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좀 더 일찍 갈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클라크 할아버지가 대충 설명을 하셨겠지만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다."
'상황이 모두 끝나면 무릎 꿇고 빌어야 하나?'"
내 잘못이 아니라 라오스 그 새끼가 저지른 일이라지만 걱정을 끼쳤으면 어쩔 수 없지."
이래나 저래나 여기서 나가야 된다는 변함이 없다. 그때동안 웅변 연습이나 할 예정이다."
'······그런데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잖아?'"
최고신에게 물어보기도 전에 여기로 끌려온 거라 애매하다."
'우선은······'"
현재 어떤 상황인지 추측부터 하자고 생각할 때였다."
쑤욱-"
어?""
내 몸이 어디론가 빨려들어가는 듯하더니."
쑤우욱!"
어, 어어?""
당황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
아이작이 만물의 아버지와 만남을 가지는 동안, 세상은 의외로 평화로웠다."
아이작의 실종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전세계가 뒤집어질 것이며, 그걸 예측한 마이샬 가문에서 비밀에 부쳤으니까."
팬사인회를 제외하면 워낙 신비주의에 가까웠던 아이작인지라 실종을 비밀로 부치는 건 의외로 쉬웠다."
하지만 마이샬 가문에 닥친 우울한 분위기만큼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세실리 님. 제논 축제가 곧 끝납니다.""
··· ···""
세실리 님. 아무리······""
나가주세요.""
케이트는 나가달라는 세실리의 부탁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아이작의 실종 이후, 정확히는 클라크가 본래의 몸으로 돌아온 이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현재 세실리가 머물고 있는 곳은 아이작의 침실. 그 침실에는 세실리뿐만 아니라 마리도 함께 있었다."
케이트 씨. 죄송하지만 안 될 것 같아요. 세실리는 지금 안정이 더 필요한 상황이고요.""
마리가 양해를 구하며 케이트에게 답했다. 그녀는 무기력하게 침대에만 누워있는 세실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세실리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더구나 아이작의 아이를 임신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
여기서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가는 최악의 결과가 터질 수도 있다. 그것만큼은 막기 위해 억지로라도 안정을 해야 된다."
······알겠습니다. 부디 몸 조심하시길.""
아. 가시기 전에 루미너스 님께서 남기신 말씀은 없으신가요?""
케이트는 그 말에 마리를 빤히 쳐다봤다. 마리는 걱정할지언정 슬퍼하지 않고 있다."
비극과 절망만 겪고 있는 세실리와 다르게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 모습."
마냥 슬퍼하는 게 아니라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두 행하고 있다."
어째서 그녀가 아이작의 진정한 안주인인지 절감시켜줬다."
······루미너스 님께서는 때가 되면 알 거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그 때라는 걸 모른다고 하셨죠.""
그런가요······ 저는 루미너스 님도, 모라 님도 신봉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두 분을 믿을 수밖에 없겠네요.""
마리가 씁쓸하게 웃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사랑하는 남편이 위험에 빠졌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물론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신들조차 아이작을 찾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말 그대로 아이작에게 내려진 시련이다.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를 믿는 것뿐."
'그 어벙한 애가 잘할 수 있을까······'"
마리는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와 함꼐 한 시간은 아이작의 부모형제 다음으로 많다고 자부할 수 있다."
세상이 아이작을 구원자라니, 선지자라니 떠들어도 그녀의 눈에는 어리숙한 남자일 뿐이다."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여도 자기 사람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남편."
그런 그가 사상 최악의 시련을 겪는다니 정말 울고 싶어졌다."
'아냐. 정신 차리자.'"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있다. 침대에 누워있는 세실리뿐만이 아니다."
아델리아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레오나는 클라크를 붙잡은 채 온갖 주술을 시도하는 중이다."
아르웬도 다를 게 없다. 처음에는 믿지 못해 마이샬 저택으로 날아왔다가 절망만 맛보고 있다."
그나마 나은 건 리나 정도. 그녀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제논 축제에 참가했다."
하지만 은연 중에 우울한 기색을 풍겨서 주변 사람의 걱정을 사고 있었다."
저택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 그 자체. 다행히 어찌저찌 수습하여 비밀이 새어나가지는 않았다."
'믿는 거야. 얼빵한 구석이 있어도 자기 사람을 슬퍼하게 만들지는 않았잖아.'"
마리는 왼손 약지에 끼여있는 반지를 매만졌다."
아이작은 가끔 답답한 면모를 보여도 타인을 슬프게 만들지는 않았다."
도리어 남을 대신하여 목소리를 내주고, 불합리함을 모조리 일깨워줬다."
대공황 당시에는 여러모로 말이 많았다만 진작에 터졌어야 할 거품이다."
그러니 믿자. 무기력하게 느껴지겠지만 믿음만큼 강력한 것도 없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도록 할게요. 케이트 씨는요?""
저는······ 루미너스 님의 말씀을 따를 겁니다. 아이작 님이 사라진 이상, 따라야 할 분은 루미너스 님밖에 없었으니.""
알겠어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원할게요.""
루미너스 님의 축복이 있기를.""
케이트는 마리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침실 밖으로 나섰다."
침실에는 마리와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세실리만이 남게 됐다."
마리는 세실리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날이······ 어둡네······'"
구름이 끼여있어서 그럴까. 축제의 활기찬 분위기와 다르게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다."
아이작은 언제쯤 다시 돌아오는 것일까. 정말로 돌아오기는 하는 걸까."
마리는 가슴이 실시간으로 타들어가는 느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 올 거야. 이 바보 같은 인간이.'"
그저 그런 마음밖에 없었다."
*****"
후우······""
침실에서 나온 케이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꼬인 수준을 넘어서 최악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 상황."
아이작의 실종으로 마이샬 저택은 침울함이 짙게 깔렸으며, 누구 하나 제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뭘 할 수가 없었다. 루미너스와 모라조차 아이작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으니."
그 말을 들었을 때 아이작의 가족 및 애인들의 반응은······ 부정적인 의미로 다채로웠다."
오죽하면 아이작의 어머니, 안나는 그 자리에 충격을 먹어 쓰러질 정도였으니까."
다행히 평소 건강을 챙긴 덕분에 아이가 유산되지는 않았으며 지금은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건가?'"
루미너스조차 기다리라는 지시만 내렸다. 때가 되면 알 거라는, 알 수 없는 예언만 남긴 채."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아이작을 찾고 싶다. 그러나 단서조차 없이 홀랑 사라진 거라 시작조차 못했다."
그나마 의심이 가는 건 테르스 왕국, 정확히는 라오스 왕태자다. 평소 아이작도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고 경계했으니."
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없었다. 일국의 왕자, 그것도 왕태자였기에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압박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시간'이 한없이 부족하다. 설사 라오스가 악마 숭배자여도 제논 축제가 이미 개최됐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벌일리가 없지.'"
아이작이 제논 축제를 노린 것처럼, 라오스도 제논 축제를 노린 게 확실하다."
더구나 노스라는 인물이 제논 축제 때 진실을 밝히겠다고 엄포했지 않았는가."
그 전에 아이작이 돌아와야 하는데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아······""
케이트 추기경 님.""
케이트가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진작부터 기척을 감지하고 있던터라 케이트는 뒤를 돌아봤다."
세이비어 교국측에서 온 성기사다. 현재 보좌관으로 활동하는 중이다."
네. 무슨 일이시죠?""
케이트 추기경 님께서 말씀하신 '그림'이 도착했습니다.""
··· ···""
그림이 도착했다는 전언에 케이트의 입가가 일자로 그어졌다."
원래라면 루미너스의 마지막 예언이 담겨있는 그림. 그러나 과연 그 예언이 실행될 지 모르겠다."
'······의심하지 말지어다.'"
케이트는 흔들릴 뻔한 믿음을 간신히 바로잡았다. 절망은 나중에 느껴도 된다."
이에 그녀는 최대한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성기사에게 명령했다."
그 그림을 예정된 곳으로 가져와주세요. 그 후로는 제가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아이작이 진실을 밝힐 시간도 잡혀있었다."
그러나 실종된 이상 노스가 그 자리에 대신 올라서겠지."
그 후로는······"
저······""
으힉!""
케이트가 상념에 잡혀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성기사와 다르게 기척조차 잡히지 않았던지라 케이트조차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추스리며 뒤를 천천히 돌아봤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체리?""
체리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두컴컴한 안광을 갖고 있는 그녀."
체리는 두 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작 오빠는······ 아직 안 오신 건가요······?""
아······""
케이트는 그 물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체리도 다른 사람 못지 않게 슬퍼하고 있다."
아이작과 이어지면서 조금이나마 밝아졌던 눈이 다시 어두컴컴해진 걸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케이트는 체리와 동시에 아이작과 이어졌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더욱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아직 들리는 소식은 없네요.""
···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단지 눈이 더 죽어버렸을 뿐."
케이트는 더 심각해질 것 같은 분위기에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작 님이라면 분명히 돌아오실 겁니다.""
······정말······ 인가요······?""
네. 아이작 님께서는 저희를 두고 떠날 분이 아닙니다. 분명······""
순간적으로 목이 매인다. 케이트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이러다 정말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돌아오지 않고 결국 악마 숭배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간다면?"
그리 된다면 자신의 믿음은 무엇이 되는 것인가. 아무 의미 없는 믿음이지 않은가."
그러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케이트는 간신히 억눌렀다."
모두가 믿지 않을 때 믿어야 하는 것이 성직자로서의 사명."
이에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체리에게 말했다."
분명 돌아오실 겁니다.""
케이트는 난생 처음으로."
분명······ 돌아오실 거에요.""
믿음이 흔들렸다."
날씨가 우중충하다지만 제논 축제는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