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 사원을 보호하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
그 누군가는 만물의 아버지일 테고. 다시 말해 이 사원이 만물의 아버지가 봉인된 장소라는 뜻이다."
과연 이 사원 깊숙한 곳에 만나게 될 만물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우선 껍데기는 알고 있다."
전에 모건 왕이 말해준 것처럼, 그는 만물의 아버지와 만나 패배했다고 했으니."
모건 왕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이 사원 깊숙히 존재할 것이다."
이건······""
음······""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안으로 진입할 때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와 클라크는 그걸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원이었으니 그 안에 그 신과 연관된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표적인 예로 바로 눈 앞의 벽화다. 나는 잠시 몸의 통제권을 가져오고 벽화 쪽으로 다가갔다."
창조와 관련된······ 벽화인 모양이네요.""
벽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우선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비가 쏟아져 내리고, 그 비가 '바다'를 창조한다."
바다는 명확한 '기준'으로써 대지와 구분되고, 그 대지 위에 새로운 '자연'이 돋아난다."
뒤이어 바다와 자연이 태어나면서 등장하게 된 어느 한 인물. 그러나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사람 형태에서 빠져나온 것들이 각각 태양과 달이 되어 세상을 비추었다. 저건 루미너스와 모라겠지."
'만물의 아버지인 건 알겠는데······ 어째서 히르트 님이 안 보이는 거지?'"
바다에서 등장한 최초의 존재는 분명 만물의 아버지다."
바다를 통해서 '대지'와 서로 구분되기 시작했으니 자연의 어머니, 히르트도 등장해야 할 터."
하지만 자연의 어머니와 관련된 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자연 그 자체다보니 따로 묘사하지 않은 걸 수도 있다."
'불과 관련된 건 달로스일 거고, 인간과 동물을 창조한 건 네카. 그리고······'"
벽을 따라 수많은 벽화들이 존재했다."
루미너스로 추정되는 존재가 전쟁을 치르는 벽화도 있고, 아버지에게 벌을 받아 필멸자로 추락하는 장면도 있다."
그곳에서 지혜의 여신과 만나게 되어 정신을 차리는 장면까지. 적어도 이때까지는 이야기로서 존재한 모양이다."
'아직 문자가 발명되지 않은 시대였나?'"
다만 벽화와 다르게 문자로 추측되는 건 보이지 않았다."
인류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까지 그림을 주로 사용했다. 이 벽화가 바로 그 예시고."
나는 벽화를 따라 쭈욱 따라갔다. 혹시라도 모를 사태를 대비해 긴장의 끈은 놓지 않았다."
이거는······""
너희 세상의 신들인 모양이구나.""
놀랍게도 지구의 신으로 추측되는 존재들도 등장했다."
총 3명의 존재들이었는데, 한 명은 빛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반면 다른 둘은 묘사가 확실했다. 한 명은 곱슬머리 비슷한 머리를, 다른 한 명은 구불구불하면서도 축 늘어진 머리였으니."
그들은 만물의 아버지와 만남을 가지면서 서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기애애하기 그지 없다."
따라가는구나.""
그러게요.""
만물의 아버지는 세 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흡사 현장체험학습을 하러 떠나는 학생처럼, 만물의 아버지는 신들에게 배웅을 받으며 지구로 떠났다."
하지만 이것의 비극의 시작이라는 걸 누가 알았을까. 다시 돌아온 만물의 아버지는 지구의 사상에 감회된 상태다."
'그래도 필멸자들은 잘 보살폈구나.'"
인류를 리셋시켜야 된다는 마음가짐과 다르게 만물의 아버지는 세상을 잘 다스렸다."
언쟁은 오직 신들 사이에서만 일어났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에 이어진 인류의 악행만 아니었다면. 나는 다음 벽화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산에 불을 지르고, 동물을 학살하고, 바다에 온갖 오물을 버린다라······'"
자연을 능욕하는 장면이 아주 제대로 묘사됐다. 이들은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물론 신을 이기겠다는 마음을 저지른 것일 수도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인간도 여러 막장짓을 저질렀으니."
아무튼 이 일로 인해 만물의 아버지는 제대로 격노하고, 세상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된다."
······여기가 끝이구나.""
그러게요.""
벽화의 끝부분은 멸망과 깊이 연관돼 있었다."
만물의 아버지와 루미너스가 서로 무기를 겨누며 대치하는 장면이었으니."
그 이후가 묘사되지 않은 건 세상이 멸망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는 벽화의 끝을 보며 여운에 잠겼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이 사원만 바닷속에 잠겨있는 걸까요?""
너희 세상에는 바닷속에 잠긴 사원이 없느냐?""
아틀란티스라고, 전설로나마 존재하는 고대 유적이 있긴 있어요. 어디까지나 전설이지만.""
이런 경우는 지각 변동으로 인해 어떤 대지는 솟아오르고, 어떤 대지는 가라앉았기 때문일 터."
바닷속에 유적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고고학자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지 않을까."
물론 그 전에 전부 만물의 아버지에게 세뇌당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벽화를 뒤로 하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
말하렴.""
어째서 만물의 아버지 혼자만 나오는 걸까요? 히르트 님은 보이지도 않고.""
벽화를 보면 만물의 아버지 혼자만 등장하지, 자연의 어머니 히르트는 등장하지 않았다."
아까 말했듯이 히르트는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하기에 그런 걸 수도 있다. '능동성'이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예 안 나오는 건 뭔가 이상하다. 한 번이라도 등장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다."
네가 생각한대로 자연 그 자체이기에 묘사할 필요가 없던 거겠지.""
으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넘어가자구나. 우린 서두를 필요가 있다.""
하기야 그것도 그렇지.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건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다급히 정신을 차리며 사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으스스한 기운이 강해졌다."
철퍽- 철퍽-"
또한 기이하게도 물웅덩이가 많아졌다. 입구는 깨끗하기 그지 없는데 안은 웅덩이가 간간이 존재했다."
짜디 짠 냄새가 코를 찌르는 걸 보아하니 바닷물로 추측된다. 신기하게도 썩은물은 아니다."
여러모로 기형적인 사원 내부에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쯤, 어느 순간 넓디 넓은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건······""
음······""
그리고 바로 눈 앞에 문어인지 오징어인지 헷갈리는 생물이 쓰러져 있었다."
평범한 해양 생물이었다면 놀라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눈 앞의 생물은 매우 거대했다."
내가 도착한 공간의 거의 축구장만한 크기를 자랑했는데, 저 바다생물은 그 반을 차지할 정도였으니까."
전설로나마 전해지던 거대 괴수, 크라켄이 내 앞에 떡하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클라크는 크라켄을 보며 침음성을 흘리더니 조용히 걸어가 세세히 살펴봤다."
······부패를 보아하니 꽤 오래 전에 죽은 모양이구나.""
크라켄은 생명을 잃은지 오래 된 모양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
도대체 이 크라켄을 죽인 사람은 누구인 건가. 정말 전설대로 내 선조 중 한 명이 쓰러뜨린 건가."
클라크는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위해 크라켄의 구석구석 살펴봤다. 크기다 크기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도끼?""
머리에 도끼가······ 제대로 꽂혀있구나.""
크라켄의 머리 부분에 웬 거대한 도끼 하나가 정확히 꽂혀있었다."
분명 시간이 오래 흘렀을 텐데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배틀 액스."
아무래도 크라켄은 저 일격을 맞고 쓰러진 모양이다."
'······이 가문은 대체 어떻게 돼 먹은 가문이지?'"
크라켄을 쓰러뜨렸다는 전설이 실화였다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납득이 된다."
역사에 이상한 일이 생겼을 때 마이샬 가문을 집으면 90% 정도는 맞겠지."
나와 클라크 할아버지는 쓰러진 크라켄을 뒤로 한 후, 그가 막고 있던 뒤쪽을 살펴봤다."
크라켄은 일종의 수문장 역할을 했었는지 뒤쪽의 거대한 문을 막고 있었다."
어우. 썩은내.""
문으로 향하기 위해 크라켄 가까이 다가가니 썩은내가 진동했다."
시체 특유의 썩은내와 물 비린내가 합쳐지니 참기가 어렵다. 그에 서둘러 살짝 개방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문 안으로 들어오게 되자."
[왔구나.]"
아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끼이익- 쿵!"
문이 굳세게 닫혔다."
쿠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칠흑 같은 어둠이 시야를 가렸다."
진짜 아무것도 안 보인다. 분명 야시경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오직 어둠뿐이다."
이게 무슨······""
··· ···""
나는 물론이요, 클라크 할아버지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건강한 신체도 있는데다가 클라크 할아버지의 기술이 더해졌는데도 이 어둠은 빛을 모조리 삼켜버렸다."
그리고 이런 짓을 저지를만한 존재는 딱 하나밖에 없다. 나에게 말을 걺과 동시에 문을 굳게 닫아버린 자."
[언제는 당당히 입을 놀리더니 지금은 조용하구나.]"
머릿속이 아니라 공간 전체에 울려퍼지는 누군가의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어올리거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등. 최대한 긴장 태세를 유지하며 준비했다."
무력으로 승리를 점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공간 자체가 만물의 아버지에게 지배를 당했을 테니."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기 위해서 클라크 할아버지를 부른 게 아닌가."
어디 그때처럼 입을 놀려보거라!""
쿵! 쿵! 쿵!"
만물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이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에 내가 아닌 클라크 할아버지가 다급히 등을 돌렸다. 지금은 그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좋다."
부웅!"
등을 돌리자 눈에 들어오는 건 다름아닌 거대한 도끼였다."
내가 손으로 쥐고 있는 한 손 도끼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배틀액스."
저걸 그대로 받아냈다가는 머리가 쪼개질 가능성이 높다. 클라크도 그걸 깨닫고 뒤로 풀쩍 물러갔다."
"쾅!"
허공을 가른 도끼가 땅바닥에 꽂혔다. 단순한 일격임에도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나는 기습을 가한 남자의 모습을 파악했다. 우선적으로 든 생각은 단 하나, 크다."
기골이 장대한 아버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며 그에 따른 체격도 굉장한 수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암흑 속에서도 그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다."
저 사람은······""
······모건 왕이구나.""
영혼 상태로나마 존재를 유지하고 있던 모건 왕과 똑같은 외양이다."
전에 모건 왕은 만물의 아버지에게 육체를 빼앗겼다 말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생전의 모건 왕이 등장하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약간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전혀 부패하지 않았잖아?'"
마이샬 가문 특유의 붉은 머리카락. 사막 기후 특징 때문인지 구릿빛에 가까운 피부."
옷이야, 넝마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으나 그 안에 보이는 근육들은 여전히 생동감이 넘쳤다."
특히 거대한 배틀액스를 잡고 있는 두 손. 보통 무인에게 상처가 많은 부위가 손인데 매우 멀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