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격식을 차리고 인사해봐야 서로 어색해질 뿐이다."
나중에 제 작품 기대해주세요.""
기대하고 있으마.""
우리는 훗날을 기약하며 서로 헤어졌다. 작품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왕래를 하겠지."
[인류의 신, 제논. 새로운 작품 '전쟁의 신' 발매 예정.]"
[테르스 왕국의 여왕, 마리아. 라오스의 책임을 물어 왕실을 폐지할 것. 정리를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
[미네르바 제국을 비롯한 국가들. 1년을 주겠다. 전쟁으로 나라가 멸망하기 싫으면 스스로 책임을 져라.]"
[원래는 선전포고를 할 예정이었으나 제논의 자비로 1년의 유예 기간을······]"
하지만 해야 할 게 남았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신학자들. 제논의 신작이 완결되기 전까지 모든 연구를 중단할 것.]"
다사다난한 일이 발생하고,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모두 끝났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펜을 쥐었고 가족들과 단란한 생활을 보냈다."
[인류의 신, 제논의 '전쟁의 신' 발매. 루미너스를 비롯한 고대의 신들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
그나저나 어째서 나를 인류의 신이라 지칭한 건지 모르겠다."
문명의 신이라면 그나마 납득이라도 하겠는데 대체 왜일까."
이것 또한 루미너스가 나에게 던진 엿 중 하나겠지. 자기 혼자 편하겠다고 왜 이러는 거야."
[테르스 왕국. 자연스러운 민주주의 도입 결정. 의회를 바탕으로 투표를······]"
[애니머즈 왕국 또한 민주주의 도입에 탄력을 붙여······]"
[루미너스의 과거에 충격을 받은 독자들. 정녕 이 망나니가 루미너스가 맞는 것인가?]"
태풍은 한번 지나가면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법이다."
하지만 한번 지나가면 정말로 그 태풍이 존재했는지 의문일 정도로 고요하다."
지금이 딱 그렇다. 태풍이 언제 왔냐는 것처럼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물론 마이샬 영지에 한해서다. 다른 국가들은 난리도 아니더라."
[스타비르크에 신정부가 세워지다. 국교는 제논교.]"
[국교가 제논인 나라는 스타비르크가 최초.]"
[제대로 된 교리가 세워지지 않았으나 두 가지는 확실하다. 목소리를 내어라. 침묵하지 말아라.]"
겸사겸사 케이트가 뿌린 '씨앗'의 정체도 알게 됐다. 스타비르크에서부터 시작된 내 종교."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설명해줘도 케이트는 미소만 지어줄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여자도 루미너스와 한패인데 흉계를 정말 꾸미고 다닌다."
[밝혀진 만물의 아버지의 정체. 그의 이름은 히르트.]"
[만물의 아버지와 자연의 여신은 본래 한 몸이었다? 새로운 진실에 학계가 뒤집혀······]"
만물의 아버지의 진명을 밝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히르트는 이미 물리적인 형태가 완전히 사라졌으며, 의지 또한 사라졌다."
자연의 의지가 곧 히르트의 의지인 것이다."
[잔존하는 악마 숭배자들. 자연을 해치면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를 것이다!]"
[악마 숭배자에 심취했던 자들은 자연을 극단적으로 보호하는 자들로 바뀌어······]"
[이들을 심판해야 될지, 아니면 지켜봐야 될지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악마 숭배자들이 환경 운동가로 바뀐 건 좀 어이가 없더라."
진심으로 만물의 아버지를 숭배하는 자들도 섞여있었는데, 이들도 내 책을 보고 진실을 깨달았다나 뭐라나."
본인들이 저지른 죄는 신전에서 참회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
정말 웃긴 노릇이지. 하지만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어서 일단 가만히 지켜보기로 정했다."
이렇듯 각종 사건사건이 터지고 고생도 꽤나 했지만."
[전쟁의 신 완결편. 곧 발매.]"
2년이 흘러, 나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루미너스의 일대기이자 신들의 과거를 보여주는 책, 전쟁의 신."
모 유명 게임이 떠오르는 제목처럼 망나니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루미너스의 망나니 시절에 경악했다. 사실 나도 말로만 들었을 때 쉬이 믿지 못했다."
틈만 나면 사람을 해쳤으며 전쟁의 신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시시때때로 전쟁만 하고 다녔으니."
오죽하면 히르트마저 답이 없다 생각해 잠시나마 필멸자로 격하시켰을 정도로 개판이었다."
뭐, 그 덕분에 지혜의 여신을 만나 인격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이 발생했다."
[책을 아예 안 본 것보다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의 신념이 무섭다. 아이러니하게도 히르트 또한 그랬다.]"
[우연과 필연이 겹쳐 생긴 비극. 결국 필멸자는 물론이요, 신들 또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
[우리는 속죄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 자연을 해친다면 그 피해는 우리가 입는다.]"
모든 진실을 책에 담았기에 큰 혼란이 발생했지만, 무던하게 넘어갔다."
사람들은 2년 전, 내가 밝혔던 진실 덕분에 신들의 과오를 알고 있으며 나는 그걸 풀어준 거에 지나지 않았다."
[히르트에게 영향을 끼친 다른 세상의 신들. 그들은 누구인가?]"
[아버지, 죄를 짊어진 자, 깨달은 자. 이 세 명의 신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제논. 그들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을 것. 이건 신들과의 약속이자 규율이다.]"
히르트에게 영향을 끼쳤던 지구, 정확히는 신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지구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신들에 대해서는 조금 꺼려진다."
전에 지구의 최고신이 말했듯이 내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순간 지구의 식민지나 다름없어지니까."
식민지라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지만 지구의 영혼이었던 내 영향력이 가장 크니 그렇다고 봐야한다."
'그말이 식민지지 나는 그냥 중간관리직 아닌가?'"
지구의 신들과 소통도 해야 돼, 이 세상도 관리해야 돼, 바다 건너의 또다른 세상도 확인해야 돼."
할 게 많아도 너무 많다. 무엇보다 지금 더 큰 과업이 남아있다."
다다다다다!"
뛴다! 그레이스는 더 뛴다!""
그레이스! 어디 가니! 아리엘! 가서 그레이스 좀 잡아!""
응!""
이제는 아들이 아니라 아빠가 된 입장에서 자식들을 키워야 된다는 것."
나는 짧은 두 다리로 우다다 달리는 그레이스의 뒤를 열심히 쫒아갔다."
아리엘도 날개를 파닥거리며 열심히 쫒아가고 있지만, 기이하게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잡았다!""
이익! 이거 놔! 더 뛸 거야!""
휴우······""
그래도 짧은 다리의 한계로 겨우겨우 잡을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다."
2년이 흐르면서 그레이스는 말도 떼고 많이 컸으나 그건 아리엘도 똑같았으니까."
나는 아리엘의 품에 안겨 아둥바둥거리는 그레이스를 보며 엄하게 다그쳤다."
그레이스. 그러다가 다칠 수도 있는데 막 뛰어다니면 안 돼.""
그레이스는 안 다쳐. 더 뛸 거야.""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칠 거야.""
신화적 탄생을 알렸던 그레이스. 그녀는 시간이 흘러 미운 3살을 앞두고 있다."
물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빨빨빨 돌아다녀서 큰 의미가 없다. 말을 하는 순간부터 미운 3살 시작이다."
게다가 발할라에 있던 영혼이 깃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활동량이 어마어마하다. 쉬지 않고 말은 하는 건 덤."
할비! 할비 보러 갈래!""
어떤 할비? 아빠의 아빠 아니면 아빠의 할아버지?""
아빠 할아버지!""
또 때릴 거잖아.""
아리엘에게 안긴 그레이스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이렇게 두 명을 바라보니 정말 귀엽다."
아니. 안 때려.""
그러면?""
눈 찌를 거야!""
허허.""
그레이스가 해맑게 웃으며 말하자 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 순수악 그 자체 같은 면모를 보이는데 그레이스가 딱 그 예시다."
자기 딴에는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클라크 입장에서는 정말 곤혹스럽기 그지 없다."
안 돼.""
왜?""
그건 나쁜 짓이니까.""
할비는 괜찮다고 했는데?""
괜찮다고 말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낮잠 잘 시간이니까 슬슬 자러 가자.""
이잉······ 싫어! 더 놀 거야! 더 놀 거라고!""
낮잠 잘 시간이라고 알려주자 그레이스가 더 크게 바둥거렸다. 아리엘도 더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
이에 그레이스를 넘겨받고는 천천히 등을 두드려줬다. 그녀도 내 품이 편안했는지 점차 조용해졌다."
안 돼요. 그레이스는 착한 아이니까 아빠 말 잘 들을 거지?""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줘.""
뭐 먹고 싶어?""
딸기.""
그레이스는 유독 딸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한때 딸기가 없다고 하면 울고 불고 난리가 났었지."
지금이 여름인지라 딸기는 구하기 어렵지만, 희대의 사기땅을 가진 알븐하임이 있다."
아르웬에게 딸기를 부탁하면 언제든지 공수할 수 있을 것이다."
알았어. 나중에 딸기 사줄 테니까 지금은 자러······""
릴리! 어디 가니! 거기 서!""
그때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귀에 꽂혔다. 이건 세실리의 목소리다."
이에 나는 물론이요, 그레이스와 아리엘도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을 날고 있는 빨간머리 어린이와, 그 뒤를 다급히 쫒아가는 세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우와~ 난다! 날고 있어!""
나는 거 아니까 빨리 마법 취소하렴! 그러다 다쳐!""
우와. 릴리 이제 날 줄도 아네? 그레이스도 날고 싶다.""
··· ···""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레이스를 안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세실리는 마족 어린이를 간신히 붙잡아 품에 안아들었다. 안도의 기색을 보아 꽤 난감했던 모양이다."
세실리 누나.""
아. 아이작.""
내 부름에 세실리가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품에는 빨간머리에 빨간 눈을 가진 아이가 안겨있다."
당찬 여장부 같은 그레이스와 다르게 얌전해 보이는 아이. 특징점은 그녀의 머리에 작은 뿔이 세워져 있었다."
여러모로 세실리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것 같은 그녀의 이름은 릴리.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와 세실리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다른 릴리도 있긴 하다만······'"
모두 알다시피 아버지와 아머니 사이에 태어난 넷째 릴리도 있다."
동명이인인지라 구분하기 어렵겠지만 의외로 어렵지 않더라."
나라마다 특유의 억양이 존재하는데, 가족들은 그걸 통해 서로를 구분하고 있다."
아빠. 아빠. 나도. 나도.""
릴리가 나를 보자마자 작디 작은 팔을 뻗었다. 나에게 안기고 싶다는 반응이다."
이에 내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나에게 안겨있던 그레이스가 내 셔츠를 꽉 붙잡고 대꾸했다."
안 돼. 동생은 빠져있어. 아빠는 지금 내 거야.""
우으······""
그레이스의 당돌한 말에 릴리가 울먹거리며 손을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차오르는 눈물."
당찬 면모가 강한 그레이스와 달리, 릴리는 조금만 혼내도 울먹이는 성격이다."
우아아앙! 나도! 나도 아빠한테 안길래! 으아아앙!""
싫어! 내가 먼저 차지했단 말이야!""
흐아아아앙!""
한치의 과장도 없이 세상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리는 릴리. 진짜 서럽게 운다."
세실리가 어떻게든 달래주고 있다만 쉽사리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릴리. 엄마 품은 싫어? 아빠가 그렇게 좋아?""
아빠아아아!!""
이상하네. 보통 다 좋아하던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릴리를 달래주는 세실리. 나는 그 말을 듣고 말 없이 가슴 쪽을 쳐다봤다."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인지 전보다 더 커진 그녀의 흉부. 악마화를 하지 않아도 압도적인 크기다."
원래는 체리가 비등했으나 다시 세실리가 순위(?)를 가져간 상황이다."
······일단 그레이스부터 재우고 올게.""
알았어. 릴리? 엄마랑 잠깐 나갔다 올까?""
흐어어엉! 아빠아아아아!""
세실리가 릴리를 안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더욱 커지는 릴리의 곡소리."
손까지 뻗으며 어떻게든 나를 잡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쓴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헤헹. 오늘도 이겼다.""
······그레이스.""
왱?""
······아냐.""
동생을 이겨서 좋아하는 그레이스를 보면 애긴 애다. 나는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