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여기다 짐을 풀면 돼.”
“감사합니다.”
“그래, 짐 풀고 사무실로 와. 계약서 써야지.”
송석현은 박기덕의 안내를 받아 숙소를 배정받았다.
송석현이 배정받은 방은 딱 대학가 원룸 크기였다.
방은 크지 않았지만 송석현은 활짝 웃었다.
“이야, 좋네. 1인 1실.”
고트는 가장 돈을 많이 쓰는 구단답게 2군 숙소도 최신식이었다.
개인 화장실에는 비데가, 침대는 퀸 사이즈였다.
통상 다른 구단의 2군은 2인 1실, 싱글 사이즈 침대, 공용 화장실까지 있다는 걸 감안하면 2군 시설만큼은 최고 수준이었다.
“좋은데, 여기.”
송석현은 짐을 풀고 커튼을 젖혔다.
새하얀 빛이 눈을 덮었다.
비록 주변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이지만, 오늘만큼은 황금빛 벌판으로 보였다.
똑똑.
“……네?”
송석현은 현관문 노크 소리에 달려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 밖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오, 이 시간에 누가 들어왔나 싶었는데 신입인가 보구나?”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송석현입니다.”
송석현은 바로 허리를 숙였다.
노크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정률, 고트의 에이스, 아니 에이스 오브 에이스로 불리던 남자였다.
“그래, 반갑다, 야. 형 알지?”
“예, 김정률 선배님이신데 어떻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짜식, 첫날부터 아부는. 그래도 귀엽네, 귀여워.”
송석현이 본 김정률은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였다.
운동 선수답게 떡 벌어진 어깨에 사각턱이 인상적이었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와 올라간 입꼬리는 거리감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런데 너는 왜 여기 있어? 동기들은 오늘 입단식 하는데.”
“입단식……은 제가 못 갔습니다. 제가 신고 선수라서요.”
“신고? 야, 사진은 같이 안 박아도 입단식은 하는데?”
“아까 박기덕 대리님이 저는 신고 선수라 해당 사항이 없다고…….”
“그러면 다른 애들도 여기에 있으면 안 되지. 여기 너만 있잖아. 나도 오늘은 일찍 들어온 거라 그렇지 여기에 너랑 나밖에 없을걸.”
송석현은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2군 숙소로 오는 길을 떠올려 보니 2군 구장 스태프들 말곤 선수들은 보지 못했다.
“너 학교는 어디야?”
“저는 우진고 나왔습니다.”
“우진고? 우진고가 어디더라?”
“3년 전에 생겨서 모르실 수 있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드래프트돼서요. 장대희 아시죠? 울브스 장대희. 걔가 우진고 출신입니다.”
“아아, 들어는 봤다. 그래? 너는 포지션 어디야?”
“저는 포숩니다.”
“포수? 고졸 포수야? 요새 포수 귀한데. 어쩌다 포수가 신고까지 들어왔데.”
송석현이 귀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좀 부족해서요.”
“아니, 아니. 그런 얘기는 아니고. 하하. 괜한 소리를 했네. 오늘 입단식 안 하면 감독님이랑 코치들 못 보는데. 박 대리가 왜 너만 입단식에서 뺐지? 이상하네……. 뭘 착각했나? 잠깐만 기다려 봐.”
김정률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발신자는 박기덕이었다.
“어, 어. 기덕아, 난데. 오늘 보니까 귀여운 신입이 왔네? 어어. 그런데 얘는 왜 입단식 안 한 거야? 대면식은 해야지. 너 뭐 실수한 거 아니냐?”
김정률은 웃으면서 농담하다가 잠깐 표정이 굳었다.
“아…… 재활군……?”
송석현은 김정률의 달라진 표정을 눈치챘으나 이내 모른 체했다.
“그래도 그렇지, 같이 입단식은 해야지. 그래야 동기도 생기고 선배도 생기는 건데. 감독님하고 코치들한테 눈도장은 찍어 놔야 할 거 아냐. 어, 어. 야. 넌 말을 뭐 그렇게……. 하, 됐다, 그래. 알았어. 끊어라.”
김정률은 쓴웃음을 지었다.
“인심 참 고약하네. 아무리 우리 팀이어도 이건 적응이 안 돼.”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냐, 아냐.”
김정률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해 보자. 형도 재활군이야. 앞으로 형이랑 계속 훈련할 거 같은데 이렇게 만나게 되네. 이게 또 인연인가 봐. 그치?”
“예? 아, 예, 예. 그렇습니다.”
“마침 점심인데 어때? 형이랑 점심 콜?”
“아, 저기 박 대리님께서 저 사무실로 먼저 내려오라고 하셔서요.”
“그래? 오래 걸리나?”
“계약서를 작성한다고 하셨습니다.”
“아아, 그러면 작성하고 와. 나는 앞에서 마실이나 하면서 기다릴게.”
“아, 그렇게까지…….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아냐. 어차피 나도 밥 먹어야 하는데. 같이 내려가자.”
김정률은 송석현과 함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한산했다.
박기덕 대리를 포함해 몇 사람 보이지 않았다.
“기덕쓰.”
김정률은 의자에 앉으면서 박기덕 옆에 탁 붙었다.
“뭐 하고 있었쓰.”
“일하고 있었지. 계약서 뽑았거든.”
“우리 석현이 계약서야?”
박기덕이 피식 웃었다.
“언제 또 우리 석현이가 됐어? 아는 사이야?”
“오늘부터 1일?”
“형도 참. 잠깐만 비켜 봐. 석현이랑 할 게 좀 있으니까.”
“오케이. 그건 알겠고…….”
김정률은 박기덕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야, 그래도 입단식은 보내 주지. 치사하게.”
“이미 입단식 참가 인원이 정해져서 그런 거야. 석현이는 뒤늦게 뽑혀서 참가자 명단에 없었고.”
“에이, 그래도 그 정도는 스윽 밀어 넣을 수 있잖아.”
“내가? 내가 어떻게?”
“왜 이래, 아는 사이끼리? 입단식은 세상 처음으로 하는 건데 그런 건 대충 끼워 놔도 누가 뭐라고 하겠어?”
“내가 그럴 짬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김정률은 몇 마디 더 쏘아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래, 뭐, 상황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알았어. 나 잠깐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다. 석현아, 끝나면 나와.”
“예, 알겠습니다.”
김정률은 사무실 밖의 벤치에 홀로 앉았다.
김정률의 표정이 어두웠다.
“후우, 어린애까지 이용해 먹어야 하나.”
* * *
그날 오후.
송석현은 처음으로 재활군 멤버들을 소개받았다.
재활군은 감독이 따로 없었다.
장일용이라는 코치 한 사람이 전부였다.
장일용은 물리치료사 출신으로 코치라기보단 서포터에 가까웠다.
재활군 멤버는 총 일곱이었다.
투수 셋, 야수 셋 그리고 새로 온 송석현 하나.
김정률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도 있었지만 재활군의 리더는 누가 봐도 김정률이었다.
“우리 신입도 왔는데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코치님도 같이 콜?”
“나? 에이, 나는 됐어. 노땅이 가서 뭐 하겠다고. 니들끼리 먹고 와.”
“왜요. 같이 가요.”
“나는 집에 가 봐야지. 요새 마누라 등쌀이 심상치 않아서 말이야.”
“뭐…… 그렇게 얘기하면 어쩔 수 없죠. 그러면 나머지 분들은 회식 같이 고고?”
“난 쉬련다. 병원에서도 푹 쉬라고 했고.”
“나도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나도 약속이 있어.”
코치까지 여덟 명, 그중에 회식에 참석이 가능한 사람은 송석현을 포함해도 넷이었다.
네 사람은 김정률의 차를 타고 근처 식당으로 이동했다.
차로 움직이는 동안 김정률은 쉴 새 없이 떠들었지만, 다른 두 사람은 별말이 없었다.
“자, 먹자. 여기 고기가 좋아. 도축하고 바로 먹을 수 있는 곳이라. 먹어 봐.”
네 사람이 간 식당은 고깃집이었다.
막내인 송석현이 고기를 굽는 동안 세 사람은 소주를 한 잔씩 나눠 마셨다.
“크. 이 맛이지. 석현이도 한 잔?”
“아, 괜찮습니다.”
“아아, 너 아직 고딩이지? 하하, 조심해야지.”
송석현이 고기를 굽는 사이 김정률과 다른 투수인 김형석이 가게 밖으로 나가 얘기를 나눴다.
졸지에 야수 고영진과 함께 남은 송석현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고기만 구웠다.
“불 줄이고 잠깐 쉬어. 고기 탄다.”
“네.”
송석현이 불을 줄이고 집게를 놨다.
고영진은 물을 따라서 한 잔 마셨다.
“콜라라도 시켜 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몸 관리하는 거야?”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고기만 먹는 게 더 좋아서요.”
“그래…….”
고영진은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고영진은 조금 마르고 눈이 처진 얼굴이었는데, 말라서 그런지 음울한 모습이 보였다.
“송석현이라고 했지?”
“예.”
“너는 어쩌다 여기 들어왔냐?”
“어…… 어쩌다 보니 추천받아서 들어오게 됐습니다.”
“추천? 누가? 잘 아는 사람이야?”
“그건 아닌데요. 어쩌다 알게 된 분이…….”
“뭐 하는 사람인데?”
“이기성 코치님이라고 올해까지 프로에서 뛰셨다고 들었습니다.”
“……잘 모르겠네. 그런데 말이야, 가려면 다른 데도 있는데 왜 여길 왔어?”
“제가 다른 곳은 다 떨어져서요…….”
고영진이 웃었다.
“하하, 너도 참 안 풀렸다. 후우우. 애만 아니면 소주 한 잔 나눠 마시고 싶은데. 네 팔자도 참 쉽지 않네, 그치?”
“괜찮습니다, 저는.”
“하.”
고영진은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가게 문이 있었고 가게 유리창 밖에는 김정률과 김형석이 한창 얘기 중이었다.
“석현아.”
“네.”
“형이 얘기 하나 해 줄까?”
“예, 해 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고영진은 몸을 낮추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석현아, 첫날부터 미안하지만 여긴 그냥 수용소야.”
“……네?”
송석현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였다.
“말이 재활군이지 이딴 식으로 재활군을 편성하는 데가 어딨냐? 그리고 진짜 제대로 재활하는 애들은 모 기업 전용 재활 센터에서 재활하고 있어. JMR이라고 들어 봤냐? 죽은 놈들도 살려 보내는 곳이야. 진짜 재활이 필요하면 그리로 보내지 왜 이리로 보냈겠냐?”
“…….”
“말만 재활이지 2군도 못 올라가게 여기서 잡아 놓고 있는 거야, 알아서 은퇴하게. 여기에 있는 사람들 특징이 뭔 줄 아냐? 다들 성적이 애매하거든. 트레이드할 만큼도 안 돼. 그러니까 알아서 눈치껏 나가라고 하는 거야. 여긴 나가라고 말도 안 해. 눈치껏 알아서 나가라고 등 떠미는 거지.”
송석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뒤늦게 이해가 갔다.
왜 TO가 쉽게 나고, 입단식에도 초대가 없었으며, 자신이 재활군이라고 할 때 김정률의 표정이 어두웠는지 단번에 궁금증이 풀렸다.
“오갈 데도 없어서 너를 데리고 왔나 본데, 미리 얘기할게. 너도 준비해. 야구 말고 다른 걸 하든지, 아니면 인맥 총동원해서 다른 구단 알아봐. 지금은 TO가 차서 어렵겠지만 교육리그 하고 이럴 때 다치고 코칭스태프 눈 밖에 나는 애들 있거든? 그러면 또 TO가 날 수 있어. 그걸 노려. 여긴 아니야. 여긴 노답이야, 씨발. 여긴 그냥 수용소라고.”
고영진은 말을 하면서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
송석현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김정률을 보곤 헛기침했다.
“흠흠.”
고영진도 눈치가 있어서 허리를 세우고 다시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여, 둘이서 친하게 놀고 있었어?”
“예, 여기 고기 다 구워 놨습니다. 마저 더 구울까요?”
“그래, 석현아, 여기 고기 맛있지?”
“네, 맛있습니다.”
“그럴 거야. 내 입맛이 까다로운데 여기를 골랐잖아. 영진이 너도 많이 먹었냐?”
“예, 많이 먹었어요.”
“그래, 넌 살 좀 더 찌워야지. 발목 다쳤다고 해서 무조건 빼빼하면 재활 힘들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말 편하게 하라니까.”
네 사람은 1차를 마치고 뿔뿔이 흩어졌다.
김정률은 김형석과 함께 2차를 갔고, 고영진은 송석현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송석현은 불 꺼진 빈방을 가만히 봤다.
불과 몇 시간 전과 똑같은 방이건만…….
“쉬운 게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