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이거 실화냐?”
송석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전 구단 탈락.
심지어 떨어졌다고 연락조차 없는 구단이 태반.
생각보다 현실은 더 시궁창이었다.
신고 선수에 대한 기대감이 워낙 낮다 보니 당연히 지원만 하면 다 붙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덧 10월.
아무것도 못 했는데 시간만 흘렀다.
남들은 수능을 준비하고 프로 팀, 대학 팀 진학을 위해 열정을 불사르는 동안, 자신은 백수 라이프를 만끽하고 있다.
“망했네…… 하.”
친구들에게 포부를 밝힌 게 무색하게 단 한 군데도 서류 통과가 안 됐다.
김영석이 얘기한 그대로였다.
포수로서 너무 짧은 공식 경기 기록과 본헤드 플레이어라는 평판은 바로 서류에서 커트였다.
신고 선수 정도는 당연히 들어갈 거라 자신만만했기에 더 어이가 없었다.
남은 건 독립구단인데, 이마저도 국내에선 몇 군데 없을뿐더러 벌써 선수들을 다 뽑아 TO가 없다고 했다.
송석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찬물 샤워를 했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복근엔 슬쩍 왕 자가 보였다.
“운동해서 국방부만 덕 보는 거 아냐?”
* * *
그날 저녁.
송석현은 김나영과 공원 벤치에 앉아 음료수를 한 캔씩 나눠 마셨다.
송석현은 빈 캔을 쓰레기통에 정확히 던져 집어넣었다.
“이열. 아직 안 죽었네, 송석현.”
“이 정도는 기본이지. 이래 봬도 내가 전국구였는데.”
“그럼 내 것도 버려 줘.”
“오케이!”
송석현은 김나영의 빈 캔까지 쓰레기통에 안착시켰다.
“수능 얼마 안 남았는데 쫄리냐?”
“수능? 뭐 쫄릴 거까지야. 그냥 하는 거지.”
“하기야. 뭐, 너야 서울대를 가냐 마냐 그 정도니까. 전장 받자고 다른 대학 가지 말고 일단 서울대 가. 우리 학교 재단에서도 지원해 준다잖아.”
“네 걱정이나 하시지. 내 걱정 말고.”
송석현이 입맛을 다셨다.
“하기야. 내가 널 걱정하는 게 웃기는 일이지.”
“너 신고 선수 지원한 건 어떻게 됐어? 잘됐어?”
송석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되긴 뭘 돼. 망했지. 아무 데도 연락이 없네. 영석이 말 그대로야. 설마 서류조차 통과 안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망이다, 망. 그래서 너 먼저 만난 거야. 미남이나 영석이가 이걸 들으면 얼마나 놀릴 거야. 똥폼은 다 잡아 놨는데 안됐다고 하면 최소 10년 이상 놀림감이다.”
“나는 안 놀려? 나도 놀릴 건데? 나도 한 10년 놀릴 건데?”
“야, 너는 솔직히 이번에 나 신고 선수 되든 말든 상관없었잖아. 전에도 심드렁해 놓고선. 그래서 너한테 먼저 말하는 건데, 뭐.”
“그래서?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또 군대?”
“후우, 뭐, 일단 야구를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다 생각해 보게. 지금은 독립야구단도 자리가 없다고 하니까 고민 중이야. 일본에 독립리그가 활성화돼 있다고 하니까 그리로 한번 가 볼까, 생각도 하고 있어.”
“일본? 거길 간다고?”
송석현이 어깨를 움찔했다.
“깜짝아. 살살 말해. 다 들려. 왜 소리를 높이고 그래?”
“일본을 왜 가, 한국을 냅두고? 너 일본에서 데뷔할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이왕 야구 다시 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쭉 해야지. 이대로 쉴 수 없잖아. 한 1~2년 정도 더 도전해 보고 안되면 군대 가든가 해야지.”
“……그럼 일본에 갔다가 군대를 가겠다는 거네?”
“안 풀리면 그렇게 되겠지?”
김나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김나영의 눈초리가 매서웠지만 송석현은 보지 못해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너한테만 먼저 말한 거니까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말해야지. 안 그러면 내 멘탈이 터진다.”
“…….”
“알았지?”
“…….”
송석현은 김나영을 바라봤다.
“야, 씹냐? 왜 대답이 없어?”
“알았어.”
김나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가게?”
“뭐? 더 할 말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갈게.”
“야! 같이 가. 내가 바래다줄게.”
“됐어. 혼자갈 수 있어.”
“까칠하긴. 같이 가!”
집으로 가는 내내 김나영은 말이 없었다. 침울한 기색이 김나영의 얼굴에 드리웠다.
송석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땅을 보고 걸었다.
김나영의 집에 다 도착했을 때였다.
김나영이 몸을 돌려 주먹으로 송석현의 가슴을 쾅 쳤다.
“아!”
아무리 세게 쳤다고 한들, 김나영의 주먹이 송석현의 가슴에 큰 타격을 줄 리 만무했다.
송석현은 황당한 얼굴로 김나영을 봤다.
김나영은 입술을 꾹 다물곤 송석현을 노려봤다.
“아, 왜 또!”
김나영은 말도 없이 바로 집 대문을 열고 사라졌다.
송석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김나영이 사라진 집 대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수능 스트레스가 사람 잡겠네.”
* * *
송석현이 정미남을 만나 사실대로 털어놨을 때 반응은 의외였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정미남의 침착한 반응에 송석현이 놀랐다.
“헐. 뭐야, 그 반응은?”
“뭐가, 인마?”
“안 놀려서. 흑역사 각오하고 말한 건데.”
“지금이 놀릴 타이밍이냐? 너 이제 진짜 야구 빼도 박도 못하게 영영 못한다고 도장 받은 건데.”
“뭘 또 그렇게까지. 또 몰라. 독립야구단에 갔다가 트라이아웃 때 재도전할 수도 있어.”
“야, 그만해. 너만 더 힘들어.”
“이왕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이대로 그만두면 쓰나.”
“왜 이렇게 애를 쓰냐? 너 신경 쓰지 말고 나랑 같이 일이나 하자. 아니면 정말 군대를 빨리 갔다 와. 나랑 동반 입대하자. 어때?”
“동반 입대하면 전방인 건 알고 하는 소리냐?”
“야구장에서 구른 짬밥이 얼만데 전방이 뭐라고. 하면 되지.”
“됐어, 인마. 네가 부모님한테 약속한 게 있는데, 일단 일을 좀 배워 두고 군대를 가.”
“이왕 갈 거면 빨리 갔다 오는 것도 좋지.”
“그만해, 인마. 내가 더 미안해져서 말을 못 하겠네. 그리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진짜 최선을 다해서 야구 해 볼 거야. 이렇게 해도 안 되면 ‘진짜 어쩔 수 없구나.’ 하고 포기하겠지만, 일말의 희망이 있는 한 놓칠 수 없다.”
“야, 왜 이렇게까지 하냐? 네가 야구를 좋아하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후.”
송석현은 어머니란 단어를 내뱉으려다 혀끝에서 꾹 참았다.
“사정이 있다고만 말할게.”
“왜? 집에서 무조건 하래?”
“그런 건 아닌데. 하, 아무튼 있어. 해야 돼. 그렇게만 알아.”
“진짜 고집은, 고집은.”
“뭣보다…… 오후에 너희 가게 바쁜가? 피크 타임이 저녁이지?”
“어, 그런데?”
“오후에 잠깐 너희 가게에서 훈련해도 되냐?”
“훈련을 우리 가게에서 한다고?”
“그렇잖아. 이제 야구부도 아닌데 야구장에서 하기도 그렇고. 일단 미트질은 계속해야 느는 거잖아. 배팅도 그렇고. 사실 배팅을 너무 안 해서 이제 감이 없다.”
“나랑 같이하면 되지.”
“너랑 동네 학교 운동장 전전하면서 훈련한다고? 눈치도 보이고 네 시간 너무 뺏는 거잖아. 그냥 혼자서 좀 할게.”
“그런 걸로 훈련이 돼?”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어쩌겠어? 뭐라도 해야지.”
“야……. 하, 너 참.”
정미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녁에도 계속 해. 손님 만실 차기 전까진 자리 하나 내줄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됐어, 인마. 우리 부모님도 너 걱정 많이 하시더라. 어차피 남는 자리, 친구한테 빌려준다는데 뭐라고 하시겠어? 정 그러면 네가 일도 좀 도와드리고 해. 우리 부모님 다 너 좋아하잖아.”
“자꾸 너한테 미안해지네.”
정미남이 발로 송석현을 툭 찼다.
“미안할 것도 많네. 근데 그걸로 훈련이 되겠어?”
“감을 익히는 거지, 감을. 당분간 학교에선 공부하고 오후엔 연습하려고. 그래야 어디라도 TO 날 때 지원할 수 있을 거 아냐.”
“TO가 어디서 나긴 난데?”
“모르지, 그건. 독립야구단에서 날 수도 있고. 난 일본에도 갈 생각도 하고 있으니까 그쪽이랑 연락할 방법도 찾아보고 해야지.”
“일본까지? 일본 독립야구?”
“어.”
정미남이 혀를 내둘렀다.
“야, 참. 대단하다. 넌 꼭 이러더라. 한번 풀이 좀 죽다가 확 살아나는 그런 게 있어. 그…… 뭐지, 그거?”
“근성?”
“아니, 아니. 진상?”
“이런 씨바.”
“흐흐흐.”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키득거렸다.
“진상이든 뭐든 별수 있냐? 드래프트 픽 안 되면 이렇게 사는 거지 뭐.”
“네가 투수를 했으면 전체 1순위로 입단했을 텐데.”
“다 지난 일이야. 뭘 얘기하냐?”
정미남은 아차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아무튼 내일부터 나 너희 가게에 가도 되지?”
“그래, 내가 아빠한테 말해 놓을게. 어차피 가게는 나랑 알바 형이 다 해. 아빠는 저녁에만 잠깐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 너 편할 대로 해.”
“고맙다. 나도 눈치껏 일 열심히 도울게.”
* * *
주경야독.
송석현에겐 주독야야였다.
아침엔 책을 읽고 저녁엔 야구를 한다.
송석현은 도서관에서 시중에 나와 있는 야구 교본 및 서적을 닥치는 대로 빌려 와 읽었다.
“이야. 이런 게 있었어?”
야구 선수지만 야구 서적이 낯설었다.
애초에 현장에서 야구를 배우느라 야구를 책으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최근에는 프로 출신 코치, 메이저리그 개인 코치, 일본의 컨디셔닝코치 등 세계적으로 잘나간다는 코치들이 자기 노하우를 적힌 책을 펴는 게 유행이었다.
송석현은 몸으로만 배운 이론을 책으로 확인하자 뒤늦게 학구열에 불탔다.
남들이 국영수를 공부할 때 송석현은 하루에 한 권씩 책을 독파해 나갔다.
학교에선 야구팀에서 뒤늦게 탈퇴한 송석현이 야구 책을 읽어도 터치하지 않았다.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송석현이라 괜히 건드려서 긁어 부스럼이 날까 선생들도 조심했다.
“야, 가자.”
학교가 끝나면 송석현은 미트를 들고 정미남과 함께 가게로 향했다.
알바 형과 인사를 마치고 일을 좀 도와준 후 남은 룸에서 훈련을 시작하는 게 루틴이었다.
팡! 팡!
송석현은 스크린 야구장에서 미트를 들고 포구했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송석현은 내내 진지했다.
정미남은 뒤에서 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야, 너 미트질이 좀 달라졌다?”
“미트질?”
팡!
송석현은 잠시 기계를 멈춰 달라 알바에게 부탁한 후 자리에 앉았다.
“그래 보이냐?”
“왼쪽 겨드랑이를 띄우네.”
“보는 눈은 있네.”
“내가 포수 선배야, 인마. 그걸 모를까 봐.”
“맞아. 내가 책을 보니까 요새 트렌드는 겨드랑이를 좀 띄우는 거라네. 그래야 내 왼쪽으로 오는 공을 모로 잡아서 스트존에 집어넣을 수 있대. 겨드랑이 붙이면 자세는 안정적인데 왼쪽으로 오는 공을 잡을 때 좀 어색하잖아.”
“그건 또 어디서 주워 들은 거야?”
“주워 듣긴. 이게 요새 메이저 트렌드란다. 검지를 살짝 2시 방향으로 틀어서 미트질을 용이하게 하는 거지. 메이저리그에선 프레이밍 점수도 높게 친대. 프레이밍을 잘하면 포수가 점수를 따는 거지. 잘하는 포수는 1년에 2승, 3승도 넘게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열심히 연습해야지. 팡. 팡팡!”
때마침 손님이 왔다.
송석현은 미트를 벗고 먼저 나섰다.
“나 밥값 하러 간다.”
송석현이 떠난 자리.
정미남은 한숨을 쉬었다.
“야구가 그렇게 좋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