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케이트가 옮길 교단은 다름아닌 제논 교단. 스타비르크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퍼지고 있는 교단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것도 세상을 구한 영웅을 종교로 만든 것. 루미너스도 그렇게 시작해서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의 신이 발간된 이후부터는 여러 말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태생이 신이었던 루미너스와 그 반대로 필멸자가 태생인 아이작."
이 둘의 차이는 어마어마하여 적지 않은 반발심을 불렀다. 물론 반발심이라 해봤자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루미너스도 그렇고 아이작도 그렇고 세상을 구하고 인류 문명을 번성시켰다는 건 똑같으니까."
무엇보다 루미너스가 직접 아이작을 '인류' 및 '문명'의 신이라 지칭하면서 의미없는 논쟁거리다."
하아······ 꽤 난감한 상황들이 연이어 펼쳐지는군.""
좀처럼 해결 방안이 나오지 않자 브리크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아이작이 전쟁의 신을 연재하는 동안 루미너스 교단은 롤러코스터를 탄 것마냥 요동쳤다."
망나니라는 표현조차 부족한 루미너스의 행보와 본디 하나였던 히르트."
이때는 루미너스 교단이 잠깐 흔들렸으나 천만다행히도 루미너스가 지혜의 여신과 만나 정신을 차렸다."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 괜히 자기 아버지를 죽인 게 아니구라라고 생각했을 정도."
뭐, 지금은 누구보다 자애롭고 현명한 신으로 성장했으니 다 옛날 이야기다."
도리어 제일 골치아픈 건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다."
지금도 아이작을 저주하면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겠지."
똑똑똑- 끼익-"
무엇 하나 제대로 나오는 것이 없을 때 누군가 노크를 하며 방에 들어섰다."
그에 브리크를 포함한 추기경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케이트였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갖고 있는 케이트.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어서 미모가 훨씬 물이 올랐다."
루미너스 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소? 케이트 추기경.""
케이트의 등장에 브리크가 살짝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믿을 건 그녀밖에 없다."
원래라면 루미너스에게 묻지 않고 알아서 해결했겠지. 그러나 이건 루미너스와도 큰 연관이 있는지라 어쩔 수 없다."
케이트는 브리크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왔다. 뒤이어 조용히 자리에 앉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우선 루미너스 님께서 주신이 된다면 발생할 일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는 거죠?""
이름조차 함부로 언급할 수 없을 겁니다.""
네?""
이름마저 함부로 언급할 수 없다는 말에 모든 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지어 송충이 눈썹 때문에 눈이 가려져 있던 데이모스조차 작디 작은 눈이 보일 정도다."
케이트는 이러한 반응들을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본디 이름이란 그 대상의 정체성. 저희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그 신께서 반응하게 되죠. 그러나 루미너스 님께서 최고신이 되는 순간 반응할 수 없으실 겁니다. 단지 지켜보실 뿐.""
그리 된다는 건······""
더이상 루미너스 님께서 저희에게 힘을 내려주실 수 없을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무거운 침묵이 좌중에 가라앉았다. 데이모스가 우려했던 것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루미너스 님께서 저희를 버리시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단지 너무 멀리 떨어져 지켜보실 수밖에 없는 거죠. 루미너스 님께서는 이를 독립이라 칭하셨습니다.""
독립······""
네. 이름을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름을 부르면 그 대상이 그리워질 테니까요. 대신 저희는 앞으로 루미너스 님을 '아버지' 또는 '최고신'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면 됩니다.""
케이트는 루미너스가 주신으로 승격했을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하나하나 알려줬다."
브리크를 포함한 추기경들도 귀를 기울였으나 내심 아쉬워했다. 어찌 됐든 간에 루미너스가 떠난다는 게 사실이었으니."
인류가 번성할 때부터 루미너스는 이 세상을 관조했다. 이건 어둠과 안식의 여신인 모라도 마찬가지."
모라가 1대가 아닌 2대라지만 신성과 기억은 보존하고 있었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루미너스가 직접 인류의 적을 퇴치하고 있을 때 모라는 인류를 어둠의 장막 안에서 보호해주고 있었으니."
마지막으로······ 저희가 직접 맞이하러 가면 됩니다. 루미너스 님이 떠나시고, 그 자리를 새로이 차지할 존재를요.""
그 자리를······""
새로이 차지할 존재?""
의미심장한 케이트의 말에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케이트는 아까보다 더 진한 미소를 짓더니 루미너스가 건넨 부탁을 꺼냈다."
루미너스 님께 부탁하셨습니다. 비어버린 자신의 자리를 대체할 존재에게 마중을 나가달라고. 그리 된다면 그 존재도 기꺼이 허락한다고 말이죠.""
그 존재가 설마······""
네.""
브리크의 물음에 케이트는."
그 분께서는······ 현재 마이샬 영지에 있습니다.""
정말 기대감과 황홀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작이 시원하게 엿을 던져주면서 계획이 꼬여버린 루미너스가 꺼낸 획책."
앞으로 저희는 루미너스 님이 아니라 그 분을 모시게 될 겁니다.""
아이작을 대신 꽂아넣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그 새······ 아니, 루미너스 님께서 저보고 자기 자리를 대신 채워달라. 이 말씀을 하셨다고요?""
네. 정확합니다.""
그래서 교황을 포함한 추기경들이 영지에서 순례하는 중이고?""
네.""
··· ···""
나는 해맑기 그지없는 케이트의 대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루미너스가 주신이 될 시 직접적인 힘을 줄 수 없다는 건 얼추 눈치채고 있었다."
반으로 분리되었다지만 히르트도 그랬다. 직접적인 힘을 주는 순간 사람이 미쳐버린다."
그러니까 힘을 줄 수 있다만 필멸자의 몸과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 주는 거고."
'그런데 이런 식으로 엿을 먹여?'"
안 그래도 스타비르크에 내 종교가 생기고, 점차적으로 퍼지고 있다."
루미너스나 모라를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제논교를 믿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
본래 종교는 문화적인 요소가 가장 강한데, 이미 내가 그 문화를 씹어먹고 있는 상황이라 퍼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스타비르크도 그렇고 부활도 그렇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눈으로 목격한 게 가장 크다."
특히 부활은 수천 년이 흘러도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 테니 기적으로 묘사될 것이다."
현재 마이샬 영지는 사실상 성지나 다름없을 겁니다. 아이작 님께서 탄생하시고, 또한 부활을 한 곳이며 다양한 문화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죠.""
··· ···""
앞으로 루미너스 님께서 주신이 되어 떠나신다면, 세이비어 교국은 제논교를 신봉할 겁니다. 물론 루미너스 님을 믿는 분도 계시겠죠.""
허허······""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루미너스에게 제대로 당해버렸다."
내 딴에는 그에게 엿을 먹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건만 이런 식으로 돌아오다니."
100년은커녕 겨우겨우 50년조차 살지 못한 필멸자가 신을 이기려 든다니. 이것부터 잘못된 걸 수도 있다."
그래도 루미너스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들었다. 어찌 됐던 간에 무리수라는 건 변함이 없다."
······이 사실은 누가 알고 있죠? 아직 세상에 말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네. 혼란 방지를 위하여 내부적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할 예정입니다. 순례는 그 준비 단계고요.""
준비 단계?""
앞으로 세계는 세이비어 교국의 행동을 분석하려고 고민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채겠죠.""
으음······""
확실히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하다. 당장 전쟁의 신에서 예언 아닌 예언을 퍼뜨리지 않았는가."
다만 사람들은 루미너스가 주신이 된다면 어떻게 될지 거의 모른다. 그냥 내 예언만 믿고 따를 뿐."
그러니 현재 세이비어 교국이 보여주고 있는 순례는 일종의 떡밥 뿌리기다. 2년 전, 내가 팬사인회를 했던 것처럼."
'진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받아치는구나.'"
앞으로 깝치지 말아야지. 당분간 조용히 육아에만 집중하는 게 좋을 듯하다."
나는 벌써부터 아찔해질 상황에 피식거렸다가 케이트에게 물었다."
제가 직접 마중가야 하나요?""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순례라고는 하지만 루미너스 님께서 이 기회에 쉬다 오시라고 하셨거든요.""
휴가?""
가끔 높으신 분들도 휴가가 필요한 법이죠.""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만 신의 말씀이니 잠자코 따라야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루미너스가 주신이 되고, 내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 애매해지는 존재가 있다."
그렇다면 모라 님은요?""
모라 님이요?""
네.""
어둠과 안식, 그리고 평화를 관장하는 모라다. 그녀는 본인의 힘을 되찾아 본래의 차원으로 복귀했다."
복귀한 후에는 신자들을 보살펴 주느라 바빴다. 무려 1년이라는 기간동안 부재 중이었으니 바쁠만도 하다."
그래도 신자들의 성정 자체가 워낙 조용하고 일을 벌이는 걸 꺼려해서 회복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루미너스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모라 님의 위치가 상당히 애매지지 않나요?""
으음······""
내 말에 동의하는지 케이트가 입을 다물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루미너스가 원하는 방향대로 상황이 흘러가게 된다면 모라의 위치가 굉장히 애매해진다."
히르트의 쌍둥이 자식 중 하나이자 루미너스의 여동생. 그리고 최근에 밝혀질 사실에 따르자면 자식에 가깝다."
루미너스는 패륜을 저질렀기에 적당히 떠날 구실이라도 있지만 모라는 아니다. 그녀는 인류를 보호한 것밖에 없다."
게다가 보호하는 도중 전쟁의 여파에 휘말려 한번 죽었다. 이것만 본다면 희생 정신이 대단한 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루미너스 님께서 떠나시면 자연스레 그 자리를 제가 대체하겠죠. 이른바 세대 교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모라님께서는? 꽤 난감한 상황이지 않나요?""
그렇군요. 모라 님께서는 세대 교체를 할 명분이 루미너스 님보다 부족하니까요.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작 님도 좋은 분이고 모라 님도 좋은 분인데 어느 한 분을 싫어하는 건 이상하니까요.""
맞는 말이다. 어느 한 쪽만 믿기 애매하다면 둘 다 믿어버리면 그만이다."
하물며 모라 교단과 제논 교단이 추구하는 방향도 다르다. 어디에 집중할지 선택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지구에서도 비슷하지 않은가. 나라 차원에서 종교를 지향하는 게 아닌 이상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다."
당장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 다른 나라라 해서 다른 건 없다."
'마족은 수명이 기니 둘 다 사람이 더 많으려나?'"
쓸데없는 걱정일지도 모른다. 상징성 하나 때문에 종교가 망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래도 먼 미래를 위해 차근차근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중에 모라와 대화도 해야겠지."
알겠습니다. 이 문제는 차차 고려하는 게 좋을 듯하네요. 지금은 제 아이들에 더 신경 쓰는 게 좋겠어요.""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말이 나온 참에 제 차례는 언제쯤 오는 건가요?""
··· ···""
나는 눈을 반짝반짝거리며 기대하는 케이트에 쓴웃음을 지었다. 저 차례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 거다."
아델리아까지 출산하고 난 후부터는 다른 여인들이 서로 경쟁하러 달려들겠지. 법 개정으로 바쁜 리나도 예외가 아니다."
여기서 마리는 서로 싸울 바에야 차라리 전부 다 임신시키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도 대다수였고."
'그리 되면 저택이······ 어우.'"
빈말이 아니라 저택이 진짜 개판 5분 전으로 될 것이다. 그들을 수용하지 못할만큼 저택이 좁지는 않지만 난리도 아니다."
내 몸이 2개여도 부족하겠지. 그러니 적어도 '분신'을 생성할 수 있는 권능을 터득해야 된다."
'신들이 화신체를 만드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는데.'"
먼 과거 신들이 하계에 간섭하기 위해 자주 써먹었다던 화신 즉, 아바타."
이 능력을 얻는다면 적어도 육아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조만간 올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나저나······""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는 응접실이라 누가 들을 일도 없다."
대신 민감한 사안이다보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인간은······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그 인간이라함은······""
라오스요.""
내가 라오스를 언급하자 케이트의 표정이 잠시 안 좋아진다. 하기야 최악의 상황을 만들 뻔한 놈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라오스는 내 부활 당시 궤변만 들어놓고 질질 끌려갔다. 그 사건 하나로 테르스 왕국이 공화정으로 바뀌었고."
나비효과라 하기에도 파급이 너무 컸다. 그 후로 그는 '심문실'에서 심문을 받다고 들었다."
물론 시간이 흘러 까맣게 잊고 지냈다만 문득 궁금해졌다. 그 인간은 아직 살아있을까라고."
······그 벌레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살아도 살아있다 하기에는 애매하군요.""
직접 볼 수 있겠습니까?""
원하신다면 가능합니다. 어차피 교황청이 아닌, 이 영지의 신전에 있으니까요.""
라오스의 신변은 세이비어 교국이 아닌 우리 마이샬 영지의 신전에 있다."
루미너스와 모라, 마지막으로 나까지 떡하니 지켜보고 있는 마당에 누가 이상한 술수를 부릴 수 없도록."
물론 이건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에다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일상이 바쁜데 누가 누구를 신경쓰겠나."
라오스는 역사에 '인류의 배신자'로 기록되겠지만 정작 현실은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는 게 아니러니한 점이다."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자비를 베푸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