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736)화 (737/763)

 히리야의 근황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때 라오스가 문을 열었다."

 알현실 같은 곳이 아니라 귀빈을 맞이하기 위한 응접실."

 나는 응접실의 문이 열리자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러분.""

 허스키하면서도 다소 힘 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짧게 자른 단발 머리가 아닌 허리까지 내려오는 하늘색 장발."

 제복이 아니라 화려한 푸른색 드레스. 아름답게 치장된 장신구."

 여기에 단연코 눈에 띄는 건 외모였다. 그간 마음 고생이 심했다는 걸 증명하는 다크 서클."

 뺨이 움푹 들어간 건 아니지만 살이 상당히 빠져버려 턱선이 매우 날카로웠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외모는 가릴 수 없어서 퇴폐미를 부가한 듯한 느낌이다."

 ······설마 히리야 왕녀님?""

 테르스 왕국에서도 보지 못했던 여인의 모습에 설마하며 물었다."

 내가 알던 히리야는 아델리아처럼 당당하면서도 '기사'에 어울리는 품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 앞의 여자를 보아라. 기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천상 여자만 남아있다."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건 상관없다. 도리어 퇴폐미를 풀풀 풍기고 있었기에 색다른 매력을 뿜내고 있다."

 정말 히리야 왕녀님이세요?""

 네······""

 ··· ···""

 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히리야는 본래 무학과 조교를 맡을만큼 대단한 실력을 지닌 기사였다."

 비록 아델리아에게 너무나도 쉽게 털렸지만 이건 아델리아가 강한 거지, 히리야가 약한 건 아니다."

 애시당초  아델리아를 향한 열등감과 방심으로 패배한 케이스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굉장히 강하다."

 실례지만 히리야 님께서는······ 기사를 포기하신 건가요?""

 네······""

 ··· ···""

 하지만 그렇다 해도 끝까지 기사를 포기하지 않은 히리야였다."

 도리어 그것을 빌미로 나에게 앵기다가 뺨 한 대 시원하게 얻어맞았지."

 결국에 그것이 커지고 커지는 바람에 강제 커밍 아웃을 하게 됐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충분히 재능이 있으신데 왜······""

 저, 저는 괜찮아요······! 제가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 ···""

 내가 딱하다는 듯이 묻자 히리야가 화들짝 놀라며 급히 손을 내젓는다."

 전과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행동 양상과 비관적인 성격.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려 아델리아를 쳐다봤다."

 가족 취급을 해주지 않았더라도 혈육은 혈육이었을까. 아델리아는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누나가 진짜 착하긴 착하구나.'"

 자신을 모질게 대한 것도 모자라 학대까지 가했던 히리야다."

 보통 같으면 쌤통이다라는 반응을 보였겠지. 그런 반응을 보여도 나는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델리아는 아니다. 비참한 가정 환경 속에서 정을 갈구하던 때가 떠올랐는지 안타깝다는 표정이다."

 실제로 한때 히리야는 아델리아를 꽤나 따른 걸로 안다. 사춘기에 접어들고 주변인의 멸시 때문에 바뀐 케이스지."

 너무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제논 님. 제 딸아이도 충분히 자책하고 있으니까요.""

 테르스 왕국의 양심 중 한 명이자 군주, 마리아 여왕이 엄격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마음 고생이 심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위를 넘겨받자마자 온갖 사건사고가 터졌지 않았는가."

 당장 대공황만으로도 때려치우고 싶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나는 마리아 여왕이 아닌, 옆에 앉아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특유의 하늘색 머리카락과 멋드러지게 기른 하늘색 수염까지."

 아델리아의 친부이자 마리아 여왕의 국서인 프리드리히."

 혁명이 터지기 직전에야 아델리아에게 사과를 한 인물이며 그 안에 진심을 담지 않았던 남자."

 여러모로 인간으로서의 됨됨이가 부족했지만 자기가 인정한 가정에는 충실했던 그도 약간 달라져 있었다."

 ······프리드리히 국서님?""

 예. 말하십시오.""

 살이 조금······ 아니, 많이 빠지신 듯한데······""

 못 본 사이에 프리드리히 국서도 얼굴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살집도 적당히 붙어있고 몸 관리를 잘한 중년 아저씨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히리야처럼 살이 쏙- 빠져버려서 중년간지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젊었을 적의 편린이 묻어나온달까. 오죽하면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최근에 일이 너무 많은 나머지 저도 고생을 했습니다. 국서가 되었다지만 업무를 아예 안 보는 게 아니거든요.""

 아. 그렇군요.""

 물론 최종권한은 부인에게 있습니다. 제 역할이 업무에만 치중된 것도 아니고요.""

 그거랑 살이 빠진 거랑 무슨 상관이······""

 나는 말을 하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마리아 여왕이 부드러이 웃으며 나를 쳐다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마리아 여왕도 피곤해 보일 뿐이지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피부의 탄력이 젊은이 못지 않았다. 이를 보았을 떄 유추되는 건 하나다."

 비록 이이가 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를 향한 마음은 진심이랍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더이상 물을 필요는 없겠네요.""

 그러고 보니 프리드리히는 세간에 로맨티스트라 알려졌다."

 게다가 아델리아를 제외하면 무려 4남매를 낳았다."

 그 이상도 가능했지만 마리아 여왕의 몸을 고려해 자중한 거라고."

 '그래봤자 남자답지 못한다는 건 변함이 없지.'"

 저런 식으로 마리아 여왕에게 죗값(?)을 치를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시원하게 인정했으면 어땠을까."

 다사다난한 사건사고들이 터졌겠지만 결과가 이리 되지는 않았겠지. 물론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다."

 더 나아가 그리 됐다면 내가 아델리아를 만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저희 테르스 왕국은 어떠셨나요? 왕궁을 방문한 적은 있어도 백성들과 만나는 경우는 잘 없으셨잖아요.""

 음······ 예술가의 나라다보니 개성이 넘치는 분들이 많으셨습니다. 특히 좌 히틀러, 우 스탈린 조각상이 인상 깊더군요.""

 아. 그걸 보셨군요.""

 실례지만 누가 그런 계획을 세웠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임팩트 하나로 따지자면 히틀러·스탈린 조각상이 제일 인상 깊다."

 하지만 전에 내가 가급적이면 자중하라고 했을 텐데 조각상까지 제작한 걸 보면 뭔가 이상하다."

 일부러 나를 엿 먹이기 위해 그런 건 아니다. 당장 팬사인회가 진행되는 건물에서도 수많은 조각상들이 배치돼 있었으니까."

 마리아 여왕은 내 질문에 아, 하며 탄식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희 왕실에서는 자중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평민 의회 쪽에서 검열이라며 반발했죠.""

 평민 의회라면······""

 제이로스 혁명 이후 등장한 의회입니다. 저희 테르스 왕국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잡을 기관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거라면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테르스 왕국의 예술가들과 평민 의회는 '검열' 한 마디만으로 발작하는 편이다."

 게다가 그 변태들을 생각하면 이것 또한 예술이라며 강제로 집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네요. 대신 사상이나 그들의 행적을 미화시키는 행위만 방지해주세요. 특히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더욱이.""

 명심하겠습니다. 아참. 테르스 왕국이 마지막이라 하셨는데 벨루아 공국도 방문하셨나요?""

 네. 방문했습니다.""

 실례지만 올리비아가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딸을 가진 어머니로서 걱정되서요.""

 아무 문제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하고 있더군요.""

 이후로는 별다른 문제 없이 대화가 수월하게 진행됐다."

 마리아 여왕과 내 주도 아래에 다른 사람들도 중간중간 대화에 낄 수 있었다."

 특히 라라가 종달새처럼 재잘재잘거릴 때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 채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유독 침묵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알다시피 라오스 왕태자다."

 히리야조차 가끔씩 몇 마디 나눈 반면 라오스 왕태자는 미소만 지을 뿐,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라오스 왕태자님.""

 말하게.""

 내 부름에도 여전히 하대조로 답하는 라오스."

 마리아 여왕조차 존댓말로 대하는 마당에 그는 끝까지 말을 놓고 있었다."

 이에 마리아 여왕이 그를 사납게 흘겨보고, 프리드리히 국서조차 불편한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라오스 왕태자가 수상쩍은 행적을 보여주다보니 부모조차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혹시나 하는 말씀이지만 이런 자리가 불편하신 건가요?""

 그럴리가 있겠나. 단지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거라네.""

 할 말이 없다라······""

 할 말이 없기는 무슨 꽁꽁 숨기고 있는 거겠지. 나는 말을 흐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라오스를 부른 순간부터 무거운 침묵이 응접실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제가 싫으신 건 아니고요?""

 ··· ···""

 뒤 없는 질문에 라오스의 미소가 사라졌다. 동시에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자리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저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치도 못했다는 반응이다."

 어찌저찌 미소 짓는 얼굴로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미 다 들통난 상황."

 나는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지닌 채 입을 열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죠. 이해는 합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와중에 저라는 사람이 끼어들었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만? 자네가 왜 끼어들었다 생각하는 간가?""

 그런가요? 제 착각이었나 보네요.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지만.""

 ··· ···""

 라오스가 악마 숭배자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심증이다."

 하지만 방금 전의 대답으로 그 심증이 더 깊어졌다. 사실상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걸 자백한 꼴이다."

 ······보아하니 아델리아와 관련된 걸 말하는 모양이군. 나는 말장난을 할 생각이 없다네.""

 그러시겠죠. 어차피 여기서 뭘 할 수도 없을 테고요. 아, 기왕 말 나온 김에 아델 누나에게 사과라도 하는 건 어떠신가요?""

 ··· ···""

 무릎까지 꿇은 프리드리히와 다르게 라오스 왕태자는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모두가 보는 눈 앞에서 무릎 꿇고 아델리아에게 사과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겠지. 게다가 사실상 엎드려 절 받는 식이라 나도 원하지 않았다."

 농담입니다. 사과는 이미 받았으니 라오스 왕태자 님께서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거 고맙군.""

 별 말씀을. 그나저나 궁금한 점이 있는데 라오스 왕태자 님께서는 혼약을 하지 않으신 겁니까?""

 약혼녀는 있다네. 누구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지.""

 무거워진 분위기를 뒤로 하고 화제를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러나 방금 전 같은 훈훈한 분위기는 돌아올 수 없었다."

 어차피 라오스 왕자의 뒤가 구리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나는 그 심증을 찾기 위해 건드렸을 뿐이다."

 더구나 티타임이 끝나자마자 저택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다른 건 몰라도 괜스레 머물렀다가는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른다."

 '어서 빨리 루미너스에게 물어봐야겠다.'"

 루미너스도 라오스 왕자가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터."

 그의 조언만 있다면 뒤를 캐는 건 어렵지 않다. 마리아 여왕도 의심하는 상황이었으니."

 그렇게 무겁고도 억지로 이어가는 티타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시간이 늦었으니.""

 마리아 여왕의 말을 끝으로 숨 막힐 것 같은 티타임이 끝났다. 다들 한숨 돌렸다는 표정이다."

 이제 남은 건 저택으로의 복귀다. 나는 남아있던 차를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돌아갈 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라오스 왕자가 나에게 물었다.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다."

 네. 여기 머물러봤자 폐만 끼치니까요.""

 폐를 끼치다니 재미있는 소리로군. 하룻밤만 머물고 가는 건 상관없네만.""

 지랄하고 자빠졌네. 네가 무슨 술수를 부릴 줄 알고."

 여인들과 한 방에서 지내고, 케이트까지 있다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게 좋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저택으로 재빨리 돌아가는 것. 그리고 제논 축제에서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여기서 죽 치고 있을 시간도 없다. 하물며 세실리의 임신까지 겹치는 바람에 안정이 더욱 필요하다."

 말씀은 감사드립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거든요.""

 혹시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기사와 관련된 건가?""

 잘 아네. 잘 알면서 왜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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