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갔다 올게.""
진실이 조금씩 다가오는 기분이다."
히르트를 만나러 가는 게 이번이 세 번째인가. 나는 세계수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첫 번째 만남은 아르웬과의 첫날밤 이후였고, 두 번째 만남은 모라가 사고를 쳤을 때인 걸로 안다."
다른 신들과 다르게 히르트는 자연을 넘어 행성 그 자체인 대지모신.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세계수의 도움이 필요하다."
짹짹! 짹!"
저 멀리 올곧게 뻗은 세계수로 향하고 있을 때 새들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몇몇 새들은 내 어깨 위에 올라오거나 머리에 안착하는 등. 나를 향한 친밀감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동물들이 나에게 안 달라붙네.'"
나는 손가락에 조심스레 발을 디딘 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리엘의 실수로 모라의 신성을 섭취했을 때다.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 넘긴 후에 몸이 바뀌었다."
바뀐 몸은 본능이 매우 강한 동물들을 유혹했으며 덕분에 꽤 고생했다.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었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동물들이 나에게 친밀감을 드러낼 뿐, 먼저 다가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끔씩 감정이 격해졌을 때 동물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었으나 그것도 가끔이다."
'그레이스한테도 왔었지?'"
그레이스가 탄생했을 때 보여줬던 비범한 탄생."
찬란한 빛무리에 온 몸이 휘감겼으며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까지 보여줬다."
이것만으로도 설화에 가까운 탄생이었으나 바깥에서도 반응이 나왔다."
새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창문을 부리로 쪼고 난리도 아니었으니."
푸드득!"
나는 손 위에 안착했던 새를 멀리 날려보냈다. 머리 위와 어깨에 안착했던 새들도 따라 날아갔다."
저택에 남아있을 가족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세계수에 거의 다다랐다."
언제 봐도 경건함이 드는 세계수. 3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성장하고 있다는 신의 상징."
시간이 흘러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세계수만큼은 굳건히 서 있을 테지. 어쩌면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세계수의 두터운 줄기에 다다랐을 때쯤, 나는 볼 수 있었다."
어서 오렴. 기다리고 있었단다.""
줄기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여성, 히르트를."
원근감을 말끔히 무시하는 커다란 키. 자애로운 미소가 어울리는 미모."
숲을 연상케 만드는 진한 녹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은밀한 부분은 여전히 나뭇잎으로만 가렸다."
그럼에도 음심은 전혀 들지 않았으며 도리어 마음이 경건해지는 기분이다."
만물의 아버지에 이어 창조주라 할 수 있는 대지모신."
안녕하세요. 히르트 님. 오랜만에 뵙네요.""
겨우 1년밖에 안 지났단다. 게다가 앞으로 자주 만날 테고.""
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정중히 인사하자 히르트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소리 하나하나가 가슴과 머리를 차분히 진정시키는 기분이다."
스윽-"
히르트가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무려 3m가 넘는 키를 가졌기 때문인지 쪼그려 앉아야만 나와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니?""
히르트가 다정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했다. 진한 녹색 눈동자에는 자애로움이 가득하다."
현자에게 빙의했던 만물의 아버지와 달라도 너무 다른 존재. 차라리 히르트가 처음부터 창조주였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마음 속 깊이 억누르며 질문에 대한 대답을 꺼냈다."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루미너스 님과 모라 님께서 잘 보살펴주셨거든요. 히르트 님께서는요?""
잘 지내고 있었지. 최근들어 공기가 아주 약간 탁해진 것 같지만.""
히르트가 살풋 웃으며 뼈가 실린 말을 꺼냈다. 나는 그 말에 애써 시선을 피했다."
매연이 심해진 이유는 바로 마력 기관과 공장의 설립 때문이다."
현재 사용 중인 마력 기관은 결국에 증기 기관을 모티브로 삼은 것."
증기력을 마력으로 치환할 수 있다지만 매캐한 연기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몇 번 경고했기에 정화 장치를 발명하고 있다는 걸까."
그래도 히르트 입장에서는 깨끗했던 공기가 조금 더럽혀졌으니 약간 불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마력으로 치환한다고 하길래 매연이 거의 없는 줄 알았거든요.""
괜찮단다. 오히려 네 조언이 없었더라면 다들 인지조차 하지 못했겠지. 이정도는 충분히 정화가 가능하고.""
다른 건 몰라도 플라스틱만큼은 해결책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으니 앞으로 자연은 급격히 망가질 것이다. 이건 필연에 가깝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나가 에너지 자원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
전에 언급했듯이 이 세상은 스타트부터 다르다. 지구로 따지자면 불과 전기를 동시에 발견한 셈이다."
그러므로 환경 오염은 지구보다 덜하면 덜했지 심각해질 일은 없다. 세상이 멸망한다면 몰라도."
궁금한 게 있는데, 지구의 자연은 히르트 님 입장에서 어떤가요? 제가 왔을 때도 거의 망가지기 직전이었는데.""
별 문제 없단다. 천천히 적응하고 있으니.""
정말인가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구의 자연은 심각할 정도로 망가져 있다."
기관에서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게 아니라 '즉시' 멈춰야 겨우겨우 회복된다고 발표할 정도였으니."
그런데도 히르트는 괜찮다고 말했다.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자연의 힘이다."
그래. 인류가 많이 힘들겠지만 자연은 적응할 거란다. 새로운 종이 등장하고, 몇몇 존재는 환경에 맞게 진화하겠지.""
······아포칼립스는 아니죠?""
자연이 그렇잖니? 변하는 환경에 맞게 진화하지 않는다면 도태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란다.""
웃는 얼굴로 잔인한 섭리를 언급하니 뭐랄까······ 진정으로 자연의 여신다운 포스가 느껴졌다."
확실히 인류가 좆되는 거지, 자연이 좆되는 건 아니다. 자연은 어떻게든 환경에 맞춰 변화할 테니까."
자연에게 있어서 인류는 개체가 많은 동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멸종해도 별 상관없는 동물."
인류는 영원토록 자연을 이길 수 없는 거죠?""
감지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대비할 수 있겠지만 방지할 수 없는 것. 그게 자연이란다.""
무섭네요.""
솔직한 말이다. 인류가 세워놓은 찬란한 문명은 자연 앞에서 무력하다."
강대국이었던 나라조차 자연 앞에서는 힘없이 쓰러지는 법. 지진 한 방에 멸망한 나라도 있다."
하지만 인류는 자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걸 알고 있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실정이다."
히르트 님.""
말하렴.""
정말 만물의 아버지에게 승리를 점할 수 있을까요?""
··· ···""
내 질문에 히르트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살짝 내려왔다. 동시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 자신만만했지만 내심 불안해 하고 있던 부분이다."
자연조차 이기지 못하는데 창조주 그 자체인 만물의 아버지를 이길 수 있을까."
다른 신들이 도움을 준다지만 그들조차 만물을 창조했던 아버지 앞에서는 빛과 어둠에 지나지 않을 터."
물리력으로 승부를 본다면 루미너스가 조져버릴 수 있겠지. 그러나 이번에 중요한 건 물리력이 아니다."
루미너스 님을 주신으로 격상시키고, 만물의 아버지를 끌어내리는 계획을 갖고 있죠.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가능한지 자신이 없네요.""
··· ···""
그래서 히르트 님을 통해 확신을 가지려 합니다. 정말 가능할까요?""
만약 내가 부정적인 대답을 꺼내면 어떻게 할 거니?""
히르트가 되물었다. 사실 그녀의 가정이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이다."
만약 그리 된다면 인류는 이 행성을 떠나기 전까지 영원토록 만물의 아버지에게 위협을 받아야 된다."
현 시대에서 악마 숭배자를 토벌해도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며 영웅의 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말했듯이 영웅이 없는 사회가 불행한 게 아니라 영웅이 필요한 사회가 불행하다고 했으니까."
시간을 최대한 벌 생각입니다. 만물의 아버지가 다시 힘을 얻어도 즉각 조치할 수 있도록. 히르트 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방지할 수 없어도 대비는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우선 내 대답은······ 가능하단다.""
천만다행히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헌데 히르트의 표정이 약간 이상했다."
언뜻 슬퍼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본인의 반려였던 만물의 아버지였으니 그런 모양이다."
그녀는 잠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다시 미소를 되찾으며 나에게 설명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물의 아버지는 신성이 격하된 상황이란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겠지.""
루미너스 님이 주신으로 격상된다면 만물의 아버지는 영원토록 부활하지 못하는 건가요?""
그래. 본인의 본질마저 잃어버릴 테니 정신체마저 완전히 소멸할 터. 루미너스가 그의 역할을 대신할 거란다.""
휴우.""
나는 그녀의 설명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미너스는 물론이요, 모라조차 그게 가능할까? 라며 의문을 자아내던 계획이다."
그들은 희망 회로를 돌렸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냈을 뿐, 그들 스스로도 애매하다는 뉘앙스를 풍겼으니."
그러나 히르트는 만물의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존재이자 동급인 신이다. 그녀의 말만큼은 다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자신감을 얻었어요.""
자신감을 얻었다니 다행이로구나.""
네. 그런데······ 다른 질문을 해도 될까요?""
무엇이 궁금하니?""
히르트가 맑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름다움에 성숙함이 가미되어 포근함이 느껴지는 미모."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금 가장 가슴이 아플 존재는 그녀이지 않을까."
반려는 사랑하는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고,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를 끌어내리려 한다."
아무리 히르트가 대지모신이라지만 이미 한 번 겪었던 비극을 다시 한 번 겪을 수도 있다는 뜻."
그렇기에 만물의 아버지가 더 궁금해졌다. 어째서 그는 이토록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는 것일까."
게리오스 왕국에서 발견했던 기록물대로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주기 위해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분명 또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물으러 왔다."
만물의 아버지의 이름은······""
그건 말해줄 수 없단다. 너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서라도.""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약간이나마 엄격해진 얼굴을 보아 절대 발설하면 안 되는 모양이다."
그 이름이라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중요하길래 다들 이러는 걸까.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조금이라도 힌트는 주실 수 없나요?""
그것도 안 된단다. 대신 모건 왕이 말했듯, 너는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지.""
음······ 알겠습니다.""
감이 잡힐 듯 말 듯한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래도 별로 아쉽지는 않다. 어차피 대충 찔러나보자는 식으로 물은 거였으니."
그렇다면 다음 질문. 만물의 아버지께서는 분명 인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죠.""
······그랬었지.""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건가요?""
그건 아니란다. 단지······""
히르트는 대답을 망설였다. 눈치를 보는 걸 보아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대답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줬다. 겨우 이정도 가지고 보채면 히르트가 혼낼 수도 있다."
······얘야.""
네. 히르트 님.""
너도 알고 있을 거란다. 너의 세상이 여러번 멸망했다는 것을.""
틈만 나면 멸망했죠.""
무겁게 닫혔던 히르트의 입이 열리며 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빈말이 아니라 여러 신화를 보면 다 멸망한다. 대부분 대홍수를 통해 멸망시켰고."
신들이 어째서 인류를 멸망시켰는지 알고 있니?""
네. 인류의 죄악이 극에 다다랐기에 심판 형식으로 내렸습니다.""
우리도 그랬단다. 아니, 정확히는 너무 성급했지.""
히르트가 담담하지만 슬픔이 담긴 목소리로 알려줬다."
너희 세상이 그랬듯이, 우리 세상의 아이들도 큰 죄악을 저지를 거라고.""
만물의 아버지가 저지른 실수이자 가장 납득이 가는 이유."
그리 판단하여 세상을 멸하려 들었단다.""
인류의 죄악이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논리가 있다."
특정 사례를 근거로 섣불리 일반화하고 그것을 판단하는 오류다."
비슷한 말로는 하나를 보면 열은 안다가 있으며 잘못된 행동을 지칭하는 편이다."
이 오류에는 다양한 예시가 있지만 그중 가장 안 좋은 의미로 사용됐던 건 바로 홀로코스트다."
사골처럼 우려 먹긴 하겠다만 나치 독일은 원래부터 인류사의 광기란 광기는 전부 밀어넣은 집단."
모든 일에는 유대인이 배후라며 선동했으며, 실제로 몇몇 유대인들이 자본을 차지한 건 맞지만 그걸 싸잡아서 문제다."
그 결과가 바로 나치 독일의 폭주였으며 종래에는 어마어마한 참상을 낳았다. 하지만 이럼에도 오류는 끊임없이 범하고 있다."
내 반려는 신이 직접 다스리는 인류는 큰 죄악에 다다를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시작해야 된다 말했지.""
때마침 바로 옆의 세계에 적절한 예시도 있었고요.""
그리고 신에게 반기를 드는 인류 및 영웅들도 간간히 존재했지. 너희 세상이 그랬던 것처럼.""
신화를 보면 정말 간 큰 용사들이 존재한다. 신을 모욕하는 건 기본이요, 권능까지 넘어서려던 자들."
그런 자들은 대부분 신들이 직접 참교육을 시전하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신이 골탕먹는 경우도 있다."
이걸 보았을 때 신화 시대의 인류가 얼마나 개차반이었는지 얼핏 알 수 있다."
야만을 넘어서 죄가 죄로 인정되지 않았던 세상. 죄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걸 보며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단다. 하지만 너희 세상을 방문했던 내 반려는 큰 충격을 받았지.""
어떤 충격이었죠?""
같은 신들조차 수많은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단다.""
··· ···""
나는 히르트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만물의 아버지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지구의 신들 입장에서 이 세상은 죄로 가득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지구를 방문했던 만물의 아버지도 비슷했겠지."
실제로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들은 성격에 '하자'가 많다. 당장 그리스·로마 신화의 최고주신이 희대의 강간마인데 말다했지."
전에 몇 번 말했던 것처럼 기독교가 종교를 신화로 격하시켰던 건 다름아닌 '도덕성' 때문이다."
불교 또한 궤로 따지자면 비슷하다. 포용성 하나만큼은 불교를 따라갈 종교가 없었으니."
신들이 저지른 죄는 최초의 죄악이 되어 인류에게 스며들어가고, 인류는 그 죄의 몸집을 키워 사단을 만들었지.""
그래서 지구는 멸망했죠.""
그래. 내 반려는 그걸 보며 생각했지. 신들이 통치하지 않아야 인류의 죄악이 극단적으로 몰리지 않을 거라고.""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슬픈 현실이네요.""
어떤 악마가 신에게 이리 소리쳤다. 악마라는 존재를 만들었으면서 왜 인간을 창조한 거냐고."
처음에는 단순히 웃기 위해 만들어진 거지만 골똘히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인류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작품도 있는 반면, 인간의 악랄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도 많았으니."
인류처럼 선악의 구분이 모호한 존재가 있을까. 이건 인류 문명이 유지되는 동안 풀리지 않을 난제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 급했지. 만약 내 반려가 시간을 들였다면, 조금만 인내심이 깊었다면 잠자코 지켜봤을 거란다.""
설득은요? 설득은 실패한 건가요?""
실패했단다. 내 반려가 '죄'라고 칭했던 건 다른 신들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권리'였으니까.""
허.""
히르트의 설명에 절로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역시나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했다."
신들 입장에서 만물의 아버지가 말하는 건 헛소리에 가까웠겠지."
솔직히 이제 와서? 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을 것이다."
내 반려는 크게 실망했단다. 하지만 그에게 동조하지 않은 신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다시 한 번 인내했지.""
그게 잘 안 된 모양이군요.""
히르트는 슬픈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만물의 아버지가 타락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 신과 가까운 인류는 점점 그들의 죄악을 담습해나갔고, 결국에는 신마저 모욕하는 일을 저질렀지. 인류가 신에게 승리를 점한 기념비적인 역사이자 비극의 시발점.""
그 신이 설마······""
나는 설마하는 표정으로 히르트를 쳐다봤다. 히르트는 여전히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뒤이어 그녀는 침울하게 깔린 목소리로 조용히 고백했다."
바로 나란다. 만물의 아버지의 반쪽이나 다름없던 반려.""
··· ···""
나는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지만 돌아오는 건 끊임없는 파괴였지. 그들의 오만함이 극에 다다랐던 순간이었단다.""
인류도 자연에 포함된 동물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파괴한다는 건 자기 목을 도끼로 치는 것과 똑같다."
안 그래도 인류를 의심하던 상황에서 히르트마저 모욕했으니 만물의 아버지 입장에서 빡이 쳐도 할 말이 없다."
저것이 트리거가 되어 타락의 길로 들어섰겠지. 인류의 죄악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니 막을 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인류를 사랑했단다. 나는 그들의 부모였기에 반려를 필사적으로 설득했지. 그러나 반려는 끝까지 날 떼어놓더구나.""
루미너스 님과 모라 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나요?""
나를 모욕한 인류를 직접 처벌했단다. 그러나 내 반려의 분노를 잠재우기는 부족했지.""
엘레나에게 건네받았던 기록물과 전혀 반대되는 입장이다."
루미너스 측은 인류가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할 거라며 만물의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허나 히르트의 말을 들어보면 앞뒤가 맞는 것 같으면서도 애매하게 맞지 않았다."
'자유 의지는 단순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나?'"
만물의 아버지는 인류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기 위해 세상을 멸망시켜 들었다."
그러나 히르트의 말을 들어보면 뭔가 이상하다. 자유 의지는커녕 인류의 죄악만 강조되는 느낌이 들었으니."
만물의 아버지가 폭군으로 타락하게 된 원인은 알게 됐지만, 자유 의지와 관련된 건 전혀 말하지 않았다."
히르트 님.""
말하렴.""
히르트 님은 만물의 아버지의 사상에 동조하시나요?""
그래서 직접 물었다. 인류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는 것에 동의하냐고."
히르트는 만물의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는 신이다. 그녀 사이에서 수많은 신들을 낳았지 않았는가."
그녀는 내 질문에 자애로움이 뚝뚝 묻어나오는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손을 뻗었다."
뒤이어 커다란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더니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너희의 부모란다. 나를 거부하는 것도 자유 의지고, 나를 따르는 것도 자유 의지지.""
··· ···""
그러나 부모된 마음으로 너희가 또다른 부모가 되기를 원하고 있단다. 모든 걸 퍼주고 싶지만 자연은 무한하지 않거든.""
슬픈 이야기군요.""
정말 안타깝지만 현실적인 부분이다. 자연은 무한하지 않다."
석탄, 석유, 천연 가스를 포함한 자원부터 시작해 세계 곳곳의 자연 환경들."
생명이 순환하고 있다지만 인류의 숫자는 날이 가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독립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0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내 반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떼어놓았지. 그러나 시간이 흘러 반려의 목적은 퇴색되었단다. 이제는 의미 없는 사상에 지나지 않고.""
그 말씀은······""
부디 내 반려를 정화시켜주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히르트는 그리 말하며 내 머리 위에 얹었던 손가락을 떼었다."
나는 그녀가 손가락을 떼자마자 머리를 매만졌다. 머리가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루미너스는 인류에게 죄를 전달했고, 인류 또한 그 죄를 죄로 인식하기 시작했지. 어찌 보면 내 반려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야겠구나.""
······그렇죠.""
오만한 건 우리였단다. 이리 될 줄은 누구도 몰랐겠지만, 만약 그때 알게 됐다면······""
신들은 인류의 미래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미래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의 미래는 엿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길 뿐."
과거로 돌아가 사건을 일으킬 수 있어도 그것이 현재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푸념에 지나지 않겠지. 지금으로서는 미래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할 일이란다.""
최고의 결말을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히르트는 방긋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더니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 위에 올려진 무언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랐다."
이건······""
씨앗이다. 그것도 엄청 큰 씨앗."
아리엘이 태어났던 씨앗과 똑같았다."
내가 씨앗과 히르트를 번갈아보며 당황하고 있을 때,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네 피를 뿌리고 이름을 새기렴. 그리고 네 영지의 땅에 심어놓거라.""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란다.""
으음······""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세계수의 씨앗을 받았다. 럭비공만한 크기에 상당히 묵직하다."
지난번에는 아르웬과의 정사 이후에 아리엘이 태어났었지."
그 일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아르웬한테 부탁해야지.'"
다음 행선지가 테르스 왕국인만큼 세실리가 아니라 아르웬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아르웬도 모처럼 휴가를 받았으니 마이샬 영지에서 놀면 되겠지. 겸사겸사 그레이스와 만나고 좋다."
감사합니다. 매번 선물만 받아가는 것 같네요.""
네가 한 일에 비해서는 약소하디 약소한 선물이지.""
스윽-"
히르트가 굽혔던 무릎을 서서히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단순히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산맥이 태동하는 것마냥 웅장한 느낌이다."
가시는 건가요?""
그래. 이제 운명에 맡겨야겠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좋은 결말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신뢰를 얻은 걸까. 히르트는 방긋 웃으며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두 다리가 땅에서 떼어지고 그녀의 거대한 신체가 서서히 세계수 쪽으로 상승한다."
"샤아아아-"
이어서 발 끝부터 시작해 그녀의 몸이 새하얀 입자로 변하여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나는 그녀로부터 선물받은 세계수의 씨앗을 꼭 감싸안은 채 그녀를 배웅했다."
히르트는 나를 내려다보며 특유의 자애로운 미소를 유지했다."
얘야.""
이윽고 그녀의 복부가 새하얀 빛무리로 변할 때쯤, 히르트가 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