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내가 여기 일신중학교 코치예요.”
“아, 안녕하십니까.”
송석현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얼마 전에 코치를 맡게 돼서 실은 학생 야구에 대해서 잘 몰라요. 내가 석현 학생한테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딱 봐도 폼도 좋고 몸도 다부져 보이는데 아무 데도 연락이 없었어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뭐 어디 아픈가?”
“아니요. 그렇진 않습니다.”
“우진고에서 주전 포수 아니었어요?”
“예, 맞습니다.”
“우진고 주전인데 왜 연락이 없었을까. 허허, 참. 신기하네.”
“……제가 부족한 탓이죠.”
“그러면 여기서 알바하고 있는 거예요? 대학을 가거나 다른 데 가는 것도 아니고?”
“예, 일단은 그렇습니다.”
“음, 그래요…….”
이기성은 턱을 매만졌다.
궁금한 게 있는 눈치였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어요.”
“예, 들어가십쇼.”
이기성은 송석현과 얘기를 마친 후 다시 일행에게 돌아왔다. 일행은 이기성을 보자 얼른 배트를 쥐여 줬다.
“화장실 갔다 온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려? 얼른 쳐.”
“매형, 제가 치면 이거 밸런스 붕괴라니까요.”
“일단 치고 말해. 지금 우리가 밀리고 있다니까.”
“저 올해까지 프로였어요. 이건 반칙인데.”
“어허, 얼른 좀 쳐. 시간 없어. 우리가 지고 있다니까.”
이기성의 일행은 30분가량 더 있다가 가게를 나섰다.
이기성은 계산을 하면서 카운터에 있는 정미남에게 물었다.
“아까 슬쩍 보니까 저기 알바생이랑 친한 거 같아 보이던데, 친구예요?”
“누구요? 석현이요?”
“예, 친해 보이던데. 아닌가?”
“맞아요. 친구예요.”
“친구가 선출이던데. 아, 아직 현역인가.”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잠깐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아무 데서도 연락이 안 왔다던데. 우진고 주전 포수면 실력에 문제가 있을 거 같지 않던데, 무슨 일 있어요?”
정미남은 이기성을 슬쩍 바라봤다.
이기성은 웃으면서 지갑 안의 명함을 꺼냈다.
“내가 일신중학교 야구부 코치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또 야구 후배기도 하니까.”
“아, 코치님이시구나.”
정미남은 명함을 받아 들곤 카운터에 내려놨다.
“석현이 잘해요. 시합에 많이 못 뛰어서 그렇지, 잘해요. 그런데 쟤가 포수로 시합한 경기가 너무 짧아서…….”
“왜 짧아요? 다쳤나?”
“아뇨. 그게…… 시합 때 큰 미스를 해서 이후에 완전 찍혔거든요. 석현이가 고 2 때부터 포변해서 고 3 때 정식 경기 뛴 거라 공식 경기가 몇 전 안 돼요. 포수로서 경력도 짧고, 소문도 안 좋게 나서 어디서도 제안이 안 왔어요.”
“허, 나도 기사는 봤지만 실수 한번 했다고 기용을 안 했어요? 감독이 이거 너무하네.”
“감독님도 처음에는 반대하셨는데 교장도 그렇고 이사회까지 난리를 쳐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데 실수를 할 수도 있지, 그걸로 애를 저렇게 방치한 건, 허. 쯧. 참 나, 이거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리네. 유치해 가지곤.”
“제 말이요. 애초에 그거 석현이 잘못도 아니에요. 투수가 잘못 던진 건데, 그때 투수가 장대희였거든요. 대희 아버님이 유명하신 분이라 다들 찍소리도 못 하고 석현이한테만 화풀이했어요. 석현이가 잘못했어도 너무한 건데, 석현이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그랬어요. 쟤가 보살이죠. 저 같으면 못 참았을걸요.”
“하.”
이기성은 고개를 돌려 송석현이 있는 케이지를 바라봤다.
송석현은 미트를 들고 공을 잡고 있었다.
“저기서 저렇게 훈련하는 거예요?”
“……네.”
“저걸로 훈련이 되나…….”
“안 할 수도 없으니까 뭐라도 해야죠.”
“후.”
이기성이 고개를 내저었다.
“야구 할 생각은 있는 거예요? 저 친구 계속할 마음은 있는 거죠?”
“예, 있어요. 그래서 신고 선수도 지원했는데 서류에서 다 광탈했어요.”
“신고 선수도?”
“네.”
“요새 신고가 대졸 위주로 뽑는다지만 서류 광탈은 너무한데.”
“테스트라도 좀 받아 봤으면 덜 억울할 텐데……. 그래서 석현이 일본 독립야구단까지 갈 생각하고 있어요. 국내에서 안 받아 주니까 별수 없죠.”
“어린 학생이 일본까지? 의지는 기특한데 독립야구단이라고 쉽게 들어갈 수 있진 않을 텐데.”
“일단 가 보겠대요. 한국은 갈 데가 없잖아요.”
“흠.”
이기성은 뒷짐을 졌다.
한참 송석현을 바라보던 이기성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정말 신고 선수라도 뛸 마음 있는 거예요?”
“예, 쟤는 제발 기회라도 달라는 입장이에요. 열심히 훈련하면 뭐 해요, 테스트도 못 받는데.”
“허, 그건 좀 너무하지. 테스트는 받아 봐야 하는데.”
이기성은 다시 한번 송석현을 바라보더니 가게를 나섰다.
손님들마저 다 가 버린 가게에는 송석현 홀로 공을 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 * *
“축하, 축하. 고생했다.”
“고생했어, 얘들아!”
송석현이 방황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수능이 끝났다.
송석현과 정미남, 김나영, 김영석은 시내 돈가스집에서 콜라로 축배를 들었다. 평소에도 사람이 많은 식당이지만 오늘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식당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나영이 너는 시험 잘 봤어?”
“그럭저럭. 영석이 너는?”
“나는 괜찮게 본 거 같아.”
정미남이 김나영과 김영석에게 물었다.
“니들은 채점 안 해? 다들 가채점을 먼저 한다는데.”
“이미 끝난 거 채점해서 뭐 해. 잘 봤겠지.”
“역시 나영쓰. 자신만만해. 영석이 너도?”
“난 뭐……. 아무 대학이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공댄데.”
“야, 대학 중요하지.”
“공대는 다 똑같아. 어차피 인서울 가능한 점수는 나왔겠지.”
“와, 재수 없어. 다른 애들이 그 얘기 들으면 니들 때릴 듯?”
“여기 아저씨 둘이 있는데 누가 우릴 건드냐?”
송석현이 돈가스를 썰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왜 나까지 아저씨야? 나는 누가 봐도 파릇파릇한 고딩이야. 영석이 네가 존나 어려 보이는 거지.”
정미남이 발끈했다.
“야, 송석현. 이럴 때 나랑 거리 두기 하는 거냐?”
“미남아, 친구끼리 솔직히 말해야지. 네 얼굴이랑 내 얼굴은 티어가 달라. 난 최소 골플이야. 너는 브론즈. 브실골도 아니고. 브론즈다, 브론즈.”
“그래 봐야 도찐개찐인데 되게 유세 떠네.”
김나영이 중얼거렸다.
“도찐개찐 아닌데.”
정미남이 황당하다는 듯 김나영을 바라봤다.
김나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도긴개긴이야, 도찐개찐이 아니라.”
“넌 뭐 아나운서야? 뭘 그걸 지적하냐?”
“그렇다고.”
송석현이 돈가스 세 개를 집어 한입에 넣었다.
몇 번 우물거리자 돈가스가 금세 사라졌다.
“어쨌든 축하한다. 나영이랑 영석이 너희 둘 다 이제 놀기만 하면 되잖아. 그치?”
김영석이 말했다.
“넌 뭐 안 노냐?”
“나는 요새 열공 중이다. 내가 니들보다 더 바빠.”
“공부? 무슨 공부?”
“일본어. 내년에는 일본에 가서 일본 독립리그 도전하려고.”
“일본? 와, 너 진짜 일본에 가는 거야?”
“진짜 가지. 그럼 가짜로 가냐?”
김나영은 돈가스를 썰다 말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그러더니 음료 잔을 집어 콜라를 벌컥벌컥 마셨다.
“후우우우.”
김나영은 별말이 없었다.
김영석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그때까지 얼굴 자주 보자. 나 일본에 가면 언제 또 시간 날지 모르니까.”
송석현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분위기는 싸했다.
김나영은 팔짱을 꼈다.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수능 끝난 기념으로 술 한잔할까?”
김영석이 화들짝 놀라 답했다.
“술? 야, 여기 단속 빡세. 술 못 마셔.”
“오늘 수능날이야. 오늘 같은 때는 뚫리는 데 많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귀가 있어. 다 들었어. 일어나. 가자. 술이나 마시자.”
“이거는 다 먹어야지.”
“됐어, 입맛도 없는데. 일어나. 가자.”
김나영의 호언장담과 달리 가게들은 엄격했다.
네 사람은 여러 가게를 전전하다 이내 포기하고 노래방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김나영이었다.
시작부터 소찬휘의 <티얼스>를 불렀다.
“잔인한! 여자라! 나를 욕하지는 마!”
김나영의 실력은 발군이었다.
고음을 넘나드는 노래도 무리 없이 소화했다.
송석현은 음료수를 사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김영석이 뒤를 따랐다.
“넌 왜 나왔어?”
“먹을 것 좀 사려고. 아까 돈가스 못 먹었잖아.”
“배고프냐?”
“조금?”
“뭐 먹을려? 여기 먹을 게 있나?”
김영석이 먹을거리를 고르며 물었다.
“너 언제 일본에 갈 생각이야?”
“내년쯤? 뭐, 기초 회화 정도는 떼고 나갈 생각이야.”
“회화는 잘되냐?”
“그냥 하는 거지.”
“한국에서 야구 하면 좋을 텐데.”
“그러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두 사람이 계산을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송석현의 전화가 울렸다.
동생이었다.
“잠깐만. 이거 네가 들고 가라. 나 전화 좀 하고 간다.”
“그래, 알았어.”
송석현이 가게를 벗어나 전화를 받았다.
“어, 왜?”
-형, 오늘 늦어?
“딱히. 노래방 왔어. 좀 놀다 가려고.”
-아, 그래. 엄마가 형 언제 오냐고 물어보라고 해서.
“늦어도 10시 안에는 들어갈 거야. 더 일찍 갈 수도 있고.”
-알았어.
전화를 끊은 후, 송석현은 건물 유리창 밖을 바라봤다.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도 가득했다.
송석현은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후.”
송석현이 다시 노래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노래방 문을 팡 하고 거칠게 열었다.
송석현은 머리를 찧어 뒤로 물러섰다.
“아, 씨…….”
“야! 석현아!”
문을 연 사람은 정미남이었다.
“아, 뭐야. 문 살살 열어. 대가리 깨지는 줄 알았네.”
“석현아, 이거 봐 봐. 이거.”
“아, 뭔데?”
송석현은 이마를 문질렀다.
정미남이 내민 건 문자 한 통이었다.
“이거 보라고.”
송석현은 정미남의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읽었다.
-가게에 번호 물어봐서 여기로 문자 합니다. 저번에 잠깐 얼굴 봤죠? 일신중학교 코치 이기성이에요. 저번에 친구 얘기 듣고 마음이 쓰여서요. 혹시 아직도 신고 선수에 대한 생각이 있나요? 아는 지인이 야구단 프런트에서 일해요. 마침 비는 자리가 있다는데 혹 아직 관심 있으면 친구한테 물어보고 나한테 문자 주세요.
“뭐야, 이게?”
송석현은 문자를 보고도 얼떨떨했다.
“뭐긴, 인마. 저번에 우리 가게에 왔던 손님이야. 네 얘기를 했더니 관심을 보이더라고. 어때? 한번 연락해 볼까? 어차피 안 되도 그만이고, 되면 좋은 거잖아.”
“이 사람 저번에 나랑 얘기했던 사람 같은데.”
“너랑도 얘기했어?”
“어, 잠깐. 중학교 코치라고 하던데.”
“야, 일단 문자 하자. 문자 해 보자.”
“이거 뭐 사기나 그런 거 아니겠지? 돈 달라거나.”
“돈 달라고 하면 그때 생각해. 일단 해 보자. 어때?”
송석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래, 문자 보내. 내 번호도 같이 찍어 주고.”
정미남이 문자 하는 동안 송석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미남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보냈어. 답장 기다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