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
“여기야, 여기!”
거구의 남자가 송석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옆에는 비교될 정도로 왜소한 체격에 안경 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옆에는 긴 생머리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검은 뿔테를 끼고 있음에도 주변 사람들이 한 번씩 뒤돌아 볼 정도로 하얀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지녔다.
“어, 어.”
송석현은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어 송석현의 근육은 더 두드려졌다.
송석현은 여자를 보더니 픽 웃었다.
“나영이도 있었네. 웬일이야, 야자 안 해?”
여자의 이름은 김나영이었다.
“얘 때문에.”
김나영이 거구의 남자를 가리켰다.
“미남이?”
미남이라는 말에 행인 하나가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190cm에 다다르는 키에 험악한 인상의 남자는 정미남, 송석현의 죽마고우였다.
왜소한 남자는 김영석.
넷은 10년 넘도록 함께한 친구였다.
“미남이가 왜?”
정미남은 송석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는 무슨. 오늘 같은 날 뭐 하겠냐? 기분 전환해야지.”
“오늘이 뭐? 오늘 뭐 있냐?”
“새끼, 뭐긴. 우리 둘 다 백수 확정 기념일 아니냐?”
송석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너는 애초에 프로에 갈 생각도 없었잖아. 대학도 그렇고.”
“야, 난 그래도 저기 지방대 스카우터가 입질은 했어.”
“진짜?”
김영석이 옆에서 큭큭 웃었다.
“대신 돈 달라고 하더라. 미남이 집에 돈 많은 거 알고 있었나 봐.”
“아…… 아직도 돈 받고 입학시키는 데 있구만. 그래서?”
정미남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내가 거길 왜 가냐? 말했잖아, 나 장사할 거라고. 너도 나랑 같이 장사나 하자. 안 그래도 우리 집에서 하는 스크린 야구장 그거, 아빠가 나한테 물려줄 생각이래. 내가 각 잡고 열심히 일하면 하는 거 봐서 물려주신단다.”
“좋겠네, 미남이. 고등학교 졸업하면 사장님 되는 거야?”
“뭐, 우리 아빠 성격에 그냥 주겠어? 나 부려 먹을 만큼 부려 먹고 주겠지.”
“부려 먹긴. 너 일 잘 배우라고 하시는 거지.”
“야, 그래서 말인데.”
정미남이 송석현 귀에 속삭였다.
“형 밑으로 들어와서 일할래? 부사장으로?”
“뭐, 인마? 부사장?”
“그래, 어차피 너나 나나 불러 주는 데도 없잖아. 그렇다고 수능을 볼 것도 아니고. 그냥 장사하는 게 최고지. 안 그러냐?”
“뭔 갑자기 장사야, 장사는.”
가만히 있던 김나영이 말했다.
“그래서 계속 여기에 서서 얘기할 거야? 어차피 살 거면 빨리 들어가서 사서 나오자.”
“아아, 그래. 나랑 석현……이까지 없으면 나영이가 곤란할 거고. 영석아, 우리 둘이 들어가서 사 오자.”
“나? 내가?”
“들어가선 형이라고 하는 거다.”
정미남이 김영석을 데리고 마트로 들어갔다.
송석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둘이 뭘 산다는 거야?”
김나영은 팔짱을 낀 채 답했다.
“술. 술이랑 안주.”
“술? 웬 술?”
“오늘 기분 꿀꿀하니까 한잔하자고 하더라.”
“갑자기 술을? 그러는 넌? 너도 마시려고?”
“몰라. 마실지 말지.”
“너는 마시지 마. 너 마시면 너희 부모님 뒤집어지신다. 하나뿐인 외동딸이자 집안의 희망이 술 취해서 오면…… 어휴. 전교 1등이면 1등답게 품위를 유지해야지.”
김나영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꼰대 다 됐네, 우리 석현이.”
“꼰대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술 마실 기분은 아니야. 적당히 한잔하고 애들 기분 좀 맞춰 주다 집에 가자.”
“야, 송석현.”
“어?”
김나영은 송석현을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지금이라도 공부 좀 해 볼래? 너 똑똑하잖아. 초등학교 때까지 네가 나 공부 알려 주고 그랬는데.”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앉아 있어. 초등학교가 언젠데. 그거야 옛날 옛적이지. 이제 와서 무슨 수능이냐? 한 1년이나 남았으면 몰라. 됐다, 됐어.”
“그러면 너 뭐 할 건데? 대학은 정말 안 갈 거야?”
“대학을 어떻게 가냐? 애초에 나 대학 갈 생각 없었어. 알잖아, 바로 프로 진출하는 게 목표였던 거. 대학을 가도 학비도 그렇고 생활비도 그렇고 답 없다, 없어.”
“미남이랑 같이 정말 일하려고?”
송석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모르겠다. 미남이한테는 고마운데, 사실 번번이 미안하잖아. 나한테 포수 자리 양보해 준 것도 사실 다른 애들이면 어림도 없는 걸, 미남이가 갑자기 몸이 아프다 뭐다 그래서 억지 춘향으로 내가 포수 하게 된 건데…….”
“미남이가 널 많이 좋아하긴 하지.”
“고맙긴 한데 너무 미안해서 그래도 되나 싶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생각 좀 해 보려고. 뭘 해야 먹고살 수 있나……. 뭐, 리틀 야구단 코치 이런 거는 안 뽑으려나. 그런 거면 가능할 거 같은데.”
김나영은 고개를 숙여 발로 땅을 툭툭 쳤다.
송석현이 말했다.
“근데 너는 왜 수시를 안 썼어? 수능에 더 자신 있어서?”
“나? 음…… 몰라.”
“뭘 몰라. 네 일인데.”
“몰라, 됐어.”
“갑자기 짜증이래, 짜증은. 오늘 그날이야?”
“야!”
송석현이 두 손을 들었다.
“쏘리, 쏘리. 예민하기는. 알았어. 안 물을게.”
김나영은 고개를 돌려 송석현을 피했다.
“그래서 아무 계획이 없는 거네?”
“나야 뭐…… 그렇지. 빈둥거리고 있는 거지. 일단 군대를 빨리 갔다 올까, 생각도 하고 있어.”
“군대?”
김나영이 송석현을 바라봤다.
“어, 시간 낭비할 거 없이 일단 군대를 해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부사관으로 지원할까도 생각 중이야. 부사관 하면 돈 벌 수 있으니까. 나 체력이랑 건강은 뭐 끝내주잖아.”
“안 돼.”
김나영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안 돼, 그건.”
“뭐가 안 돼, 갑자기?”
“너야말로 갑자기 왜 군대야, 군대는? 남들은 다 대학 간다, 뭐 한다 하는데 너는 바로 군대를 간다고?”
“내가 가겠다는데 네가 왜 그러냐? 그럼 집에서 노냐?”
“미남이 따라서 같이 일이라도 하든가.”
“에이. 미남이한테 미안해서 그게 되겠어? 군대를 가든, 아니면 부사관으로 가서 돈을 모으든 하는 게 나을 거 같다.”
김나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 진짜…….”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냐? 오금 지리것네.”
“…….”
“……왜, 왜? 뭐. 왜 그렇게 보냐?”
그때 정미남과 김영석이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채운 채 마트에서 나왔다.
“야, 얼른 이것 좀 들어. 술이라 무겁네.”
정미남이 송석현에게 장바구니 하나를 건넸다.
송석현은 얼른 장바구니를 받아 들면서 김나영의 눈빛을 외면했다.
“나영아, 넌 이것 좀 들어라. 이거 과잔데 가벼워. 손이 애매해서 말이야.”
정미남이 과자가 잔뜩 든 봉투를 내밀었다.
김나영은 휙 낚아채듯 봉투를 받아 앞장섰다.
“……야, 나영이 왜 저래? 왜 저렇게 빡쳐 있어? 너 뭔 짓 했냐?”
정미남의 물음에 송석현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몰라. 괜히 신경질 내기에 생리냐고 물어봤더니 더 빡친 거 같긴 하네.”
김영석과 정미남은 송석현을 하찮은 듯 쳐다봤다.
“너 미쳤냐?”
“뭐가?”
“나영이 성격 알면서 그 지랄을 떠냐? 어이구,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그 정도 수위는 어느 정도 익스큐즈한 거 아니냐?”
“수능이 얼마 남았다고. 나영이 신경 곤두선 거 이해해야지. 너나 나나 수능 안 본다고 너무 물렁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런가? 영석아, 너도 그러냐?”
김영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야 게임도 하고 야동도 보면서 푼다지만 쟤는 그런 것도 없잖아. 온니 공부, 공부, 공부밖에 없는 앤데 스트레스 만땅이지.”
“아…… 그런가. 수능 스트레스가 있구나. 그런 건 생각을 안 해 봤네. 그래서 열 받았나 보다.”
“이따가 잘 풀어. 나영이 성격 건드리지 말고.”
“쩝. 알았다, 알았어. 야, 근데 술은 어디서 먹냐?”
* * *
미남 스크린 야구장.
커다란 간판이 달린 빌딩 5층.
네 사람은 돗자리를 깔고 자리를 잡았다.
“여기 괜찮지? 넓고 사람도 없고 딱이야, 딱. 모레까지 내부 공사라 여기 올 사람도 없어.”
정미남이 주절주절 말하면서 봉투에서 먹을 걸 꺼냈다.
김영석이 물었다.
“공사 중이면 인부 아저씨들 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오늘은 이미 공사 끝나고 갔어. 내일 아침에나 올 거야. 여기 널널해. 불도 꺼 놔서 사람 올 일도 없고. 여기가 딱이라니까. 마침 타이밍 죽이지. 그치?”
정미남이 맥주 캔 하나를 꺼내 송석현에게 던졌다.
송석현은 맥주를 받아 들곤 김나영의 눈치를 살폈다. 김나영은 송석현을 보지도 않은 채 과자 봉지를 뜯는 데 열중했다.
송석현은 맥주 캔을 따서 한 잔 마셨다.
“크, 좋네. 시원하다.”
“그치? 이런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시냐? 자, 자, 맥주 한 캔씩 까자. 우리는 백수 된 기념으로, 너희 두 사람은 수능 대박 기원하면서 건배! 나영이는 콜라…… 엥? 언제 땄어?”
“짠.”
김나영이 어느새 맥주 뚜껑을 까고선 벌컥벌컥 들이켰다.
세 사람은 놀란 눈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하아, 한 캔 더 줘 봐.”
“어, 어. 여기.”
정미남이 한 캔을 더 건네자 김나영은 또 한 캔을 비웠다.
“야, 천천히 마셔. 뭐 그리 급하냐?”
“푸하, 이제야 속이 좀 풀리네. 아우, 진짜.”
김나영은 씩씩거리면서 송석현을 노려봤다.
송석현은 김나영의 눈을 피했다.
“뭐 해? 술 안 마셔? 구경만 할 거야?”
김나영이 앞서가자 다른 세 사람도 뺄 수 없었다.
맥주로 시작한 술은 소주로 이어졌다.
평소 술을 잘 못 마셨기에 소주 반병에 김영석이 쓰러졌다. 정미남도 소주 한 병에 쓰러졌다.
끝까지 남은 건 송석현과 김나영, 둘이었다.
“야, 송석현.”
“왜?”
“하아, 너 진짜 군대 갈 거냐?”
“가야지. 남자라면 안 갈 수가 있나.”
“바로 가는 거야?”
“아직 생각 중이긴 한데…… 갈 거면 바로 가야지. 빨리 갔다 오는 게 낫지 않겠어?”
“……씨이. 진짜 너무하네. 진짜 너무해!”
“뭐가 너무하냐?”
“네가 불쌍해서 그런다, 불쌍해서. 네 사인 미스가 아니라며. 투수 잘못이라며. 그런데 어떻게 네 편 들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냐? 어떻게 너를 바로 팀에서 왕따를 시키냐고. 너무한 거 아니야?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제자를 감싸 주지는 못할망정…… 에이 씨!”
김나영이 소주를 병째로 들어 마셨다.
송석현은 김나영의 손에서 소주를 뺏어 들었다.
“오버하지 마. 왜 네가 속을 썩히냐? 당사자인 내가 가만히 있는데.”
“내가 뭐, 뭐. 어? 남이냐?”
“남은 아니지. 친구지. 나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오늘 좀…… 기분이 극단적이시네. 너도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 거야?”
“많다. 아주 많아. 아주 속이 문드러지겠다. 어후, 너도 미남이처럼 들이받지. 그럼 속이라도 좀 풀릴 거 아냐. 왜 순순히 팀에서 나오긴 나오냐? 봐. 너 결국 어디도 못 가잖아. 그 사건 이후로 경기를 하나도 못 뛰었으니 널 스카우트할 팀이 있긴 하냐? 감독도 그래. 너 꽤서 데려갔으면 책임져야지. 교장이 자르라고 한다고 널 자르냐?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해. 치사해! 진짜 치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