 나영아.”
“어?”
“너 합격자 발표 언제지? 다음 달인가?”
“응, 다음 달 말쯤이야.”
“내가 한국 돌아오는 날쯤이네. 그때 파티 해야지?”
“파티는 무슨. 그냥 밥이나 먹는 거지.”
“이미 합격은 따 놓은 당상이다 이거지? 흐흐.”
송석현은 김나영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김나영은 가려는 송석현은 붙잡았다.
“잠깐만 기다려 봐.”
김나영은 송석현을 밖에 세워 두고 집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들고 왔다.
“이거 받아.”
“뭐야, 이거?”
김나영이 건넨 건 해진 염주였다.
“영험한 곳에서 받아 온 염주야. 내가 계속 끼고 있던 건데 소원을 이뤄 준대.”
“너 불교였냐?”
“아니, 아니야. 그게 뭐가 중요해.”
김나영이 송석현의 팔에 염주를 끼웠다.
“차고 다녀. 도움이 될 거야.”
“나 이런 거 별로 안 하고 다니는 타입인데. 알잖아, 너도.”
“그럼 지니고라도 다녀. 나도 이거 차고 다녀서 시험 잘 봤잖아.”
“너는 원래 잘 보는 거 아니냐?”
“아무튼, 쫌!”
송석현이 염주를 패딩 안주머니에 넣었다.
“알았어. 땡큐. 고마워. 잘 쓸게.”
“전지훈련 가도 종종 연락해.”
“그래, 알았어.”
“들어가.”
김나영은 염주를 가지러 들어갈 때처럼 집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송석현은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쟤는 소원을 좋아해.”
송석현은 짧은 휴가를 보낸 후 김정률과 전지훈련 준비를 마쳤다.
송석현, 김정률과 함께할 동행 둘도 정해졌다.
한 사람은 재활군 투수 김형석이었다.
또 한 사람은 김인환.
힘 하나는 리그 최고, 어쩌면 역대 최고라고 불리는 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