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포수로 승승장구-9화 (9/201)

어른

“안녕하세요. 송석현입니다.”

송석현은 이기성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였다.

이기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래요, 반가워요. 그때 인사했죠?”

“예, 말씀 편하게 하십쇼, 코치님.”

“그럴까? 정말 그래도 되지?”

“예, 물론입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이기성이 있는 일신중학교였다.

두 사람은 일신중학교 운동장 한편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친구한테 자세하게 들었어.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그러던데.”

“예,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번 알아봤어. 고 1 때까진 알아주는 투수였던데. 맞아?”

“……그땐 조금 자신 있었습니다.”

“고 1이 150km/h를 찍으면 말 다 한 거지. 그러다 부상으로 포변해서 포수 했는데 몇 경기 뛰지 못하고 사실상의 방출. 맞나?”

“네.”

“내가 경기 영상을 좀 봤어. 녹화된 게 딱 2경기뿐이라 많이 보진 못했는데, 잘하던데. 포수가 경험이 많이 필요한 자린데 기본기가 좋았어.”

“칭찬 감사합니다.”

“우진고에서 괜히 주전 포수를 한 게 아니더라고. 그런데 정말 그때 그 사건 때문에 이후로 쭉 경기 못 뛰게 된 거야?”

“……네.”

“쓰읍. 거기 포수가 많나?”

“아니요. 저랑 제 친구를 빼면 백업하던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사실 공만 받는 수준이어서…….”

“친구라면 누구? 그때 그 친구?”

“네, 그 친구도 저랑 같이 우진고 포수였습니다.”

이기성이 허허, 웃었다.

“재밌네. 포수끼리 친구라니. 그러면 우진고에선 너희 두 사람을 계속 안 쓴 거야? 주말리그 전반기까지만 하고?”

“네.”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했대. 그래서 우진고가 그 좋은 전력으로도 우승이 없었구만. 감독이 너무 생각이 없었네.”

“……감독님 의견은 아니었습니다. 감독님도 어쩔 수 없으셔서요.”

“뭐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건가……. 그래도 감독이 선수 커버 안 쳐주면 누가 쳐준대. 넌 그 이후로 계속 경기 못 뛴 거잖아.”

“네.”

“그런데 감독 원망 안 해?”

“감독님도 처음엔 반대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기성은 손을 들어 송석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참, 어린데도 대견하다. 마인드는 프로 포수보다도 낫다. 포수가 남 탓하기 시작하면 팀이 막장이 되거든.”

이기성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선배가 프로야구 프런트에서 일해. 나랑 친한 선밴데 내가 혹시 신고 선수 자리 있냐고 물어봤어. 그 선배네에는 이미 신고 선수 TO가 다 차서 더 뽑을 생각이 없다고 해서 마음 접었거든. 근데 엊그제 갑자기 전화가 왔어, 고트에 자리가 있는데 혹시 괜찮냐고.”

“고트요?”

서울 고트.

프로야구 인기 팀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서울 프랜차이즈 팀이었다.

프로야구 구단 가운데 운영비를 가장 많이 쓰는 팀 중 하나이자 스타 선수가 즐비한 곳이었다.

서울 프리미엄이란 이유로 FA 선수들이 적게는 수억 이상을 감수하게 만드는 팀이 서울 고트였다.

비록 파란의 피닉스에 의해 올해는 가을야구의 주인공이 되진 못했지만…….

“그래, 고트. 거기서 갑자기 포수가 필요한가 봐. 그래서 혹시나 하고 전화해 본 거야. 갑자기 결원이 생긴 거니까 아무래도 여건이 썩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네 생각이 나서 말이야.”

“아…… 예.”

송석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송석현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기성은 송석현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 그래? 고트가 싫어?”

“아닙니다. 그런 거 전혀 아닙니다.”

“아니면 신고 선수 지원하는 게 싫은 거야? 다른 데 갈 데가 있어?”

“아니요. 저는 굉장히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시큰둥하네?”

“아…… 그게…… 음…….”

송석현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이기성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감사해서요. 코치님이 저와 아무런 연고가 없으신데 이렇게 발 벗고 도와주신다고 하니 사실 얼떨떨합니다. 여태 누가 절 이렇게 도와주신 분이 없어서요. 코치님한테 제가 도움 돼 드릴 것도 없는데…….”

이기성은 팔짱을 끼더니 한숨을 쉬었다.

“어린애가 벌써 참. 후우, 내가 왜 널 돕는지 알아? 내가 쪽팔려서 그래, 쪽팔려서.”

“코치님이요?”

“그래, 인마. 내가 네 얼굴 보기가 부끄럽다.”

송석현은 눈을 껌벅거렸다.

“코치님이 왜요?”

“왜긴. 야구계의 선배이자 어른으로서 낯 부끄럽지.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어. 포일? 그런 일은 한 시즌을 하다 보면 한 팀에서 수십 번은 넘게 일어나는 일이야. 하물며 고딩이 포일을 할 수도 있지. 아니, 안 하는 게 이상하지. 그런데 그거 하나 했다고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애 인생을 조져 놔? 그건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지. 평생 운동만 하던 애한테 운동을 빼놓으면 뭘 하라고. 그건 아니야. 그러면 안 돼. 내가 다 화가 나고 얼굴이 화끈거려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이기성이 송석현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내가 야구계 선배이자 너보다 나이를 조금 더 많이 먹은 어른으로서 뭘 해 주고 싶어서 하는 거야. 너한테 뭘 바라고 하는 게 아냐, 인마. 벼룩의 간을 빼먹지, 어린애한테 뭘 받겠다고.”

송석현은 황망한 얼굴로 이기성을 바라봤다.

여태 야구를 하면서 송석현은 야구계의 음지를 목도해 왔다.

송석현처럼 압도적으로 야구를 잘하는 친구들은 예외였지만, 다른 친구들은 달랐다. 야구부 회비는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을 오갔고, 실력이 조금 더 떨어지는 친구들은 주전을 위해 남보다 배는 더 지출했다.

야구만을 위한 지출이라고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돈인데 야구부 코치들은 가욋돈을 요구하기 일쑤였다.

소소하게 수십을 챙기는 건 아예 언급조차 못 됐다.

건너 건너 들은 바로는 감독이 차까지 받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송석현에게 어른이란, 특히 야구계의 선배들이란 엄하고 탐욕스러운 존재였다.

한데 아무 연고도 없는 이기성이 부끄러움에 못 이겨 자신을 돕겠다고 하니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 띵했다.

“석현아.”

“예?”

“너도 이번에 피닉스가 우승한 거 봤지?”

“예, 봤습니다. 제가 피닉스 팬이라 전 경기 다 지켜봤습니다.”

“그랬으면 너도 알 거야. 김영훈을 위한, 김영훈에 의한, 김영훈의 경기였어. 그치?”

“예, 진짜 최고였습니다. 김영훈 선배님은 정말…….”

“감동이지. 혹사라고 해도,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전력으로 하드캐리 했잖아. 꼴지 팀을 혼자 멱살 잡고 끌어서 가을야구 하게 만들고, 혼자서 10경기 넘게 나와서 이겼지. 인간이 아니야, 그놈은. 나도 올 시즌에 한번 붙어 봤거든.”

“코치님이요?”

“그래, 내가 올해 은퇴했어.”

“아…… 죄, 죄송합니다. 몰라봬서 정말 죄송합니다.”

송석현이 허리를 숙였다.

이기성은 픽 웃었다.

“야, 네가 날 어떻게 알겠냐? 1군보다 2군에 있던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됐어. 모르는 게 당연해.”

“…….”

“아무튼 내가 걔 공을 봤는데, 와…… 사람이 아니야. 걔는 메이저를 직행해야 됐어. 못 치겠더라. 칠 엄두도 안 나고 쳐도 공이 날아갈까? 의구심만 들어. 괴물이야. 리얼 괴물이지.”

“정말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래, 죽이는 놈이야. 최고야. 진짜 최고지…….”

이기성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그런 괴물이 왜 28세가 돼서 데뷔한지 알아?”

“아…… 기사에서 봤는데 중학교 때 야구를 그만뒀다고 들었습니다.”

“돈을 못 내니까 감독한테 찍힌 거야. 그래서 그만둔 거지. 그때도 김영훈이 존나 잘했는데 감독이 꼬장 부린 거야. 얼마나 어이가 없는 일이냐? 대한민국 국보 투수가 감독 주머니에 돈 못 찔러줬다고 10년 넘게 허송세월을 한 거야. 와, 환장할 노릇 아니냐?”

송석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무 살부터 데뷔했으면 벌써 메이저 갔겠네요.”

“그렇지. 김영훈이도 존나 불쌍해. 이상한 놈 하나 만나서 인생이 꼬인 거 아니냐. 내가 다 억울하고 답답했어. 그런데 너를 보니까 김영훈이 오버랩되더라.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는 잘 몰라. 그런데 기회조차 없잖아. 그건 아니지. 그건 아니야. 기회는 줘야 할 거 아니냐. 네가 뭐 범죄자야? 뭘 잘못했다고. 야구 하다 벌어지는 실수 하나로 어린애 인생을 내팽개치는 건 아니지. 그건 절대 아니야. 내가 뭐 특별히 착하거나 정의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김영훈을 보면서 느낀 게 많다. 김영훈이야 실력이 존나 뛰어나서 뒤늦게 성공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김영훈보다 실력 떨어지는 애들은 억울하게 야구 그만둬도 다시 시작할 방도도 없었단 얘기잖아. 안 그래?”

“예, 예.”

“김영훈처럼 리그를 씹어 먹는 놈도 허송세월했는데 하물며 다른 애들은? 최소한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는 있어야 덜 억울하지 않겠냐? 나야 실력이 달리니까 10년 넘게 1, 2군을 전전해서 억울하진 않지만, 너처럼 어린애들은 뭐 해 보지도 못하고 셔터 내리게 생겼으니 얼마나 억울할 거야. 안 그래?”

“…….”

송석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평소 눈물이 많지 않던 송석현인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내가 뭐 대단해서 너한테 이러는 거 아니야. 네가 안쓰러워서 기회나 줘 보는 거야. 대단한 기회도 아니고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고졸 신고 선수지만 그래도 기회는 가져 봐야 덜 억울할 거 아니냐. 안 그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코치님.”

“너 정말 갈 마음은 있지?”

“예, 그럼요. 물론입니다.”

“어디든 그렇지만, 결원 자리 가는 건 백이면 구십구 좋은 자리는 아니야. 보통은 힘들거나 어려워서 나가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고트면 서울이기도 하고 2군 시설도 되게 좋은 편이야.”

“야구만 할 수 있으면 상관없습니다.”

“후우, 그래. 그런 마음이면 힘들어도 버티기 수월할 거야. 고졸 신고 선수는 어딜 가도 대접받기 힘들어. 그래도 한번 버텨 봐. 최소한 가능성이라도 보여 주면 잘려도 다른 구단에서 한두 번 더 기회를 얻을 수 있어.”

“네, 네. 코치님.”

“그리고 이거.”

이기성이 메모지를 내밀었다.

“나도 받은 건데, 고트 2군 프런트 쪽 번호야. 이쪽에서 포수를 구한다고 했다네. 나도 건너 건너 소개받은 거라 잘 몰라. 일단 이쪽에 전화해서 네 이름 밝히고 잘 설명해.”

송석현은 메모지를 받아 들었다.

메모지는 노란 포스트잇일 뿐이었지만 송석현의 눈에서는 황금빛으로 광이 났다.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도 봄바람처럼 온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불과 얼마 전까진 겨우 신고 선수였지만, 지금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나 진배없었다.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코치님.”

“은혜는 무슨, 겨우 이런 거 하나 가지고. 그냥 야구 하는 후배가 안쓰러워서 연락처 하나 물어다 준 거야. 이런 걸로 유세 떨 생각 없다. 너 여기 가더라도 얼마 안 가 잘릴 수도 있어. 너무 좋아하지 마라. 괜히 또 상처 될라.”

“저한테 이렇게 해 주신 분은 코치님이 처음입니다. 정말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됐다, 됐어. 은혜는 무슨, 낯 뜨겁네. 이제 일어나. 얼른 연락해 봐. 다른 놈들한테 연락이 가기 전에 먼저 하는 게 좋을걸.”

“아…… 네!”

이기성은 송석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겨우 출발선이야. 프로 데뷔까지 아직도 갈 길이 구만 리야. 신고로 들어가면 1년 내내 죽어라 해도 프로 데뷔 못하는 애들이 태반이다. 드래프트로 들어가도 1군에서 한 시즌 제대로 다 해 보는 애들도 극소수고. 가서 열심히 해. 결과야 어찌 됐든 후회하지 않게 열심히 해라. 나처럼 애매하게 열심히 하면 애매하게 미련이 남는데, 그것도 괴로운 일이거든.”

“감사합니다, 코치님. 명심하겠습니다.”

이기성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제 가 봐. 내가 응원할게. 은혜를 갚고 싶거든 꼭 프로로 데뷔해서 방송에 나와라. 그러면 내가 오지랖 부린 게 잘한 일이구나, 뿌듯하게 생각할 수 있잖아. 은혜는 그렇게 갚아. 알았지?”

“네, 네. 알겠습니다.”

송석현은 붉어진 눈시울을 꾹 눌러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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