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말의 가능성
팡!
“좋습니다!”
팡!
팡!
송석현이 고트에 입단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었다.
송석현의 일과는 단순했다.
오전에 일어나 개인 훈련, 웨이트와 러닝을 한다.
오후에는 공식 훈련, 재활군 훈련을 돕는다.
저녁에는 자유 시간이었다.
재활군에서 투수는 셋.
김정률, 고창현, 김형석의 공을 받아 주는 게 주된 일과였다.
스크린 야구장에서 공을 받던 시절과 비교하면 천지개벽이었다.
1군에서도 이름 좀 날리던 선수들의 공을 미트로 받는 일이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김정률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송석현은 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도 다른 두 분은 안 나오시는 겁니까?”
“누구? 창현이랑 형석이?”
“예, 저번에 한번 오신 이후로는 안 나오셔서요.”
“뭐…….”
김정률은 어깨를 으쓱했다.
“걔들도 사정이 있으니까.”
김정률이 송석현 옆으로 와 앉았다.
“왜? 너무 한가해서 싫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뭐?”
“정규 훈련 시간인데 이렇게 결석하셔도 되나 싶어서요.”
“결석? 하하, 역시 고딩이라 다르네. 결석이 뭐야, 결석이.”
“아, 죄송합니다.”
“아냐. 그냥 단어가 신선해서 한 말이야.”
김정률은 물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송석현은 고개를 돌려 김정률의 얼굴을 슬쩍 봤다.
매번 웃고 다니는 김정률이지만 익숙해지니 김정률의 맨 얼굴이 보였다.
페이소스.
영화에서 봤던 울음을 삼킨 광대가 이런 걸까.
둘만 참여하는 훈련.
김정률은 항상 웃으면서 송석현을 독려했지만 말과는 달리 항상 어깨가 처져 있었다.
김정률은 한참 말없이 벽을 봤다.
송석현도 김정률을 따라 벽을 봤다.
김정률이 긴 침묵을 깼다.
“창현이는 모교에서 코치를 할 생각인가 봐.”
“코치라면…… 은퇴하시는 겁니까?”
“은퇴인지 퇴출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될 거 같다.”
“아, 예…….”
송석현도 말을 아꼈다.
고영진에게 들은 게 있기에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예상한 대로 흐르고 있다.
“형석이는 아무래도 허리가 영 시원찮아서 공 던질 때까지 한참 시간이 필요할 거 같고. 원래는 내년 상반기 중으로 공을 던질 수 있다고 했는데 애가 아프다고 난리니, 원. 빨라야 하반기가 될 거 같은데 그때까지 구단에서 기다려 줄지 모르겠다.”
“…….”
“불펜에서 진짜 개처럼 구르던 놈들인데. 안타깝지. 잘할 때는 나름 1군 필승조였는데.”
김정률은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김정률의 목소리에 비애가 젖어 있었다.
“석현아.”
“예.”
“너도 여기에 있으면서 대충 분위기는 눈치챘지?”
“…….”
“여긴 말만 재활군이지 실은 방치나 다름없어. 나갈 애들은 알아서 나가라는 거지.”
“여기서 재활 잘해서 올라갈 순 없는 겁니까?”
“하하.”
김정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정도 부상이면 JMR 갔겠지. 여긴 장기 부상에 회복이 어려운 애들이 있는 곳이야. 아님 나처럼 이도 저도 아닌 놈이나 있는 거지. 여기 있어도 월급은 나오니까 나쁠 거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있을 수도 없어. 알아서 눈치 보고 먼저 나가는 애들한테는 프런트에서 일자리 하나 물어다 줄 순 있어도 끝까지 버티면 그냥 퇴출시켜 버리거든.”
“그러면 제 발로 나가거나 아니면 잘리거나 똑같은 거 아닙니까?”
“똑같지. 그런데 이왕이면 알아서 은퇴하라고 종용하는 거야. 그게 그나마 모양새는 나으니까. 원래는 공식적으로 재활군이라는 것도 없었어. 다른 구단에서 만드니까 우리도 만든 거지. 재활군이라고 쓰고…….”
김정률은 뒷말은 잇지 않았다.
생략된 말엔 김정률이 차마 내뱉지 못하는 잔인함이 숨어 있으리라.
“창현이나 형석이나 잘 풀렸으면 FA로 목돈 좀 쥐었을 텐데……. 내년에는 둘 다 못 볼 거 같다. 아마 나만 남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선배님은 다시 1군에 올라가실 거 아닙니까? 고트의 에이스 오브 에이슨데요.”
“내가?”
김정률은 생소하다는 듯 자신을 가리켰다.
“예, 그럼요.”
“너 요새 야구 제대로 안 봤구나? 요새 내 별명이 김먹튀다, 김먹튀. 그래도 FA가 남아 있으니까 내년까진 하겠지만 내년이 마지막이겠지.”
김정률은 송석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도 형이 내년까진 붙어 있으니 너도 내년까진 거뜬할 거야. 난 네가 걱정이다. 너도 선수로 뛰고 싶어서 온 거잖아. 그치?”
“예, 그렇습니다.”
“솔직하게 말할게. 여기에 있으면 2군 데뷔도 어려워. 어차피 재활군 만든 목적도 분리수거나 마찬가지야. 아니, 분리수거지.”
김정률이 한쪽 주먹을 꽉 쥐었다.
“그나마 난 나은 편이지. FA로 돈은 받았으니까. 다른 애들이 안타깝지. 여긴 각자도생이야. 알아서 살아남아야 돼. 너도 그렇고. 형 공만 받지 말고 네 인맥 동원해서 다른 구단을 알아봐. 재활군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곳이야. 너한테까지 갈 관심은 없을 거다.”
“……그렇습니까?”
“우울한 얘기 해서 미안한데, 너도 알 건 알아야 하지 않나 싶어서.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하는 네 모습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말이야.”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는 무슨.”
김정률은 모자를 벗어 버린 후 벽에 몸을 기댔다.
“너한테는 내가 더 미안하다. 창현이나 형석이는 어차피 나갈 애들이었어. 투수조에서 공을 던질 사람은 나 하나뿐인데 네가 여기 온 것도 형 때문 아니겠냐? 내가 네 실력 볼 기회는 없었지만 네 미트질도 그렇고 훈련 태도도 그렇고, 폭스나 피닉스 같은 팀 갔으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놈인데 괜히 여기 와서 시간 낭비하고 가장 좋은 타이밍을 놓친 거 같기도 하고 그래. 뭐…… 그래서 형이 많이 미안하다.”
송석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선배님 덕에 제가 이렇게 프로 구단에 와서 훈련할 수 있는 것만으로 저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선수가 경기에 뛰질 못하는데 만족은 무슨. 나도 너처럼 어릴 때가 있었어. 네 마음을 왜 모르겠냐? 네 나이에는 몸이 부서져도 경기에 뛰고 싶은 게 정상이야.”
“…….”
“여기에 있는 동안 열심히 훈련해 놔. 넌 포수잖냐. 성실한 고졸 포수라면 다른 구단에서도 로또 한번 긁는 심정으로 널 데려갈 수도 있어.”
“그게 될까요? 여태 오퍼 하나 없었는데요.”
“모르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나도 내가 이렇게 될지 몰랐다. 하하, 하, 하…… 쩝.”
김정률이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자. 너도 좀 쉬어야지.”
송석현은 김정률을 따라 일어섰다.
“그런데 선배님.”
“응?”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선배님은 어디를 다치셔서 재활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나?”
김정률은 쓴웃음을 지었다.
“공식적으로는 팔꿈치.”
팔꿈치란 얘기에 송석현이 움찔했다.
“비공식적으로는 스태브 블래스 증후군. 이렇게 말하면 모르려나. 더 쉽게 말해서 입스.”
“……예?”
* * *
송석현은 숙소로 돌아와 샤워했다.
따뜻한 물이 어깨를 타고, 가슴을 타고 발끝으로 흘렀다.
“입스…….”
김정률의 공이 힘없이 빌빌대긴 했어도 재활 중인가보다 생각했다.
구속은 재지 않았지만 아마 135~140km/h 정도.
프로 선수로선 부족한 구속이긴 해도 재활만 무사히 마치면 충분히 1군 무대에서 뛸 수준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구속이었다.
한데 입스라면 말이 다르다.
구속이 160이 나와도 입스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어쩐다.”
송석현은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앉았다.
재활군이 2군에서도 변방이라는 건 알았지만, 김정률에게 직접 들으니 암담했다.
1군 데뷔가 아니라 2군 데뷔도 어렵다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대로 있다간 김정률의 얘기처럼 김정률 공만 좀 잡아 주다 그와 함께 퇴출될 운명이었다. 어쩌면 또 다른 재활군 투수가 들어와 목숨을 연명할 순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송석현은 벽에 기대 불 꺼진 책상을 바라봤다.
“…….”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어둠이 가라앉은 지 오래.
자정이 넘어 새벽이 됐다.
송석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들었다.
띠, 띠, 띠, 띠.
“……여보세요?”
-뭐야, 이 시간에.
송석현이 전화를 건 이는 김영석이었다.
“어, 뭐 하고 있었냐?”
-랭겜 돌리다 좀 쉬는 중. 너는? 안 자냐?
“나? 잠깐 뭐, 깼어. 야.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어, 뭔데?
“너 김정률 알지?”
-김정률 알지. 왜 몰라. 김먹튀.
“……흠. 아무튼 네가 김정률에 대해서 아는 거 얘기 좀 해 봐.”
-갑자기? 이 시간에?
“어, 간단하게라도 좀 말해 줘 봐.”
-뜬금없네.
김영석은 잠시 뜸을 들였다.
-김정률. 고트의 에이스 오브 에이스. 우완 파이어볼러. FA로 80억까지 땡겼지만, 지금은 김먹튀. 뭐, 당연한 수순이었지, 1년에 180이닝 이상 던져 댔으니. 수술만 세 번을 해서 구속 저하 및 제구도 노답. 아마 내년이면 은퇴할 듯?
“…….”
-그런데 갑자기 왜? 김정률이랑 같이 붙어 다니는 거야?
“나랑 거의 영혼의 파트너야. 재활군에서 공을 던지는 사람이 김정률 선배밖에 없으니까.”
-그렇겠네. 김정률이라면 재활군에 있겠지.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이 새벽에?
“네가 보기엔 김정률 선배가 재기할 수 있을 거 같냐?”
-김정률이? 글쎄다, 어려울 거 같은데. 어릴 때부터 존나 많이 던지기도 했고, 수술도 세 번에 FA까지 땡겼으면 딱히 동기부여도 없을 거 같은데. 아, 그건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같이 훈련하잖아.
“선배는 훈련 열심히 하고 있어. 내가 보기엔 복귀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거 같은데 공이 영 아니야. 공 끝이 무뎌.”
-회전수가 떨어진다는 얘기네. 수술 많이 하면 공에 힘을 제대로 싣지 못하니 자주 있는 일이야. 그럼 답 나왔네. 재기 못하겠다, 야. 재기할 방법이 없네.
“네가 보기엔 그러냐?”
-보통 그런 투수들은 다 은퇴했어. 여태 복귀한 선수가 있었나……? 없었을걸.
“……그래.”
-그새 김정률이랑 친해진 거야? 그래서 걱정돼? 이 새벽에 전화해서 갑자기 김정률에 대해서 물어보네.
“걱정도 되고, 내 앞길도 달렸고 하니까.”
-네 앞길? 김정률이랑 네 앞길이랑 무슨 상관인데?
“이건 내 추측이고 예상이지만, 누가 날 여기서 당겨 주지 않으면 재활군 탈출이 힘들어. 그나마 여기서 날 당겨 줄 사람은 김정률 선배 하나밖에 없고.”
-……그래? 너 2군 경기 뛰는 것도 어렵다는 얘기야?
“그래, 생각보다 여기 여건이 안 좋다. 재활군 대우가 아주 안 좋아. 사실상 퇴출 직전에 들르는 장소 같아.”
-아니, 그런데 왜 하필 김정률이야? 내가 봐도 네가 봐도 노답이잖아, 지금.
“……게다가 입스고.”
-입스? 김정률이?
“그래, 선배가 선배 입으로 말했어. 입스라고.”
김영석에게서 한숨이 터졌다.
-염병할. 그러면 재기 가능성이 0.000000001% 이런 수준이잖아? 와, 씨. 김정률 말고 너 당겨 줄 사람 없어? 진짜로?
“그래, 없어. 지금 당장은 없어. 앞으로도 김정률 선배보다 네임 밸류나 실력이 더 뛰어난 선수가 재활군에 올 거 같지도 않고, 오더라도 나한테 호의적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선배가 내 동아줄 같은데 어떻게 방법 없겠냐? 너 야구 박사잖아. 나보다 네가 더 야구에 빠삭하잖아. 어떻게 입스 극복할 방법 없어? 입스만 극복하면 어떻게 경기는 뛸 수 있을 거 아냐.”
김영석은 한참이나 말을 아꼈다.
-하, 입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