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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로 승승장구-3화 (3/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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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현은 대답 없이 물을 따라 마셨다.

김나영은 송석현의 옆구리를 찔렀다.

“말 좀 해 봐. 너처럼 살면 안 답답해? 안 억울해?”

“억울한 거 일일이 따져 가면서 살 만큼 내가 한가롭지 않아서 말이야. 뭐…… 여태 야구 열심히 했잖아. 우리 아빠 소원이 야구 선수라 나도 열심히 했는데, 운이 안 따르는 걸 어떡해. 나중에 아빠한테 할 말이 생겼으니까 그걸로 됐어. 열심히 했는데 잘 안 풀렸다고 하면 되니까. 이젠 야구에 정 떨어졌어. 굳이 매달려서 하고 싶지 않아. 싫다, 그거.”

“네 인생은? 너 야구 평생 했잖아. 앞으로 너 뭐 할 건데?”

“몰라. 그건 차차 알아 가 보지 뭐. 야구 아니면 내가 뭐 할 게 없겠어? 생각할 시간은 많아. 일단 군대 가서 좀 생각을 해 보려고.”

“……에이 씨.”

김나영이 또 술을 마시려 하자 송석현이 만류했다.

“그만. 그만 좀 마셔, 인마. 너 그러다 골로 간다. 너 술 잘 마시는 건 아는데 이렇게 마시면 집에 어떻게 들어가려고 그러냐?”

“됐어. 안 가. 집에 안 가!”

“사춘기야? 오늘 왜 이래? 집에 안 가고 뭐 하려고?”

김나영이 송석현의 눈을 이글이글 쳐다봤다.

송석현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왜, 왜?”

“……푸우우우우우우. 짜증 나, 진짜.”

김나영은 꽁해서는 송석현과 더는 말을 섞지 않았다.

혼자서 무릎을 모으고 중얼거리던 김나영도 잠이 들었다.

세 사람 모두 잠에 들자 송석현은 화장실로 가 세수했다.

찬물이 볼에 닿자 술기운이 달아났다.

“하아.”

송석현은 거울을 바라봤다.

붉게 물든 살찐 얼굴.

포수를 한다고 새벽부터 훈련할 땐 찾을 수 없던 얼굴이다.

“후우…….”

송석현은 다시 한번 세수했다.

아무리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해도 머리가 맑아지지 않는다.

송석현은 거울을 보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입꼬리가 떨리도록 웃었다.

눈가엔 아직 닦이지 않은 물이 볼을 따라 흘렀다.

* * *

“야, 야. 나는 나영이 데려다줘야 해서 먼저 일어난다.”

“어? 어, 어?”

정미남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해롱거렸다.

송석현은 정미남의 뺨을 한 대 툭 쳤다.

“술도 못 마시는 놈이 객기는. 대충 치워 놨으니까 너도 일어나면 얼른 집에 가.”

“어우, 언제 치웠데. 땡큐. 근데 나 집에 안 갈 거야.”

“왜 안 가?”

“오늘 영석이네서 자고 간다고 말하고 나왔어.”

“그럼 너 여기서 자려고?”

“어.”

“야, 뭐 하러 이런 데서 자냐? 집에 가서 자, 인마.”

“됐어. 집에 갈 힘도 읎다. 넌 나영이나 잘 데려다줘라.”

“참 나, 알았어. 내일 아침에 전화할게. 인부 아저씨들 오기 전에 얼른 집에 가라.”

“아하하함. 알았어, 알았어.”

송석현이 잠이 든 김나영을 깨우려던 그때, 정미남이 말했다.

“야.”

“왜?”

“너 딴생각하지 말고 나랑 같이 일이나 하자. 여기 일손 많이 필요해. 요새 스크린 야구장 잘나간다.”

“알바 구해, 그럼.”

“일은 믿을 만한 사람이랑 하는 거야.”

“뭘 나랑 같이 하냐, 너 혼자 해도 충분한데? 사장님 소리 들으면서 일하면 얼마나 좋아.”

“아무튼 딴생각하지 말고 나랑 같이 일하는 거다. 알았지?”

“생각은 해 볼게.”

“튕기기는. 그럼 난 잔다. 갈 때 불이나 좀 끄고 가.”

“오냐, 알았다.”

정미남은 몸을 뒤척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송석현은 김나영을 흔들어 깨웠다.

김나영은 꿍얼거리기만 하고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송석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잠순이, 진짜.”

집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송석현은 김나영을 업고 번화가를 지나 집까지 걸었다.

송석현과 김나영의 집은 지근거리.

골목에 들어서자 송석현이 숨을 돌렸다.

송석현이 건장한 남자고 김나영이 가벼운 몸무게라 해도 한참 걸은지라 송석현의 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후우.”

송석현은 주변을 둘러본 뒤 김나영을 불렀다.

“야, 아직도 자냐? 일어나. 집에는 걸어서 들어가야 안 들킬 거 아니냐.”

“……일어났어.”

“뭐야? 언제 일어났어? 내려, 그럼.”

김나영은 대답 대신 송석현의 몸을 팔로 꽉 감쌌다.

“싫은데.”

“야, 놔. 뭐 하는 거야?”

“술도 깰 겸 동네 한 바퀴만 더 돌자. 가자, 돌쇠야. 한 바퀴 더 돌자.”

“아이, 진짜. 내려와. 내려오라고.”

“한 바퀴만 더 돌아. 빨리. 이랴, 이랴.”

“아, 이 진상이 진짜.”

김나영은 발을 파닥거리면서 송석현의 옆구리를 쳤다.

송석현이 짜증을 냈지만 김나영은 미동도 없었다.

“이랴! 이랴!”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그만 좀 차라. 아, 진짜.”

“가자, 돌쇠야. 고고고!”

“어휴, 진짜. 내가 너 수능 보는 고 3이라 참는 거야.”

송석현은 다시 한번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동네에는 공원 하나가 있었는데, 마침 밤이라 인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공원에 들러 주변을 돌았다.

“옛날에 우리 여기서 많이 놀았는데.”

송석현이 미끄럼틀을 가리켰다.

“너 예전에 저기서 치마 뒤집어졌다고 울었잖아. 기억나냐?”

“……어.”

“세상 억울하게 울더라. 아주 여기 떠나가게 울었어. 난리도 아니었지.”

“그때 내 팬티 봤다고 놀린 애들이랑 싸운 게 너잖아.”

“그래? 내가?”

“기억도 안 나냐?”

“몰라. 그랬나.”

“흥.”

송석현은 허리를 세웠다.

“야, 이제 좀 내려오지 그러냐. 땀나서 너도 축축하잖아. 나도 허리 아파.”

“내가 너 허리디스크 만들어 줄게. 그럼 군대 안 가도 되잖아.”

“그냥 군대 가는 게 낫지, 평생 불구로 살리? 그리고 나 부사관 지원할 수 있다니까.”

“그놈의 부사관은! 그런 거 하면 군대에서 평생 썩는 거잖아.”

“내가 알아봤는데 장기 복무도 쉽지 않단다. 재수 없으면 4년, 7년 이렇게만 하고 나올 수 있대.”

“7년이나? 헐, 너무 길어.”

“길긴. 이왕 갔으면 말뚝을 박아야지.”

김나영이 송석현의 목을 꽉 졸랐다.

“컥, 컥. 뭐야. 씨. 아파!”

“너 진짜 부사관 갈 거야?”

“그냥 생각 중이야. 나도 모르겠다. 일단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어.”

“그냥 미남이랑 같이 일해.”

“어차피 일을 해도 나 군대는 가야 돼.”

“그럼 좀 미루라고.”

“뭘 미루냐? 갈 거면 후딱 가 버리는 게 낫지.”

“이씨, 진짜. 놔! 내려!”

김나영이 송석현의 등에서 내렸다.

송석현은 영문을 몰라 뒤를 돌아봤다.

“여태 안 내려오다 이제 내려오네.”

“고집불통이다, 너도. 하, 답답해.”

김나영은 송석현을 두고 성큼성큼 걸었다.

“뭐야. 잘 걸으면서. 야! 같이 가!”

김나영은 쀼루퉁해선 송석현과 말을 섞지 않고 걸었다.

송석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수능 스트레스가 사람 잡겠네.”

김나영의 집에 도착하자 송석현은 주변을 살폈다.

“술 냄새 안 나게 바로 방으로 들어가라.”

“알아서 할 거거든?”

“하, 그래. 너 좋을 대로 하셔.”

김나영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송석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리다 저 멀리 동생 송철현이 걸어가는 걸 발견했다.

“야, 나 그럼 간다.”

송석현이 자리를 떴지만 김나영은 문 닫는 소리에 듣질 못했다.

김나영은 뒤돈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김나영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야…… 너 내가 군대 기다리면 어떡할 거야?”

밤이라 바람이 쌀랑했다.

김나영은 대답이 없자 마른침을 삼켰다.

“어, 어? 어떻게 할 거냐고.”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김나영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송석현은 없었다.

김나영은 대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이씨……! 송석현!”

* * *

“어우, 귀 간지러워라. 나영이 또 내 욕 하나.”

송석현이 귀를 만지작거렸다.

동생인 송철현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형, 술 마셨어?”

“오늘 드래프트 있었잖아. 미남이가 속상하다고 해서 한잔했지.”

“……형은 괜찮아?”

“괜찮아, 인마. 형은 괜찮다. 뭐, 엄마가 걱정이지. 엄마도 별 기대는 없었을 테지만, 또 생각하는 거랑 받아들이는 건 다르잖아.”

“……응.”

송석현이 동생의 머리를 헝클였다.

“너도 내년이면 고딩인데, 어떠냐? 안 쫄리냐?”

“쫄릴 게 뭐 있어, 남들 다 하는 건데.”

“그래, 뭐, 너는 공부도 잘하니까 어딜 가도 걱정은 없지. 네가 집안의 희망이다. 알지? 나 군대 갔다가 돌아오면 네 학비하고 생활비는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해. 아, 그렇다고 졸업할 때까지 여자 친구 못 사귀면 안 된다. 그러다 형 꼴 나. 고등학교 졸업 전까진 여자 친구 있어야지. 합법적으로 여고생이랑 사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아, 형.”

“하하하, 부끄러워하기는. 너는 요새 좋아하는 여자애 없어?”

동생이 고개를 저었다.

“없어.”

“너 좋다고 하는 애는?”

“…….”

“있구나? 있지? 있네, 있어.”

“그냥 내가 관심이 없어. 나 공부하는 것도 바빠.”

“야, 네가 언제 여중생이랑 사귀겠어? 사귀어, 인마. 후회하지 말고. 지나고 보니 그게 다~ 후회더라.”

동생이 걸음을 멈췄다.

“형.”

“왜?”

“형은 왜 누나랑 안 사겨?”

“뭔 소리야, 그게?”

“난 이해 안 되는 게 두 개 있어. 하나는 형이 야구를 포기한 거, 다른 하나는 나영이 누나랑 안 사귀는 거.”

“참 나, 뭔 소리야, 그게? 나영이랑 내가 왜 사겨? 우린 친구야, 친구. 그리고 걔 성격 모르냐? 걔처럼 까칠한 애를…… 어후. 조금 전에도 엄청 시달리고 왔다, 야.”

“그거야 누나가 형을 좋아하니까 그렇지.”

“나를? 걔가? 허이구, 행여나.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럴 순 없지.”

“……정말 몰라서 그런 거야?”

“됐어, 인마. 어린 놈이 벌써 형을 훈계하려고 들어. 야! 네가 공부를 잘한다고 이런 문제까지 다 아는 줄 아냐?”

“…….”

두 사람은 어느새 집에 다다랐다.

송석현은 동생에게 소리 죽여 말했다.

“나 샤워하고 바로 잘 테니까 엄마가 내 방 못 오게 해. 알았지? 술 마신 거 비밀이다.”

“알았어.”

집에 돌아온 송석현은 샤워를 하곤 바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아도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뒤척거리기를 한참.

어느새 코를 골며 잠에 들었다.

* * *

송석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다.

원래라면 지금 일어나 훈련하러 갈 시간이지만, 야구부를 탈퇴한 후에는 이 시간에 일어난 일이 없었다.

“어후, 잠도 안 오네.”

송석현이 몸을 일으킨 그때, 문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송석현은 입으로 숨을 내뱉어 술 냄새가 나는지 맡아 봤다.

“아침을 건너뛰어야 하나…….”

송석현이 고민하는 사이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내 잘못이다. 다 내 잘못이야.”

“아냐. 왜 엄마 잘못이야?”

엄마와 동생의 대화 소리였다.

“그때 석현이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나 때문에 석현이가 다쳤어. 쟤가 얼마나 상심이 크겠냐? 쟤도 사람 속이 아닐 거다. 내가 잘못했지. 내가 잘못했어…….”

“엄마, 울지 마. 왜 울어?”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송석현은 이마를 매만졌다.

그때, 2년 전 그날도 이맘때였다.

팔을 다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그날.

송석현이 오른팔에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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