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스
“그런 방법이 있어?”
-나도 책에서 본 거야. 그런데 실제로 정말 된 케이스가 있는지는 몰라. 그래도 내가 본 것 중에서는 마인드 컨트롤이 아닌 훈련으로 제시된 유일한 방법이니까 기억하고 있어.
“그 책이 뭔데?”
-기다려 봐, 나도 제목은 까먹어서. 전화 끊어. 내가 찾아서 링크 보내 줄게.
송석현은 전화를 끊었다.
연락을 기다는 동안 송석현은 생각에 잠겼다.
고트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일주일이지만 지금 상황이 어떤지 파악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고트는 돈이 가장 많은 구단 중 하나였지만 90년대 두 번의 우승 이후로는 우승권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야구단 지원에 아낌없지만 야구단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구단주, 구단주의 술상무라는 허수아비 사장, 그룹에서 끈 떨어져 흘러온 단장, 낙하산 단장과 프런트의 알력 싸움, 감독을 둘러싼 코치 간 파벌 싸움, FA 선수들과 기존 선수 간의 불화, 스펙은 짱짱하지만 야구에 대한 관심은 적은 프런트.
이 중 최악은 2군이었다.
구단주가 돈을 아끼지 않고 FA 영입을 하니 1.5군 선수들은 보상 선수로 팔린다.
1.5군이 사라진다는 얘기는 중간층이 얇아지고 선수단 실력이 양극화된단 얘기다.
2군에서 실력을 키워 1군에 가야 할 선수들이 2군에 머물게 되면서 2군 성적은 향상됐지만 2군 사기는 최악으로 떨어졌다.
열심히 해 봐야 소용없다는 패배감.
힘들게 1군에 가도 조금만 실수하면 바로 2군 강등이다.
고트는 매 시즌 우승에 도전하기에 유망주에게 기회를 줄 여유가 없었다.
FA로 김정률에게 80억을 지불한 구단이 김정률을 포기한 건 고트의 복합적인 악조건 때문이었다.
2군도 신경 쓰지 않는 마당에 하물며 구단이 재활군에 관심을 둘 리 없다.
객관적으로 보면 암담했지만, 희망을 버릴 순 없었다.
1군 뎁스가 얇은 하위 팀으로 갔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낭중지추.
여기서 뚫고 올라가지 못한다면 영영 재활군이란 밑바닥에 침전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리라.
톡.
김영석이 링크를 보내왔다.
송석현은 아침 해가 뜨도록 책상 앞을 뜨지 않았다.
* * *
“오늘 얼굴이 완전 갔는데? 잠 못 잤어?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겠다, 너.”
오후 훈련 시간.
김정률은 퀭한 얼굴의 송석현을 보며 웃었다.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 어린애한테 너무 큰 부담을 줬나? 괜찮아?”
송석현은 눈을 비볐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을 별로 못 자서요.”
“미안하다, 야. 너도 알 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말하긴 했는데…….”
“그건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선배님.”
“어, 왜?”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김정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내가 뭐, 해 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대답해 줄게.”
“선배님, 정말 입스이신 겁니까?”
입스라는 얘기에 김정률이 멋쩍은 표정을 보였다.
“나? 뭐…… 맞아. 입스. 그게 궁금했어?”
“예.”
“네 앞길을 걱정해야 내가 입스인 걸 걱정하냐. 하하. 나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그거 때문에 밤을 새운 거야?”
김정률은 송석현의 속도 모른 채 송석현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애가 착하네. 야, 여기 프로야. 네 살길부터 찾아. 내가 입스인 게 뭐라고 그러냐.”
“선배님이 제 첫 번째 파트너 아닙니까? 앞으로 재활군이 어떻게 되든 그건 제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신경 끄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선배님이 제 프로 첫 투수인 만큼 제가 선배님께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정률이 김먹튀라고 욕을 먹었다지만 김정률은 고트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10년 넘게 고트에서만 뛴 에이스라면 1군, 2군은 물론 프런트까지 말발이 제법 먹힐 거다.
백 프로 확신은 아니지만 김정률의 재기를 돕는다면 김정률의 성격상 송석현을 외면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송석현이 김정률의 재기에 확실한 도움이 되면 될수록 더더욱.
“짜식…….”
별일도 아닌데 김정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정률은 송석현을 끌어안았다.
송석현은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했지만 우선 안기기로 했다.
가장 당황스러운 건 포옹이 아니라 눈물이었을 거다.
여기서 운다고?
“너 진짜 좋은 놈이구나.”
“예? 아닙니다. 꼭 그런 게 아니라…….”
“고맙다. 입스가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너를 봐서라도 열심히 해 볼게. 너도 무언가 몰두할 게 필요하겠지.”
김정률이 포옹을 풀고 뒤로 돌았다. 눈물을 스윽 닦는 게 보였다.
송석현은 당황스러웠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선배님.”
“어, 그래.”
“혹시 지금 어떤 상황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후우, 그래. 마누라한테는 솔직하게 말해야지. 형이 말이다…….”
김정률이 말한 상황은 이러했다.
김정률은 어릴 때부터 붙박이 선발로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고트는 우승 경쟁 팀은 아니었지만 FA 영입으로 종종 가을야구에 진출했는데 어느 팀이나 마찬가지로 포스트시즌에선 모든 팀이 3~4선발로 돌리기 마련이다.
시즌 내내 긴 이닝을 던지고 포스트시즌에선 적은 휴식, 큰 부담감, 긴 이닝을 책임졌다.
부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세 번의 부상을 당하면서 자신감이 떨어진 데 있었다.
여기서 또 부상을 당하면 그땐 프로를 그만두는 건 물론이거니와 평생 공을 던지지 못할 수 있었다.
파이어볼러인 김정률이 갑자기 피네스 투수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깨와 팔꿈치에 부담을 주지 않고 공을 던지려니 당연히 소위 똥볼이라는 공밖에 나오질 않는다.
강속구를 잃어버린 파이어볼러는 타자에게 배팅볼 투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고트는 FA로 지른 80억이 아까워서 5선발, 나중엔 불펜, 나중엔 이닝을 먹는 패전조로 돌렸지만 이마저도 매번 방화쇼였다.
자기 공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팬, 동료, 구단에 외면받고 욕을 먹자 매번 웃고 다니는 김정률도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부서진 멘탈은 바로 몸으로 나타났다.
입스.
더는 타자와 승부할 수 없는 투수가 돼 버린 거다.
“나도 어떻게든 공을 세게 던지고 싶은데 마음만 그렇지 몸이 안 따라 줘. 여기서 또 한 번 수술하면 그땐 끝장이라고 생각하니까 팔이 내 말을 안 듣네. 허리고 무릎이고 다 튼튼한데 이 팔이 문제야, 팔이.”
김정률은 제 팔을 붕붕 돌렸다.
“역시 공을 제대로 못 채시는 겁니까?”
“뭐…… 너도 알고 있었지? 내 공 시원찮은 거.”
“공을 때리는 느낌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너도 투수 출신이니까 잘 알겠네. 맞아. 공을 때릴 수가 없어. 그래서 나도 너클볼이나 팜볼 같은 걸 배울까 했는데 그것도 영 쉽지 않더라. 집중도 안 되고.”
“선배님, 선배님이 입스라는 건 다른 사람들도 아는 겁니까?”
“모르지. 내가 2군에 내려온 지 꽤 됐으니까. 너니까 얘기한 거지 내가 뭐 하러 이런 걸 떠벌리고 다니겠냐.”
송석현은 재활군 포수고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없으니 마음 편히 제 속내를 터놓을 수 있었을 거다.
구태여 자기 약점을 얘기해서 소문내 봐야 혹여 모를 트레이드나 자유 계약 시에 불이익만 있을 테니 다른 사람에겐 입을 꾹 다물었을 테고.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요. 선배님은 입스 극복하고 싶으세요?”
“나? 그야 당연히…… 그렇지. 극복하고 싶지. 극복이 안 되니까 문제지. 애초에 이따위 공을 던지는데 타자와 정면 승부가 되겠냐?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입스가 문제가 아니라 공이 문제인 거 같기도 하고…….”
송석현은 심호흡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한다.
김정률이 호인이고 자신에게 호의적이라고 해도 입스는 민감한 문제다.
지금 꺼낼 말이 김정률의 비위를 거스르면 앞으로의 재활군 생활이 꼬이게 된다.
김정률이 송석현의 제안을 받아들여도 문제는 남아 있다.
송석현의 제안대로 해도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송석현에 대한 앙금이 남으리라.
“제가 입스 치료법에 대해서 들은 게 있는데요.”
“입스 치료법?”
김정률이 하하 웃었다.
“나도 다 해 봤어, 인마. 심리 상담도 지겹도록 받아 봤고, 공도 미친 듯이 많이 던져 봤어. 그러면 뭐 하냐? 소용없더라. 애초에 공이 문젠데.”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건 심리 상담을 받는 거나 공을 많이 던지는 게 아닙니다. 입스 치료 훈련법입니다.”
“입스 치료 훈련법? 그런 게 있어?”
“예, 제 친구가 야덕인데 혹시나 하고 물어보니까 입스 치료 훈련법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런 게 있었다고……? 난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선배님이 입스에 대해 외부로 말하지 않아서 입스에 대한 얘기를 못 들은 게 아닐까요?”
“으음, 그런가…….”
김정률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송석현은 마른침을 삼키고 기다렸다.
채근해선 안 된다. 본인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김정률이 자신에게 호의적이라고 해도 프로 11년 차 대선배다.
여기서 김정률 눈 밖에 난다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게 뭔데? 한번 얘기해 봐.”
송석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예, 그게 말이죠…….”
* * *
김영석이 보내 준 자료는 일본 코치가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책에도 소개는 됐지만 내용이 간략했다.
송석현은 인터넷을 뒤져 일본 코치의 입스 치료 훈련법의 원본을 찾았다. 일본어로 돼 있어서 번역기를 돌리고 의역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선배님, 입스의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공을 제대로 못 던지는 거지.”
“선배님은 부상의 염려 때문에 공을 제대로 못 때리시지만 다른 투수들은 강속구를 던지는데도 입스를 극복 못하는 케이스가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 줄 아십니까?”
“글쎄다. 생각해 보질 않아서.”
송석현이 팔을 들어 앞으로 휘둘렀다.
“입스의 문제는 스트라이드, 골반 회전, 키킹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팔 스윙. 팔 스윙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게 문젭니다. 많이 던져서 팔 스윙의 감을 잡는 방법도 있지만, 많이 던진다고 감을 무조건 잡는 건 아닙니다. 강속구를 던지든 안 던지든, 입스가 온다는 건 공을 채는 것과도 상관없다는 얘깁니다. 선배님이 팔 스윙만 교정하시면 입스는 의외로 쉽게 고치실 수 있습니다.”
“팔 스윙이라…….”
김정률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는 아는데, 팔 스윙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문젠데 그게 되겠니? 애초에 똥볼이 문젠데.”
“반대로 생각해 보시면 오히려 그게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방법이지만요.”
“장점? 똥볼이?”
김정률은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똥볼이 장점이 될 수 있나?
너클볼도 아닌 그냥 똥볼이?
“일본에서 입스를 고친 케이스를 찾아냈습니다. 입스는 팔 스윙의 문제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팔 스윙을 고치기 위해선 아주 단순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몇 가지 기본 드릴이 있긴 하지만 메인 드릴은 643병살 때 2루수가 역턴으로 공을 던지는 연습을 하면 저절로 팔 스윙이 고쳐진다고 합니다.”
“병살 플레이? 잠깐만.”
김정률은 직접 몸으로 6-4-3 병살 때 2루수 역턴 플레이를 따라 했다.
한두 번 움직이다 보니 김정률은 바로 송석현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 언더로 던지라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