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렸던 균형을 최대한 맞잡은 후, 땅바닥이 발과 닿자마자 무릎을 굽혔다."
무릎을 굽힌 후에는 앞으로 몸을 굴렸다. 수십 번 이상 훈련했던 낙법의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었다."
으으······""
그러나 낙법과 별개로 몸이 축 쳐진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머리카락이 제일 문제다."
안 그래도 무거웠는데 바닷물에 푹 적셔진 나머지 더 무거워진 느낌이다."
우선 되는대로 머리와 옷의 물기를 최대한 짜냈다. 강한 악력 덕분에 어느 정도 무게가 덜어졌다."
비록 바닷물 특유의 찜찜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으나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나저나 여기는······'"
옷과 머리를 대충 정리한 후에는 주위를 둘러봤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으나 윤곽은 체크할 수 있었다."
'사원······ 인가?'"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확인한 결과, 이곳이 어떤 '사원'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오래된 구조물로 추측되는 사원. 곳곳에 파손된 흔적이 많았으며 멀쩡한 곳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틀 자체를 유지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사원이라는 것도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거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사원도 사원이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외양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뒤이어 전보다 훨씬 선명해진 시야를 얻을 수 있었다. 아침에 준할 정도의 밝기다."
이 기술 또한 아버지로부터 얻은 기술 중 하나다. 어두운 밤중에도 수월히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술."
건강한 신체를 얻고나서 육체와 관련된 기술은 수월히 습득할 수 있었다."
'······나무?'"
아까 전보다 훨씬 밝아진 시야로 또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사원 뒤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솟아있다. 바다 속의 사원과 그 뒤의 나무라니."
도통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선 이 사원이 일종의 신전 역할을 했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이 사원은······'"
분명 만물의 아버지를 숭배하던 사원이겠지. 이건 분명하다."
나는 앞에 보이는 사원과 거목을 뒤로 하고 주위를 좀 더 세세히 둘러봤다."
바다 밑에 잠겨있는 사원의 크기는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구조 자체는 고대에 나올 법했다."
사원을 중심으로, 네모반듯한 외양. 사원의 형태도 제물을 바치러 올라가기 위한 계단식에 가깝다."
'저기에도 나무가 있네.'"
사원의 끄트머리를 상징하는 건지 저 멀리 나무가 올곧게 솟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만물의 아버지는 바다를 관장하는 신일 텐데 어째서 나무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히르트가 아내였기에 나무를 심은 걸 수도 있겠지."
'······일단 만나러 가야하나.'"
저 사원 안에 누가 있는지는 뻔하디 뻔하다. 바다로 가라앉기 직전의 목소리도 그렇고 분명 그 신이겠지."
이런 일을 저지른 이상 결판을 내야겠지만 동시에 의문이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지구의 신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지난번 현자의 함정에 빠졌을 때도 부처님이 여래신장으로 제압했지 않았는가."
이를 보았을 때 만물의 아버지가 나를 해한다면 지구의 신들이 난입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쩌면······'"
지구의 최고신이자 '아버지'라고 부르는 존재가 등장할 수도 있겠지."
혹시 저쪽에서도 남겨놓은 패가 있는 것일까."
나는 여기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사원의 입구를 보다가 목을 더듬거렸다."
다행히 바다로 가라앉는 동안에도 빠지지 않았는지 세계수의 새싹과 조합된 목걸이가 걸려있다."
'여기서 쓰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세계수의 새싹을 떼어낸 후 그대로 입 안에 넣었다. 입 안에 넣자 청량한 감각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최후의 최후까지 아끼려고 했지만 사태가 심각하다보니 곧장 실행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참 많은 일이 있어보이는구나.]"
익숙하디 익숙한 목소리가 뇌리에 울려퍼졌다."
레오나의 주술로 일시적으로나마 몸을 공유할 수 있는 클라크 할아버지의 목소리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특수한 공간이라 안 될 줄 알았다."
'지금 제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시죠?'"
[그래. 꽤 거지 같은 곳에 있는 것 같구나.]"
'여기가 어디인지 아세요?'"
[나야 모르지. 유추는 되지만.]"
클라크 할아버지는 사원의 정체를 몰라도 어디인지 직감한 모양이다."
뒤이어 내 몸을 움직이는 그가 허리춤을 뒤적거리더니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던 손도끼를 꺼냈다."
말 그대로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는 거라 전력을 내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그의 경험이다."
[지금 저택은 난리가 났다. 네가 실종된 지 벌써 사흘이 넘었으니까.]"
'······사흘이요? 전 텔레포트하자마자 여기였는데?'"
사흘이 넘었다는 소식에 당황했다. 대체 여기는 어디길래 그만한 시간이 흐른 건지."
어쩌면 텔레포트조차 오래 걸릴 정도로 먼 거리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내가 그만큼 바다에 가라앉았다던지."
'제 애인들은 어떻죠? 제가 살아있다는 것만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너와 연동이 되자마자 미리 알려줬다. 다들 내가 언제쯤 뼈다귀로 변하나 지켜보더구나.]"
클라크는 잡담은 그만하고 이 이상한 곳부터 빠져나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게 뻔했다.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끌어당긴 것부터 답이 나온다."
[······그럼 결국 저기에 들어가야 된다는 거니?]"
'아마 그렇겠죠.'"
[자살 행위에 가까울 거다.]"
'제가 안 들어가면 저쪽에서 강제로 끌어들일 걸요?'"
[후우······]"
일리 있는 말에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클라크."
내 입에서도 한숨을 푹 터져나오는 걸 보아 어지간히 답도 없는 상황인 모양이다."
이어서 그는 복잡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짜증이 제대로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터 해결하고 생각하자구나. 테르스 왕국 쪽에서도 이상한 일이 터졌으니.""
무슨 일이요? 그 새끼들이 또 무슨 짓을 했길래?""
내가 말해놓고 내가 질문하니 약간의 괴리감이 느껴진다."
노스라고 알고 있느냐?""
노스라면······""
알다마다. 피와 강철 연재 당시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던 소설가."
그러나 피와 강철이 워낙 맛이 가버린 전개(고증)을 자랑한 덕분에 예언가로 떠오른 인물이다."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자잘한 막장 전개(고증)이 튀어나오자 결국에 백기를 들었던 사람."
네가 밝히려던 진실이 무엇인지 눈치챘다며, 제논 축제 때 밝히겠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공교롭게도 네가 실종됐지.""
제가 없는 자리를 노스로 채우려는 거군요.""
그래. 그 인간도 예언가라며?""
반장난식의 예언가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속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물론 저것들 전부가 거짓말이라며, 믿을 수 없다며 가족들이 먼저 나서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물증이 없는 상황이며, 무엇보다 그 진실이 전해줄 충격은 '거짓'을 덮을 수 있다."
말이 길어졌구나. 일단 사원 안으로 가마.""
조심하세요.""
당연히 네 몸인데 조심해야지.""
쓰잘데기 없는 농담을 하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워낙 긴장되는지라 가슴이 거칠게 요동쳤다."
[빨리 오거라.]"
사원에 진입하려는 찰나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목소리."
나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몸의 통제권을 뺏어버렸다. 내 두 다리가 멈췄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냐?""
··· ···""
하지만 클라크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다. 한 몸에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있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저쪽에서 육체가 아닌 '정신' 쪽으로만 메세지를 전달한 것 같다."
나는 클라크의 질문에 입을 우물거렸다가 작게 대답했다."
······저쪽에서 빨리 오라네요.""
··· ···""
그 말에 내 몸의 통제권을 되찾은 클라크가 앞으로 움직였다."
사원 뒤로 높게 뻗은 거목이 그렇게나 으스스할 수가 없었다."
만물의 아버지의 부름을 뒤로 하고 사원 안으로 들어선 나와 클라크 할아버지."
손에는 작은 손도끼 한 자루를 꼭 쥐고 있었으며, 혹시라도 모를 사태에 대비해 주변을 경계했다."
······손자야.""
네?""
사원 안을 걸어가는 도중에 클라크 할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몸을 공유하다보니 내가 질문하고 나 스스로 대답하는 꼴이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너무 긴장하고 있는 거 아니니?""
그리고 몸을 공유하고 있는만큼 클라크 할아버지도 내 몸 상태가 어떤지 확인할 수 있다."
속마음까지는 알기 힘들어도 지금 내 몸이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는 것정도는 알 수 있을 터."
하지만 긴장도 조금만 하는 게 좋지, 나처럼 심장이 터질듯이 뛴다면 누구라도 '쫄았다'라는 걸 알 수 있다."
할아버지.""
오냐.""
전 이런 거 진짜 싫어해요.""
나는 클라크 할아버지의 핀잔 아닌 핀잔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처음으로 게리오스 왕궁으로 진입했을 때, 전저도 없이 튀어나오는 유령들을 보며 까무러쳤다."
옆에 케이트가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입조차 못했겠지."
허. 창조주를 상대로 겁박까지 하는 놈이 이걸 무서워 해?""
적어도 신께서는 깜짝깜짝 놀래키지는 않잖아요.""
내가 공포 게임이나 공포 영화를 끔찍히도 싫어하는 이유가 있다."
잔인한 건 괜찮은데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걸 싫어한다. 따로 명칭이 있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
콰르륵!"
으힉?!""
클라크 할아버지와 대화하면서 걷고 있을 때 이상한 소리가 귀에 박혔다."
나는 그 즉시 몸을 움츠리며 제자리에서 멈췄다. 워낙 긴장하고 있던지라 사소한 소리만으로도 깜짝 놀란다."
뭐, 뭐였죠?""
······그냥 돌무더기가 무너지는 소리. 어휴.""
내 질문에 클라크 할아버지가 한심함을 담아 알려줬다. 어지간히도 한심했는지 한숨까지 내쉰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당당하게 나가고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영웅'과 거리가 한참 멀다."
행적과 능력으로만 따지자면 영웅이 맞는데 공포에 취약하달까. 심성이 약하다고 봐야겠지."
내 기척에 잡히는 건 하나도 없으니 너무 무서워하지 마려무나.""
네······""
참고로 귀신은 기척 감지로도 못 잡는다.""
말하지 마시지······""
우리는 서로 상반된 마음을 지니며 사원 깊숙한 곳으로 진입했다."
사원은 전형적인 사원의 형태를 띄고 있었으며 동시에 익숙했다."
멀리서 봤을 때도 그렇고 가까이서 봤을 때도 그렇고 알븐하임에서 얼핏 본 것 같다."
알븐하임 관저에서 본 거랑 비슷하네요. 거기는 루미너스 님과 모라 님을 모시고 있었지만요.""
다른 건 없느냐?""
수 천년 아니, 어쩌면 만년 이상 동안 잠들어 있었을 텐데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신기해요.""
어지간한 구조물은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100년조차 제대로 버티지 못한다."
하물며 그것이 고대에 지워진 건축물이라면 바람에 풍화되거나 비에 침식되거나 등등."
다양한 이유로 무너져야 정상인데 이 사원은 그렇지 않다. 더구나 여기는 바닷속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