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이게 효과가 있다고?”
김정률의 질문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통상 입스 치료법이라고 하면 100에 90은 심리 요법이다.
나머지 10도 ‘기본기에 충실하라’라는 뻔한 얘기로 도배됐다.
송석현도 인터넷을 뒤져 봤지만, 입스 치료 훈련법은 드물었다.
몇 없는 입스 치료법도 롱토스를 많이 해라, 타자를 의식하지 말고 던져라 등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소리였다.
“일본 코치가 개발한 방법인데 세 사람 중에 두 사람은 큰 효과를 봤답니다. 나머지 한 명은 부상 때문에 은퇴했고요.”
“그러면 성공률이 70%는 된다는 거네?”
“사례가 적긴 해도 제가 알아본 자료 중에는 가장 과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입스의 문제점인 팔 스윙을 수정하기 위해선 언더토스 자세보다 효과적인 건 없잖습니까?”
김정률은 몸을 숙이고 언더토스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 보니 네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확실히 역동작 자세에서 언더토스를 하면 팔 말고 다른 데 힘을 쓸 수 없네.”
김정률은 몇 번 자세를 취하더니 신기한 듯 연이어 턴을 하며 언더토스 자세를 연습했다.
“입스가 팔 스윙 때문이라는 것도 신선한데, 입스 치료 훈련법이 있다는 건 더 신선하네. 이걸 네 친구가 알고 있었다고?”
“예, 제 친구가 원래 심한 오타쿠 같은 놈이거든요. 국내에 나와 있는 야구 교본이나 관련 서적은 죄다 읽은 놈입니다. 지금 알려 드린 자세도 일본 코치가 낸 책에 몇 페이지 언급된 내용인데 제가 인터넷을 뒤져서 원본을 찾아본 겁니다.”
“호오, 이런 게 있었다고?”
“저도 이 방법이 맞는지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정률은 팔짱을 꼈다.
송석현은 숨을 들이켰다.
송석현의 머릿속에 김영석의 말이 울려 퍼졌다.
정점을 밟아 본 투수.
FA로 거액을 받았고, 현재는 부상 이후 구위 저하로 어려움을 겪는 투수.
FA도 1년밖에 남지 않았다.
평생 고트의 에이스였으나 구단과 팬 모두에게 잊힌 선수.
동기부여 측면에서 볼 때 김정률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좋은 사람인 것과 동기부여와는 다른 문제다.
“그런데 말이야…….”
“예.”
“네가 나를 위해서 고생한 게 너무 고맙고 미안하기도 하고,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꿀꺽.
송석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입스를 고친다고 해서 마운드에 설 수 있을 거라고 봐?”
한 고비를 넘기니 다른 고비가 왔다.
“내 공이 타자한테 통할까? 이 무딘 공이?”
김정률의 말투엔 송석현을 힐난하거나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자조감 섞인 말투에는 정점을 찍고 나락으로 떨어진 에이스의 두려움이 보였다.
송석현은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네, 관점을 달리하면 방법이 있습니다.”
“…….”
김정률은 송석현을 보며 웃었다.
김정률의 손이 송석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인마. 응원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객관적으로 되겠니? 이 공이?”
“구속에 대한 욕심을 버리신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보다 구속이 더 안 나오면 큰일이지. 이제 와서 제구력으로 먹고살라고? 네가 나를 위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그건 좀…….”
“지금 구속보다 구위가 문제 아닙니까? 사실 선배님이 가장 걱정하는 건 공을 제대로 채지 못하는 거죠?”
“그래, 그거지. 그리고 설령 제대로 챈다고 해도 여기서 구속이 얼마나 더 올라갈지도 모르겠고.”
송석현이 김정률의 손을 잡았다.
9부 능선을 넘었다. 여기서 쐐기를 박으면 김정률은 넘어온다.
반대로 여기서 김정률이 마음을 닫으면 9부 능선을 넘은 것도 의미가 없어진다.
“회전수를 더 줄이시면 되죠.”
“회전수?”
“예, 패스트볼은 유효 회전수가 많을수록 더 좋은 공이지만 반대로 투심이나 싱커는 유효 회전수가 적을수록 좋은 공입니다.”
김정률은 유효 회전수라는 말에 눈을 끔벅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쉽게 말해서 투심이나 싱커는 오히려 공 회전수가 적어야 무브먼트가 더 많아진다는 얘깁니다. 포크볼이나 스플리터도 공 회전수를 줄여야 더 무브먼트가 좋아지지 않습니까? 그거랑 같은 얘깁니다.”
“투심이랑 싱커가 포크볼이랑 같다는 거야?”
“회전수가 적을수록 좋다는 면에서는 같다는 얘깁니다.”
“야, 투심이랑 싱커는 제대로 공을 채서 회전을 시켜야 무브먼트가 나오는 거야.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냐?”
송석현이 고개를 저었다.
“슬라이더랑 커터라면 회전수가 많을수록 무브먼트가 커집니다. 하지만 그건 브레이킹볼이라 그런 겁니다. 커터나 싱커가 비슷하게 꺾이는 공이긴 한데 매커니즘이 다릅니다. 커터는 구속이 빠를수록 효과적이지만 싱커는 옆구리나 잠수함도 던질 수 있잖습니까? 구속이 느려도 쓸 수 있는 구종이라는 겁니다.”
김정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내가 잠수함을 타라는 거야?”
“아뇨. 이제 와서 갑자기 극단적으로 투구 폼을 바꿀 수는 없죠.”
“그러면 무슨 말인데?”
“팔 각도를 내리시는 걸 추천드리는 겁니다. 팔 각도가 크면 클수록 구속은 올라가지만 그만큼 어깨와 팔에 무리가 많이 가잖습니까? 데드볼 시절엔 400이닝씩 던져도 투수가 괜찮았던 게 팔을 어깨 위로 안 올려서 던진 것도 큰 영향이 있다고 읽었습니다. 선배님이 팔 부상에 신경 쓰시면서 억지로 오버핸드를 구사하시는 것보다 팔 각도를 쓰리쿼터 수준 이하로 내리시면 제구력도 올라가고 싱커를 구사하실 때 훨씬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팔 각도를 내려라…….”
김정률은 송석현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제구력이 부족한 파이어볼러가 팔 각도를 낮추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팔 각도가 낮아지면 중심축이 덜 기울어져 제구가 더 쉬워진다.
야구계의 상식이지만 김정률은 여태 고려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제 제구력이 부족한 파이어볼러가 아닌 구위가 떨어진 오버핸드 투수다.
팔 각도를 내려 구위마저 떨어진다면 진창을 넘어 낭떠러지로 밀릴 수 있다.
관점의 전환.
송석현은 투심과 싱커라는 구종을 들고 와 팔 각도를 내려도 선택지가 있다는 걸 귀띔해 줬다.
“내가 지금 싱커를 던질 수 있나?”
김정률은 어깨를 붕붕 돌렸다.
“싱커는 안 던져 봤는데. 구위가 떨어졌다고 싱커가 무조건 들어가는 건 아니잖아?”
송석현은 조금 웃었다.
김정률의 마음에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어차피 연습하실 거면 언더토스부터 하실 거잖아요? 언더로 던지면 내추럴 싱커가 나오니까 먼저 감을 잡고 팔 각도를 조금씩 올리면 어떨까요?”
“그런가……?”
김정률의 입가에도 미소가 보였다.
깊은 굴에 빠져 빛도 없이 허우적거리던 차에 정체불명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아직 20세도 안 된 고등학생 꼬맹이.
코치들도, 친구들도, 자신도 포기한 마당에 19세 꼬맹이의 말을 듣는다는 게 우스워 보일 수 있다.
아니, 자신이 2군 경기라도 뛰었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거다.
자신을 보는 많은 눈이 있는데 어떻게 까마득한 후배의 조언을 귀담아듣겠는가?
지금은 다르다.
모두가, 자신마저 기대를 접은 지금 유일하게 손을 내밀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입스 치료법이 과연 먹힐까 싶지만, 지금 이보다 나은 대안은 없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가.
믿음.
기억 속에나 존재했던 감정이 다시 가슴을 채웠다.
“뭐…… 한번 해 보자. 안 되면 마는 거고. 어차피 만날 하는 것만 하는 것보단 낫겠지.”
송석현이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제 얘기를 들어 주셔서.”
“네가 뭘 감사해. 내가 고마워해야지.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열심히 해 줬는데.”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다 돕겠습니다. 뭐든지요.”
“짜식…….”
김정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해 보자. 밑져야 본전인데.”
김정률이 승낙했지만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송석현은 책의 저자이자 입스 치료법을 제시한 코치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인터넷으로만 찾다 보니 어려움이 있었다.
프로 구단에서 코치로 활동하다 퇴단했다는 데까진 알아냈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일본에 직접 가서 수소문하지 않는 이상 인터넷으로는 거기까지가 최선이었다.
송석현은 김정률에게 일본행을 제안했지만 김정률은 사양했다.
“일단 해 보자. 해 보고 부족하면 그때 찾아보지 뭐.”
책과 인터넷에 나온 방법은 단순했다.
거리가 짧은 언더토스로 시작해 탄착군이 형성되면 거리를 늘리고 팔 각도를 올린다.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어떤 수순으로 하는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김정률과 송석현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얘기였다.
“하나씩 해 보자. 방법이 맞으면 감이 오겠지.”
그날부터 두 사람은 오후부터 저녁까지 훈련에 매진했다.
김정률은 언더토스까진 무리 없이 해냈다.
송석현은 직접 유격수 역할을 자처해 토스를 받아 냈다.
놀라운 건 김정률의 습득 능력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마운드 이상의 거리에서 언더 롱토스를 수월하게 해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이틀 남긴 날.
송석현은 몇 주 동안 차지 않은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자리에 앉았다.
팡! 팡!
송석현이 미트를 내밀었다.
“플레이볼!”
송석현의 우렁찬 목소리에 김정률이 푸하하 웃었다.
“진짜 심판 같네. 좋아. 던져 본다!”
김정률의 상체가 훅 꺼졌다. 그러고는 손이 바닥을 긁듯이 내려갔다.
김정률의 손을 떠난 공이 하늘로 솟구치듯 떠올랐다.
팟!
포수 어깨높이까지 치솟던 공이 갑자기 방향을 튼다. 아래로 떨어지는 공이 미트를 향해 정확히 들어온다.
“스트라이크!”
송석현의 우렁찬 목소리에 김정률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나이스! 어때? 공 좋아?”
“굿입니다! 바로 마운드에 올라가도 되겠는데요?”
“하하하, 짜식. 오바는.”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지금 공은 너무 좋습니다. 한 20년 차 잠수함 투수의 싱커 같았습니다.”
“얀마. 네가 20년 차 잠수함 투수의 싱커를 잡아 본 적은 있어? 아니, 본 적은 있고?”
송석현이 김정률에게 공을 던졌다.
“지금 잡았잖습니까, 최고의 싱커.”
김정률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짜식. 천상 포수네, 포수야. 투수 기 살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너.”
“기를 살리다뇨? 저는 진심을 말한 겁니다.”
“그래그래. 알았어.”
김정률의 구속은 130km/h 이하.
전력을 안 했지만 이제는 공을 제대로 채서 던진다.
팡!
“나이스 볼!”
송석현이 바깥쪽으로 빠진 커브를 잡았다.
브레이킹볼인 커브가 잘 먹힌다는 건 공을 제대로 챈다는 얘기다.
그리고 공을 제대로 챈다는 건 부상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언더로 던지는 만큼 빠르게 공을 던질 수도 없지만, 언더핸드는 무릎과 허리의 하중 부담이 큰 대신 팔과 어깨에는 부담이 적은 폼이었다.
김정률이 마음껏 던지기 좋은 폼이었다.
“이건 내가 봐도 잘 들어갔다.”
김정률은 송석현이 던진 공을 받았다.
“석현아.”
“네?”
“잠깐만 일로 와 봐.”
송석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정률에게 걸어갔다.
“예, 왜요?”
“네가 보기에 공 어떠냐? 괜찮아?”
“네, 이제는 팔 각도 조금씩 올려도 될 거 같습니다. 아프신 데 없죠?”
“그래, 없어. 애초에 이 정도 구속으로 던져서 팔 아프면 그건 은퇴 각이지. 그것보다.”
김정률이 송석현에게 어깨동무했다.
“너 전지훈련 갈 생각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