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 끝난 건가?""
응. 헬리움은 저 아이가 끝이야.""
아무튼 다른 나라보다 훨씬 다사다난했던 헬리움의 팬사인회도 끝을 맞이했다."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피곤해서 그런지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나는 기지개를 쭉 펴며 찌뿌등한 몸을 풀었다. 남은 건 헬리움의 왕궁으로 향하는 것뿐."
'왕궁으로 향할 때도 텔레포트를 써야하나?'"
도보를 이용한다면 시선이란 시선은 다 끌릴 게 분명하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무릎까지 꿇겠지."
이제 헬리움뿐만 아니라 마족들 앞에서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될 것 같다."
괜히 만났다가 한 명이라도 무릎을 꿇으면 음······ 상상도 하기 싫다."
'전세계 순방 팬사인회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려나······'"
원래라면 매년마다 한 번씩 전세계를 돌면서 팬사인회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오만이었다는 건 헬리움을 방문하고나서야 깨달았다."
한 명당 10분씩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쫙 빨리는데 이거 매년마다 한다?"
성향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 전생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여도 예비군은 갔다 왔는데 이건 못해먹겠다."
이제 남은 나라가 알븐하임이랑······""
테르스 왕국.""
내가 남은 나라를 손가락으로 꼽자 아델리아가 테르스 왕국을 언급했다."
스타비르크는 현재 나라를 재건 중이어서 리스트에 넣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바쁜데 나까지 끼어들면 힘들겠지."
나는 무덤덤하게 테르스 왕국을 입 밖으로 꺼낸 아델리아를 슬쩍 바라봤다."
트라우마를 완전히 떨쳐냈는지 무덤덤한 얼굴이다."
'······언급도 하지 말아야지.'"
괜히 언급했다가 도리어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도 있다. 그쪽과는 아예 연을 끊는 게 낫다."
아델리아에게 있어서 가정사는 상종하기도 싫은 과거였으니까.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는 소재조차 찾지 못했다."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매춘부였으니 성병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델리아가 뚝심있게 자란 것조차 기적이다."
끼익-"
아델리아와 대충 정리하고 있을 때 바깥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문을 열었다. 세실리와 케이트다."
지금 들어온 걸 보니 바깥의 상황도 대충 정리하고 온 모양이다."
다 정리한 거야?""
응. 계속 기다리는 사람이 있길래 다 보냈지.""
역시 예상대로다. 팬사인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다."
이대로 바깥으로 나갔다면 또 괴상한 일이 벌어졌겠지. 나는 그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그런데 아이작.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네가 어떤 악주기도 아닌 마족 여인을 임신시켰다는데 무슨 소리야?""
······쿨럭.""
갑작스레 치고 들어온 세실리의 질문. 묘하게 가시가 돋혀있는 건 절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저런 건 서둘러 해명하는 게 좋다. 구구절절 변명했다가는 오해가 더 깊어질 수도 있다."
······조금 오해가 있나보네. 일단 누나가 생각하는 건 절대 아냐. 그리고 그게 진짜인지도 모르는 걸?""
흐음~ 아무튼 이상한 짓은 안 한 거지?""
아델 누나가 옆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어떻게 해?""
알았어. 나중에 왕궁에서 천천히 듣지 뭐. 여기 신문.""
세실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나에게 신문을 건넸다."
팬사인회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기에 신문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점심 시간이 있다지만 신문을 읽으면서 쉬기에는 부적합하다."
오늘은 무슨 뉴스라도 있어?""
딱히 없지만 슬슬 네가 펼친 기적이 소문으로 번진다는 것 정도?""
그건 예상하고 있었지.""
나는 신문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눈에 띌만한 소식이 없는지 파악했다."
나의 팬사인회로 인해 경매로 부쳐진 사인이 있다니, 그로 인해 각종 사건사고가 발발했다니 등등."
팬사인회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만 이건 충분히 예측한 바라 쉬이 넘겼다."
그에 오늘도 별일 없나 싶어 넘길 때쯤, 내 눈에 들어온 소식이 하나 밟혔다."
[회색 사막 원정대. 고고학자 두 명이 실종되었다.]"
꾸준히 작업 중에 있던 회색 사막 원정대, 그것도 고고학자 두 명이 실종됐다는 소식."
회색 사막 원정대는 언데드 계열의 몬스터가 많다. 당장 모건 왕만 하더라도 따지고보면 언데드 계열이다."
그로 인해 사상자가 꽤 발생하는 편이다. 살인적인 사막 기후도 공략에 차질을 빚는 중이고."
'설마?'"
나는 그 소식을 읽자마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엘레나와 신디도 고고학자로서 참여한 거라 눈에 밟힐 수밖에 없었다. 그에 다급히 자세한 정보를 파악했다."
'아. 세이비어 교국 출신이구나.'"
다행히도 세이비어 교국 출신의 고고학자들이 실종됐다는 소식이다."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알븐하임 출신만 아니면 된다. 애당초 곁에 아이케르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도 안 되고."
이 다음에 눈에 띌만한 뉴스는 없었다. 나는 신문을 대충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인어른이랑 장모님께서는 뭐하고 계셔?""
우선 오늘은 엄마만 같이 식사를 할 거야. 아빠는 바쁘거든.""
왜?""
근무 이탈한 발락 경의 징계 건 때문에 그래.""
······가르츠 씨가?""
나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팬사인회에서는 가르츠도 응모되어 나에게 사인을 받았다."
제논 일대기 및 피와 강철 전권 세트를 바리바리 들고 와 사인을 받았던 그다. 나를 향한 팬심은 변하지 않았지."
그런데 그것이 근무 중 무단 이탈이었다니. 징계를 받고도 남을 사유라 할 말이 없었다."
응. 아마 사인을 받았던 책을 전부 압수 당할 거 같다던데?""
··· ···""
진짜 불쌍하네."
마음 같아서는 가르츠를 도와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빼앗긴 사인만 하더라도 한 트럭은 될 테니까."
하지만 세실리는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해는 하지만 근무 이탈은 용서할 수 없다나 뭐라나."
나도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다."
애당초 사인본만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이번 일을 계기로 발락 경도 정신을 차려야겠지. 게다가 팬사인회는 오늘만 하는 게 아니잖아?""
······오늘만 할 생각이었는데? 1년에 한 번씩 하다가는 큰일날 것 같아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몰래 전해줘.""
세실리도 가르츠가 딱하긴 딱한 모양이다. 내가 팬사인회를 하지 않겠다고 하자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비록 근무 이탈은 명백한 잘못이라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대신 궁금한 점이 있다."
그나저나 왜 걸린 거야? 가르츠 씨는 나한테 사인만 받고 갔거든. 잠깐 화장실 갔다 온다고 하면 되잖아.""
우연히 동료 중 한 명이 화장실에 있었거든. 그냥 운이 없는 거였지 뭐.""
진짜 불쌍하다. 리퍼인만큼 분명 머리도 똑똑할 텐데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지."
어쩌면 군대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숭고한 사명을 갖고 있어도 군대의 본질은 어디 가지 않으니까."
어쨌거나 조만간 가르츠에게 몰래 사인본을 줘야 할 것 같다. 근무 이탈을 할만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안 주면 미안하다."
'또 뺏기면 팔자라고 생각해야지.'"
그때라면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까. 나는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며 왕궁으로 향했다."
아까 말했듯이 데스칼은 현재 업부 및 가르츠의 징계 건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
그러니 세실리의 어머니이자 장모님인 아이실리아만 함께 식사를 할 예정이다."
고생하셨어요, 여러분. 차린 건 없지만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해요.""
언제 봐도 세실리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장모님이다. 차이점은 앞머리의 유무랄까."
아이실리아는 이마를 드러낸 헤어스타일인 반면 세실리는 앞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스타일이다."
그녀와 처음 마주하는 아델리아와 케이트도 구분을 위해 두 사람을 번갈아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가까이 보니 두 분 모두 아름다우시네요. 제 딸아이에 비해서 모자란 점이 없으세요.""
부인께서도 아름답습니다. 반려께서 없으셨다면······""
툭-"
나는 케이트가 또다시 말실수를 하기 전에 그녀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건드렸다."
이에 그녀가 아차하더니 기침으로 말을 흘린 후, 재차 입을 열었다."
세실리 님의 외모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호호. 고마워요. 그나저나 케이트 추기경 님? 케이트 추기경께서도 제논 님과 이어지신 건가요?""
내가 아델리아와 이어졌다는 건 아이실리아 그녀도 알고 있다."
마리가 언론에 퍼뜨린 사실과 더불어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확신을 가졌을 테니까."
하지만 케이트는 아니다. 케이트는 최근에야 나와 이어진 사이다."
네. 앞으로 제논 님을 위해서 제 한 몸 바칠 계획입니다.""
그렇군요. 제논 님?""
편하게 아이작이라고 불러주세요, 장모님.""
원래 아이실리아는 나를 아이작이라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사실상 제논 또한 내 이름이긴 하지만 존경심이 느껴진달까. 어감에서 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그건 힘들 것 같네요. 제논 님께서 기적을 보여준 이상 우리 마족은 영원한 존중을 보여드릴 거예요.""
으음······ 그럼 제가 승천하기 전까지만 어떻게 안 될까요? 어디까지나 이 자리처럼 개인적일 때만.""
그 정도면 괜찮겠네요. 그러면 아이작 님?""
네. 말씀하세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부디 제 딸아이를 외면하지 말았으면 해요.""
한 명의 마족이 아니라 한 명의 어머니로서 부탁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아이실리아 입장으로서 세실리가 나와 이어지는 건 박수를 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내가 세실리를 모질 게 대하거나 소홀히 대할 수도 있다는 걱정."
그런 일은 없겠다만 딸을 가진 어머니로서 당연히 가질 법한 걱정이다."
디저트는 다양한만큼 각각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특정 디저트만 골라 먹는 경향이 강하답니다.""
······네. 그렇죠.""
나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겨우겨우 대답했다. 연륜이 느껴지는 섹드립에 순간 당황해버렸다."
그러고보니 세실리와의 첫날밤 당시에도 아이실리아가 나에게 말했다. 나를 위한 디저트가 준비돼 있었다고."
그 디저트의 정체는 바로 세실리였다. 그것도 가터 벨트와 승부 속옷까지 착용한 세실리."
모든 준비 작업이 그녀의 손에서 시작됐다 했으니 디저트로 비유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장모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디저트가 많다지만 도리어 그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거든요.""
장점이라면 어떤 장점이죠?""
달달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하나만 먹다 보면 질리는 법입니다. 하지만 맛이 가지각색이라면 이것저것 즐길 수 있는 거죠.""
어머.""
내 현답(?)에 아이실리아가 감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차만 홀짝일 뿐이었다."
양심이 찔리긴 하다지만 저것만큼 명답도 없을 거다. 어차피 바람둥이로 낙인찍힌 거 될대로 되라지."
'실상은 다르지만 뭐······'"
내가 디저트를 골라먹는 게 아니다. 디저트들이 알아서 내 입으로 들어오는 상황이다."
나는 그것들을 전부 꿀꺽하다 못해 부족해서 더 달라고 재촉하는 중이고."
오죽하면 디저트를 더 늘려야 된다고 의논을 할 정도일까."
그러면 안심할 수 있겠네요. 다른 게 아니라 진짜 걱정되서 한 질문이에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더욱 걱정하셨겠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렇다면 아이는 언제 가질 예정이죠?""
저 질문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사실 섹드립을 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이에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아이는 모든 상황이 종결된 후에 가질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마족은 악주기에만 아이를 가질 수 있다보니 기간이 남았죠.""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아이실리아. 나는 그녀의 입이 열릴 때까지 잠자코 식사만 했다."
이윽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식사가 거의 끝나가려던 찰나에 아이실리아의 입이 열렸다."
다소 여유로웠던 전과 달리, 꽤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 아이작 님?""
네. 말씀하세요.""
소식은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아이작 님께서 축복을 내리신 마족이 아이를 가졌다는 건 아시나요?""
······네?""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때 그 마족 여인을 말하는 건가."
사흘 전에 발생했던 일이니 왕궁까지 소식이 들어온 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정말로 임신을 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그저 진심을 담아 마족 여인의 바람을 들어줬을 뿐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미신에 가깝다."
그 여인이 신전에 방문해서 확인한 결과 임신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걱정되는 건 누구의 아이냐는 거죠.""
··· ···""
모라 님께 여쭈어보고 싶어도 이상하리만큼 대답이 없으셔서······ 괜찮은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