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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븐하임에서 엘프식 공산주의가 터져나왔을 때쯤."
테르스 왕국의 예언가(?), 노스는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면 긴장을 넘어서 두려움에 가까운 표정이다."
그만큼 맞은편의 인물이 주는 압박감이 상당하다는 것일 터."
그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이, 이게······ 사, 사실입니까? 전부 다?""
그렇다네.""
노스의 질문에 맞은편의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어서 그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차를 마신 후, 고저없는 투로 설명했다."
내가 밝힌 것들은 모두 사실이라네. 지금 제논이 뿌리고 있는 것들과 크게 연관돼 있는 거지.""
그, 그렇지만······ 이것들은······""
노스는 말을 더듬었다. 사고가 잘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앞의 남자에게 들은 말들이 정녕 사실일까. 솔직히 말해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거짓말이라기에는 퍼즐처럼 착착 붙는다는 것이 문제다. 그것이 노스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자네는 그저 제논 축제 때 이 사실을 밝히기만 하면 된다네. 모든 건 내가 책임질 수 있······""
신께서 분노하실 겁니다! 이건 신성모독이라고요!""
남자의 말을 끊으며 노스가 역정에 가깝게 소리쳤다."
서로의 신분을 고려했을 때 감옥에 투옥되어도 할 말이 없다. 그 정도로 경악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미미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면 더 좋다네.""
그게······ 무슨 말씀······""
자네는 '순교자'로 남을 테니까.""
순교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제 한 몸 바친 자를 의마하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순교자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최근에는 악마 숭배자로 순교자가 더 늘어난 상황이고."
그러나 노스는 순교자에 어울리지 않는다. 종교를 위해 목숨을 건 적도 없었으며 도리어 소시민에 가깝다."
더 나아가 우리 왕국을 더욱 빛낼 수 있는 기회라네. 자네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길이 기록될 것이고. 어떤가?""
··· ···""
남자의 말에 노스는 허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늘색에 가까운 푸른색 눈동자."
이걸 거절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진실을 알게 됐으니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는 싫다. 명예고 나발이고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뭐가 있을까."
피와 강철을 통해서 예전보다 더 큰 명예를 얻었지만, 그 명예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것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이 일은 명예를 넘어서 '순교자'로 남게 될 일. 거부한다면 죽음이요, 수락한다고 해도 죽음이다."
그나마 죽을 확률이 낮은 건······ 아무래도 순교자 쪽이겠지."
사실상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자포자기에 가까운 노스의 말에 남자가 비릿하게 웃었다."
아르웬의 엘프식 공산주의적 발언으로 인해 한바탕 난리가 났지만 다행히 잘 수습했다."
아직 할 일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닌데다가 활동에 제약을 걸어놓을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대로 모든 일이 끝나면 아르웬의 말에 따라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어차피 세계수의 씨앗을 심으러 마이샬 영지로 향하니 그때 마리와 얘기를 나눌 거라고."
겸사겸사 세실리의 임신 소식도 알려주고 근황도 파악할 계획이란다."
그럼 곧바로 테르스 왕국으로 향하는 것이냐?""
응.""
3개월이라는 길고도 짧은 기간 끝에 남은 국가는 테르스 왕국밖에 없다."
테르스 왕국에서 사건이 터질 듯한 예감이 강하게 들기는 해도 충분히 대비하고 있으니 괜찮을 터."
게다가 팬사인회 자체는 무난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곳은 백성이 아니라 위쪽이 문제였으니까."
알겠다. 혹시 필요한 거라도 있느냐?""
딱히 없어.""
기본적인 옷이나 물품 같은 건 국가 쪽에서 다 준비해 놓는다. 테르스 왕국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르웬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가 날이 되자 테르스 왕국으로 향했다."
테르스 왕국으로 향할 때는 관저에 설치된 텔레포트 기관이 아닌, 세실리의 도움을 받았다."
다른 나라는 텔레포트 기관을 이용했다만 테르스 왕국은 예외로 뒀다."
서로서로 껄끄러운 사이다보니 이게 최선이다."
'얼굴을 못 본지 얼마나 됐더라.'"
현재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은 라오스 왕태자와 라라 왕녀밖에 없다."
작년 제논 축제 당시 테르스 왕국에서 왔던 귀빈들이기도 하다. 작았던 라라 왕녀도 시간이 흐르자 많이 성장했다."
히리야는······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폐인처럼 지낸다는 소문을 듣긴 했다만 그것도 2년이 흘렀다."
조만간 그녀의 근황에 대해서도 알게 되겠지만 솔직히 말해 썩 궁금하지는 않다."
나에게는 라오스 왕태자가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니까."
'과민반응일 수도 있지만······'"
물론 희박한 확률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라면 내가 조금 미안해지겠지."
하지만 마리아 여왕을 통해 전달받은 정보에 따르면 수상쩍은 행적을 보였다고."
감시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진다거나 인위적인 미소가 늘어났다던가 등등."
친모조차 의심하고 있는 마당인데 숨기는 게 없을 수가 없다."
'가급적이면 혼자 있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겠어.'"
스타비르크에서의 경험으로 만약의 상황도 대비해 놓았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있는 경우여도 문제가 없는 것이, 케이트의 축복도 있을 뿐더러 자살 행위다."
라오스 왕태자와 독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나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어떻게 될 지 뻔하다."
사실상 나를 어떻게 해하려 들 수 없는 조건인 셈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방심하지는 않았다."
악마 숭배자들은 본인들의 목적을 위해 자폭까지 감행하는 놈들이니까."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볼게. 나중에 봐.""
잘 갔다 오거라. 나도 그대의 영지를 방문하도록 하마.""
가벼운 잡담이 끝나고 아르웬과 헤어졌다. 부디 세계수 씨앗이 잘 심어지기를."
이후로 세실리의 텔레포트를 통해 테르스 왕국으로 향했다."
테르스 왕국은 거리로 따지자면 알븐하임과 가까웠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환영합니다! 제논 님!""
예술의 발전에 큰 이바지를 하신 분!""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다른 국가들이 으레 그랬듯이 성대한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마차는 왕국 쪽에서 준비했다."
여기서 차이점은 무려 악단까지 나서서 연주를 했다는 것. 심지어 소리에 전혀 묻히지 않고 잘 녹아들었다."
다른 나라는 악단은커녕 오직 사람들이 환영하는 것만으로도 소리를 가득 메웠는데 대단한 정성이다."
'마이샬 영지 덕분에 테르스 왕국의 문화도 발전했으니.'"
나는 악단과 더불어 곳곳에 전시된 예술품들을 세세히 둘러봤다."
테르스 왕국의 문화력은 마리아 여왕의 정책에 힘 입어 한 층 더 발전한 상황이다."
본래라면 마이샬 영지에 뒤지지 않으려고 했지만, 체급 차이가 점점 벌어지면서 노선을 바꾸었다."
제아무리 마이샬 영지가 문화 도시로 발전한다지만 결국 '도시'라는 규모를 벗어날 수 없다."
반면 테르스 왕국은 문화예술 그 자체가 나라의 근본이었기에 틀 자체가 다른 것이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통치자가 중요해.'"
프리드리히가 왕위를 유지했어도 이렇게 됐을까. 나는 환영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둘러봤다."
다들 진심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곳곳에 설치된 예술품도 제논 일대기와 피와 강철······"
······저건 뭐야?""
응? 오? 히틀러 조각상도 있네?""
세밀하게 조각한 모양이군요. 제복을 표현하기 힘들 텐데.""
히틀러 조각상도 조각상인데 하필이면 왜 저런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거야."
나는 유독 눈에 띄는 히틀러 조각상을 멍하니 쳐다봤다. 나치 독일 특유의 인사를 하고 있는 히틀러."
내가 살던 세상이 실제 존재하는 세상이라는 건 전세계가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히틀러에 대한 걸 꺼려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저 조각상을 보아라. 아주 당당히 한 쪽 팔을 앞으로 내밀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표정 또한 예술이다."
'······이걸 고로시라고 했던가?'"
만약 일부러 저 조각상을 고른 거라면 고로시는 성공했다고 봐야되겠지."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가 창문에서 시선을 떼었다."
아이작. 저기 좀 봐.""
뭔데?""
네가 보면 좋아 죽을 걸?""
그때 세실리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반대쪽 창문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의 권유에 따라 살금살금 자리를 옮기며 반대쪽 창문 너머를 쳐다봤다."
이어서 눈에 들어온 광경을 보며 황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거 스탈린 맞지?""
··· ···""
좌 히틀러 우 스탈린. 정말 멋진 조합이구나."
하지만 이들을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피와 강철은 단순한 예술로 본 거다."
내가 아무리 실존한 이야기라 해도 이들 입장에서는 먼 나라를 넘어 먼 세계의 이야기."
악마 숭배자에 비견되는 홀로코스트가 있다지만 피와 강철은 결국 소설에 지나지 않았다."
'이걸 뭐라고 해봤자 반발심만 커질 테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도 늘어나겠지."
이걸 전부 억압한다면 탄압이다! 라며 소리칠 가능성도 있다."
특히 테르스 왕국, 특히 예술가들은 탄압 그 자체를 싫어하니 어쩔 수 없다."
'사상만 따르지 않으면 되겠지.'"
공산주의는 괜찮아도 파시즘만큼은 안 된다."
게다가 공산주의조차 드워프라서 잘 녹아들 수 있는 거지, 지구에서는 결함이 많던 체제다."
나는 좌 히틀러, 우 스탈린을 지나치면서 기대 반 걱정 반 심정이었다. 뭐가 나올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우와. 저거 최종전 당시 진이랑 제논 아니야? 저걸 어떻게 조각상으로 표현한 거지?""
마이샬 영지가 발전해도 장인은 다 여기 모여있구나.""
저건 뭘로 만든 거지?""
다행히 내가 우려하던 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도 눈 및 귀호강은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새삼 테르스 왕국의 문화가 얼마나 대단한 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여태까지 테르스 왕국은 방문한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 몇 번 조차 재판 때문에 불려간 거다."
사람들의 생활상을 두 눈으로 본 적이 없었으며 예술가 또한 마찬가지다."
'눈이 넓어지는 느낌이네.'"
성대한 환영식을 뒤로 하고 팬사인회가 진행될 건물로 들어섰다."
그런데 문화의 나라 아니랄까봐 건물 안에도 수많은 예술품들이 나열돼 있었다."
마이샬 영지에서 수많은 예술품을 지켜봤던 나조차 순간 멍해질 정도로 굉장한 퀄리티다."
'다 좋은데 왜······'"
저 놈의 히틀러·스탈린 석상은 왜 또 있는 거지? 나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석상을 바라봤다."
악마와 괴물이라는, 희대의 라이벌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뭐랄까. 대놓고 꼽을 주는 느낌이 든달까."
비율로 따지자면 제논 일대기 작품이 훨씬 많다만 시선 강탈이 심하다."
어머. 아이작. 너를 그린 것도 있는데?""
응? 내 그림?""
이것 봐.""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퓌러와 인간 백정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세실리가 나를 불렀다."
이에 조각상에서 눈을 떼고 그녀가 가르킨 그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말마따나 내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퀄리티로만 따지자면 정말 훌륭하다."
아이작 님께서 강림하신 듯한 그림이군요.""
그러게.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만.""
··· ···""
문제는 그 그림이 마치 내가 강림하는 것 같은 모양새라는 것."
고대 그리스 복식 같은 옷도 옷이지만 왼손에 작은 손도끼와 오른손에는 책이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