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720)화 (721/763)

 [예언을 그려다오.]"

 예언을 그려달라는 루미너스의 부탁."

 [내 모든 것이 그 아이에게 넘어갈 수 있도록.]"

 케이트는 그 부탁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수락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루미너스를 새로운 호칭으로 불렀다."

 아버지.""

  

 세이비어에서의 팬사인회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들었다."

 종말론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도 상대하기 어려웠지만 종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보니 곤란한 질문도 많았다."

 일례로 루미너스 님을 직접 만나신 적이 있는지, 아니면 내가 살던 세계의 종교는 어땠는지 등등."

 알려줘도 상관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나중에 골치아파질 수도 있어서 되도록 삼가했다."

 특히 지구와 이 세상의 종교는 다른 점이 훨씬 많다. 일단 신이 직접 세상을 통치하는 것부터 다르다."

 심지어 신의 존재마저 불투명하다보니 문화적인 분야에서 심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답하지 않았다."

 고생을 많이 하신 얼굴이군요.""

 하하하. 예. 뭐······""

 다른 국가에 비해 고된 팬사인회를 끝낸 후에는 당연하게도 지도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세이비어 교국의 지도자라함은 교황이자 전대 대심문관이었던 남자, 브리크 로렌스."

 그리고 멸망기사를 작성한 로만의 친아버지기도 하다."

 '무슨 떡대가······'"

 브리크와 직접 만남을 가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로만의 군만두형 사태 당시에는 브리크가 바쁜 나머지 못 만났으니."

 그런데 직접 바라보니 덩치가 장난이 아니다. 보통 교황하면 인자한 할아버지를 떠오르기 마련인데 정반대다."

 아버지와 비슷한 체격에다가 몸 곳곳에 존재하는 흉터. 전대 대심문관이라 했으니 매우 강력한 전투력을 가졌을 터."

 그래도 교황의 자리에 오른만큼 신앙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민감한 주제 때문이겠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여태까지는 지도자들이 먼저 말을 꺼냈지만 이번에는 이쪽에서 말을 꺼냈다."

 원래라면 가만히 있을 테지만 세이비어의 상황을 보고나서 생각을 바꾼 것이다."

 아무래도 이러한 상황에서 브리크가 먼저 입을 열면 마음이 매우 복잡해지겠지."

 브리크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눈치채고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주제 말입니다만······ 근거가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루미너스 님에게 여쭈어봐도 똑같겠죠.""

 으음······""

 내 대답이 시원찮았는지 브리크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험상궂은 얼굴이어서 인상을 구기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겼다."

 하지만 그로서도 뾰족한 수는 찾지 못할 것이다. 그저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릴 뿐."

 때가 되시면 전부 아실 겁니다. 조바심이 드시겠지만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십시오. 세이비어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세이비어는 괜찮습니다. 단지 루미너스 님께서 변이라도 당하실까봐 걱정되는 겁니다. 루미너스 님이 곧 세이비어 교국이니.""

 세이비어 교국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답이다."

 그의 말마따나 루미너스에게 큰 문제라도 생긴다면 세이비어 교국도 뿌리가 뽑혀나갈 터."

 타락한 추기경, 바크 사태와 궤를 달리하는 문제다. 어쩌면 현재보다도 더 심한 종말론이 퍼질 수도 있다."

 그나저나 궁금한 부분이 있는데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네. 물어보세요.""

 제논 님께서 본래 살던 곳의 신들께서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팬사인회에서 자주 받았던 질문 중 하나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잠깐 고민했다."

 팬사인회 당시에서는 혹시라도 모를 악마 숭배자들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이 세상에 소환할 때도 그들은 지구와 차원을 강제로 연결시켰다. 조금이라도 힌트를 준다면 그걸 이용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브리크는 교황이다. 바크처럼 타락하지도 않았을 거고 무엇보다 케이트 다음으로 루미너스와 가깝다."

 그래도 밑밥 정도는 까는 게 좋겠지. 전생의 나는 무신론자라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우선 이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신이 정말로 존재하지는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신을 믿지 않고 살고 있었죠.""

 괜찮습니다. 지금이라도 믿고 계시니 아무런 문제도 없죠.""

 다행이네요. 제가 살던 곳의 신들은······""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 '세대 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도 만약을 위해서다."

 더구나 내가 알고 있는 종교라 해봤자 기독교와 불교밖에 되지 않는다.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체제에 가깝기도 하고."

 브리크는 내 설명을 들으며 처음에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가면 갈수록 점점 놀람으로 변했다."

 이윽고 대략적인 설명이 모두 끝났을 때쯤에도 경악한 얼굴로 나에게 다급히 질문했다."

 그, 그럼 제논 님의 세상은 한때 인간이었던 성자들이 신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는 소리입니까?""

 네. 그렇죠. 제가 지금 이 세상에서 성자니 뭐니하고 있지만, 그 분들에 비해서는 부족합니다. 이건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세상에 루미너스 맙소사······ 필멸자가 신으로······""

 그렇게나 놀랄 일인가. 나는 험상궂은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입을 틀어막는 브리크를 보며 의아해했다."

 브리크는 이후로도 한참동안 마음을 추스리는 것 같더니 나를 힐긋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지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 분들에 비해서 부족합니다. 종교로 변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신이 될지언정 종교가 될 가능성은 낮다. 신이 되는 것도 내 개인적인 욕심이 짙게 깔려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랜 시간동안 함께 있고 싶은 마음.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내 마음도 모르는지 브리크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그분들도 스스로가 종교가 될 줄은 모르셨을 겁니다. 단지 깨달음을 전수하기 위해 살신성인을 하셨을 뿐.""

 저는 그분들과 달리 깨달음을 준 게 없습······""

 너무 많아서 특정 지을 수 없는 거겠죠.""

 브리크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했다."

 내가 여태까지 이룩한 업적들만 본다면 음······ 나열해봤자 길어질 것 같으니 패스."

 하지만 깨달음은 별개의 문제다. 기독교는 고대 로마에 '도덕성'을 선물했으며, 불교는 '포용성'을 가르쳤다."

 반면에 나는? 가르친 거라고 해봤자 목소리를 모으라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목소리를 모이는 건 이미 테르스 왕국과 마키나에서 했다."

 그런 걸로 따지면 제이로스 혁명 당시 혁명을 주도했던 제이로스와 마키나 혁명의 가이스트가 성자로 취급받아야지."

 '기독교만 해도 파급력이 장난 아니었으니까.'"

 야만적인 생활상이 팽배해 있던 고대에 도덕을 선사한 기독교."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문화 충격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아예 종교가 바뀌어버렸으니 그 파급력이 얼마나 강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그 정도 위치까지 오를 거라고는 생각치도 않았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수많은 분야에 발자취를 남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를 그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세상은 신의 존재가 명확하여 문화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다. 그거 때문에 내가 유명세를 탄 것도 있다."

 꽤 복잡한 상황이다보니 깊게 파고들어봤자 머리만 아플 것 같다. 이런 건 시원하게 넘기도록 하자."

 음······ 아무래도 평행선을 달릴 것 같으니 다른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무슨 이야기······""

 그······ 로만 씨는 최근 어떻게 지내시죠?""

 군만두형을 당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로만. 신앙심이 강해도 자식 이야기만큼은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브리크도 더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는 캐묻지 않았다. 이어서 그가 입을 열었다."

 최근 신성력이 급격히 강해져 명상에 들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예. 다만 폐쇄공포증에 걸려서 이단심판관의 자리를 놓을 수밖에······""

 ··· ···""

 그건 좀 미안해지네."

 *****"

 브리크는 아이작과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예배실로 향했다."

 여태까지의 정황들을 보았을 때, 좌시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으니."

 또한 브리크는 케이트 이전에 루미너스와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한 인물 중 하나다."

 이단심문관으로서의 강직한 신앙심을 토대로 교황의 자리까지 오른 몸. 신실함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나, 아이야.]"

 교황만 들어설 수 있는 개인 예배실에서 브리크가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미너스의 따스한 말이 뇌리에 울려퍼졌다."

 브리크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진 것도 잠시, 이내 굳게 다잡으며 조용히 물었다."

 '빛과 희망의 신, 루미너스시여. 저와 제논의 사이에 있던 일을 모두 지켜봤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 모두 지켜봤단다.]"

 '허면,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는 내심 두려웠다. 루미너스를 믿는 신자로서 그에게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의심'. 그는 루미너스를 아주 약간이나마 의심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집필했다지만 사실상 대필이나 다름없던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기사."

 작품의 결말은 교황인 브리크조차 혼란에 빠뜨릴만큼 위험하고 도전적이었다."

 '저는 제가 저지른 죄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의심이란 건 상대를 믿기 위해 품는 감정이라 배웠습니다.'"

 [··· ···]"

 '루미너스 님은 저희를 사랑하십니까?'"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된다. 신들 또한 마찬가지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알고 있기에 효를 품으며 노력한다.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기뻐하는 것이 부모였으니."

 하지만 부모의 사랑이 의심되는 순간 자식은 어긋나기 마련이다. 부모가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절망하는 법."

 브리크는 부디 그러한 대답이 나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신들께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진실만을 대답할 터."

 길고 긴 침묵 속에서, 루미너스는 온화하지만 씁쓸해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건 변함없는 진실이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다만······]"

 그 대답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브리크는 루미너스의 뒷말을 듣고 다시 긴장했다."

 이윽고 루미너스는 다시 한 번 한참을 망설이더니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겨우겨우 꺼냈다."

 [내 지은 죄가 너무 큰 나머지 항상 그림자에 숨겨놓고 있었지.]"

 순간 브리크의 머릿속에서 루미너스 교단의 교리가 떠올랐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 또한 있는 법이요, 빛에 눈이 멀면 그림자 또한 보이지 않는다."

 그 교리를 재차 곱씹고 있을 때쯤, 루미너스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저지른 죄를 생각했을 때, 너희를 가르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우리는 너희를 무시할 수 없었단다. 우리의 품에 안긴 너희는 너무나 작고, 가여웠으며, 사랑스러운 존재였으니.]"

 '··· ···'"

 [그럼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하나 하도록 하마.]"

 무려 신이 필멸자에게 묻는 질문. 브리크는 당황도 잠시 하나의 단어도 놓치지 않게 집중했다."

 이윽고 루미너스는 자신을 굳게 믿는 자식을 향해 조용히 질문했다."

 [너희에게 있어서 나는 훌륭한 부모였니?]"

 케이트와 전혀 다른 상황이다. 그녀의 실질적인 부모는 루미너스나 다름없었으니."

 그러나 브리크를 포함한 다른 신자들에게는 문자 그대로의 '신'이다. 부모라기에는 멀어도 너무 먼 존재."

 브리크는 그 질문을 듣고 생각을 정리하더니 이내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자식이 죄를 지어도 자식이듯이, 부모가 죄를 지어도 부모입니다. 루미너스시여.'"

 [··· ···]"

 '과거에 루미너스 님께서 어떤 죄를 저지르셨는지 모르지만, 루미너스 님께서는 부모의 역할을 충분히 하셨습니다.'"

 [······고맙구나.]"

 브리크는 느낄 수 있었다. 루미너스가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그에 그 또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루미너스가 사뭇 충격적일 수도 있는 얘기를 꺼냈다."

 [그러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신탁을 너에게 내리마.]"

 '마, 마지막 말씀이십니까?'"

 [그래.]"

 루미너스는 브리크가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때를 기다리거라.]"

 신탁답다면 신탁답게 정말 애매한 말."

 [그러면 목소리가 모든 진실을 밝힐 것이니.]"

 그 신탁과 함께 루미너스와의 연결이 끊겼다."

 브리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을 뜨자 루미너스를 묘사한 조각상이 시야에 잡혔다. 마지막 예언을 내린 루미너스의 석상이."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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