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732)화 (733/763)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니?""

 어떤 부탁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히르트의 부탁은 언제든지 들어줄 준비가 돼 있다."

 이때까지 해준 게 얼마인데 부탁도 못 들어줄까."

 이에 히르트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부탁했다."

 어떤 진실이 밝혀지든 간에······""

 잠시 말을 멈춘 히르트. 그녀의 몸은 어느새 목부근까지 사라져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입이 사라지기 직전, 히르트가 다소 안쓰럽게 느껴질 법한 부탁을 꺼냈다."

 우리를 너무 미워하지 마렴.""

 "샤아아아-"

 그 말과 함께 히르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빛의 입자는 바람을 타 저 멀리 날아갔으며, 내 눈 앞에는 거대한 세계수만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세계수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괜찮아요.""

 어떤 진실이 밝혀져도 우리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는 말."

 나는 피식 웃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우리 세상이 더했는데요 뭘.""

 나는 히르트가 사라진 이후에도 곧바로 떠나지 않았다."

 기왕 세계수까지 도착한 김에 이곳저곳 둘러볼 생각이었으니."

 품 안에는 세계수의 씨앗을 소중히 감싸안았으며 가끔 가다 내 머리나 어깨 위에 안착하는 새들과 놀아줬다."

 '어떤 진실이 나오든지 우리를 미워하지 말라.'"

 히르트가 사라지기 직전, 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다."

 솔직히 크게 상관없는 부분이다. 만물의 아버지가 이 세상을 멸망하려 드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

 루미너스가 사실 나쁜 놈이었다는 것도 의미가 없다. 적어도 그는 그 일을 반성하고 있었으며 세상을 이롭게 만들었다."

 '그걸 넘어서는 건 이름뿐이려나.'"

 신과 관련된 모든 인물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만물의 아버지의 이름만큼은 직접 알려줄 수 없다고."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만물의 아버지에게 지배당할 것이며 설령 버티더라도 환청이 들릴 거라고 알려줬다."

 이것만 본다면 무슨 크툴루 신화에 나올 법한 이름일 듯하지만 전혀 아니다. 만물의 아버지는 이 세상의 신이었으니."

 '이름이라 해도 별 거 아니겠지.'"

 나는 저 멀리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름은 그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는 것. 이전에 모라가 이리 말했다."

 지구의 최고신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각 세계의 최고신은 그 이름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한다고."

 지구 같은 경우는 신들의 간섭이 거의 없어서 괜찮지만, 이 세상처럼 간섭이 심한 곳은 영향력이 몇 배나 심하다."

 따라서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미친다는 건 그 영향력이 더욱 강대해지기 때문인 걸로 보였다."

 '그나저나 나도 이미 알고 있다는 건 도통 모르겠네.'"

 나는 몸을 빙글 돌려 걸음을 옮겼다. 세계수 씨앗은 소중히 품 안에 안겨있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진행된다면 모르겠지만, 만물의 아버지가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무슨 수를 쓰던 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겠지. 악마 숭배자를 수족으로 삼아서 말이다."

 '의외인 건 악마 숭배자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다는 건데.'"

 여태까지 떡밥을 뿌려댔으나 이렇다 할 활동은 없었다. 그냥 조용하다."

 오죽하면 호위로 나섰던 애인들이 너무 싱거운 거 아니냐고 할 정도."

 물론 안전에는 과도함이 없었기에 매번 긴장하면서 나를 지키고 있다."

 '테르스 왕국이 가장 위험하긴 하지.'"

 더구나 가장 위험한 나라로 예측하고 있던 테르스 왕국이 남아있다."

 왕국 자체는 별 문제가 없지만 라오스 왕태자가 제일 거슬렸다."

 겉으로는 평범한 왕태자 연기를 하고 있겠지만 속내는 모른다."

 분명 무슨 짓을 할 것이다. 다른 애인들에게 테르스 왕국만큼은 유의해달라 부탁할 예정이다."

 '일단 이 씨앗도 심어야겠지.'"

 나는 품 속에 안겨있는 세계수의 씨앗을 바라봤다."

 히르트는 이 씨앗에다가 내 피를 뿌리고 이름을 새긴 뒤, 영지에다 심으라고 말했다."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훗날 큰 도움을 줄 거라고. 히르트의 지시니 기꺼이 따를 예정이다."

 '아리엘의 진짜 동생이 나오려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세계수처럼 자라던가 둘 중 하나겠지."

 나는 히르트와의 만남을 상기하면서 관저로 돌아갔다. 관저로 돌아가자마자 아르웬이 나를 반겨줬다."

 돌아왔구······ 그건 무엇이냐?""

 세계수의 씨앗.""

 ······또?""

 아르웬은 내 품에 안긴 세계수의 씨앗을 보자마자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은 그렇다 쳐도 세계수의 씨앗을 또다시 선물한 거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뒤집어질 텐데 하나 더 선물해줬으니 당황하겠지. 나도 비슷한 마음이다."

 응. 히르트 님께서 선물해주셨어. 여기에 내 피로 이름을 새긴 뒤 영지에 심으라던데?""

 으음······""

 내 설명을 들은 아르웬은 침음성을 흘렸다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뒤이어 황당이 섞인 어조로 내게 말했다."

 그대여. 그거 아느냐?""

 뭐가?""

 이제는 이런 일이 평범하게 느껴지니라. 이런 일이 한 두 번이었어야지.""

 세계수의 씨앗을 받은 건 두 번째인데?""

 ··· ···""

 미안.""

 내 말장난에 아르웬의 표정이 짜게 식자 곧바로 사과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런 일이 워낙 자주 발생하다보니 이제는 무덤덤하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전부 신화적인 것들이다. 정작 나는 태풍의 눈마냥 고요했지만."

 아무튼 아르웬. 나중에 우리가 떠나면 이 씨앗을 우리 영지에 심어줄 수 있어?""

 세, 세계수의 씨앗을 말이냐?""

 응. 저택을 갔다 오기에는 세실리가 힘들어 할 것 같아서. 너니까 부탁하는 거야.""

 어렵지는 않다만······""

 아르웬은 씨앗과 내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에다가 심으면 되겠느냐?""

 세계수의 크기를 따지자면 좀 넓은 곳에 심어야 하는데······""

 나는 뒤를 돌아보며 하늘 높이 뻗어있는 세계수를 쳐다봤다."

 높이로만 따지자면 그 어떤 건물보다 크다고 할 수 있는 높이다."

 크기 또한 어지간한 마을 하나를 꽉 메울 정도로 크다. 줄기만 하더라도 답이 나오는 수준."

 이 씨앗이 세계수처럼 자라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걸 고려해서라도 토지가 넓은 곳에 심어야 할 것이다."

 그건 우리 아버지와 상의하는 게 좋을 거야. 최근 축구 경기장을 증축할 계획을 갖고 있거든.""

 음······ 알겠다. 한 번 그대의 아버지와 상의하도록 하지.""

 우리 영지는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만 그래도 미개발지역이 훨씬 넓다."

 작았던 마을에 살을 붙이는 식으로 발전하고 있어서 규모 자체는 협소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제논 축제 때마다 규모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관광객들이 증가했으니까."

 '이번 제논 축제는 더 많아지겠지.'"

 지금까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떡밥을 뿌려댔다."

 그것 때문이라도 사상 최대의 관광객들이 몰려올 것이다."

 미네르바 제국이든, 마이샬 영지든 미친듯이 바쁜 상황일 터."

 '거의 막바지에 왔구나.'"

 나는 아르웬과 함께 침실로 돌아가며 그리 생각했다. 테르스 왕국만 다녀오면 모든 일이 끝난다."

 그렇기에 더욱 불안해졌다. 만물의 아버지가 무슨 수를 쓸 지 도통 알 수 없었으니."

 어쩌면 인내심을 발휘하여 이 시대의 흔적이 옅어질 때쯤 활동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히르트로부터 들은 만물의 아버지는 성질이 매우 급했다."

 인내심이 산산조각 난 경위가 있긴 했다지만 성급한 부분이 많다."

 언제나 자애롭고 여유로운 히르트와 비교가 되는 수준."

 솔직히 저딴 게 신? 이라는 의문이 절로 들 정도다."

 왔구······ 그건 또 뭐야?""

 세계수의 씨앗.""

 아. 그렇······ 뭐? 뭔 씨앗?""

 침실로 돌아온 후에도 설명의 시간을 가졌다."

 아르웬은 두 번째인 반면 다른 애인들은 세계수의 씨앗을 보는 게 처음이었으니까."

 대신 히르트와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에 대한 건 쏙 빼놓았다. 이건 어쩔 수 없다."

 고대 인류가 히르트를 모욕했다는 걸 알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걱정됐으니까."

 인류의 입장에서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라지만 여러모로 '좆간'이라는 느낌밖에 안 들 것이다."

 살다 살다 세계수의 씨앗도 눈으로 보는구나. 이걸 영지에 심을 거라고?""

 응. 히르트 님이 그리 부탁하셨어.""

 마이샬 영지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문화 도시를 한참 넘어섰는데?""

 아델리아가 어처구니 없다는 뉘앙스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피식거렸다."

 안 그래도 마이샬 영지는 루미너스와 모라의 신전이 함께 세워진 곳이다."

 여기에 세계수까지 등장한다면······ 모르겠다. 뒷일은 알아서 되겠지."

 마이샬 영지는 이미 성지나 다름없는 지역입니다. 세계수가 자란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케이트 씨.""

 네?""

 ······아니에요.""

 케이트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듯했지만. 실제로 당장 눈에 띌만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알븐하임의 세계수는 무려 3000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성장한 케이스다."

 다른 건 몰라도 시간만큼은 신들조차 다스리기 어려운 법."

 세계수의 씨앗에 대한 사실을 공표하지 않는 이상 여느 날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아무튼 세계수의 씨앗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습니까?""

 음? 그게 뭐죠?""

 케이트의 말에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녀를 쳐다봤다."

 세계수의 씨앗보다 중요한 게 있다니, 그게 무엇일까."

 케이트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웃음기를 머금었다."

 이어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바로 아이작 님의 씨앗입니다. 아르웬 여왕님께서 마리 님에게 전달해야 될 가장 중요한 소식이죠.""

 ··· ···""

 더이상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아이작 님이 원하시는대로, 그리고 저희가 원하는대로 씨앗을 품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저는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세계수의 씨앗보다 내 씨앗이 더 중요하다니. 저것이 성직자 입에서 나올만한 말인가."

 하지만 더 어이없는 건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세실리다."

 우선 아델리아에게 양보하는 건 어때? 아이작이 세 번째로 받아들인 여자거든.""

 나, 나는 괜찮아. 게다가 세 번째까지는 의미가 없잖아? 두 번째까지는 측실이라 하지만 세 번째부터는 첩이거든.""

 아델리아가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양보했다. 어색한 미소를 보아하니 정말로 괜찮은 모양이다."

 더구나 이 사안은 마리의 허락이 떨어져야만 하는 것. 세실리까지는 괜찮다만 그 이상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걱정 말거라. 나에게 좋은 방법이 있으니.""

 그때 아르웬이 선뜻 나섰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있는 모양이다."

 이에 모두가 그녀를 쳐다볼 때쯤, 아르웬이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번을 정한다는 것부터 어리석은 짓이니라. 아예 처음부터 다 같이 아이를 갖는다면 싸울 이유도 없지 않느냐?""

 ··· ···""

 저 공산주의 엘프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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