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세실리에 비해서는 부족하다. 애당초 그녀는 서큐버스의 피를 이은 몸이어서 유전적으로 월등하다."
세실리는 마리의 부러움 섞인 말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피식거렸다. 그러더니 그녀의 이마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런 각오로 3명 이상 낳을 수 있겠니? 네가 선택한 거잖아.""
아이작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음. 그건 부정할 수 없네.""
마리와 세실리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케이트와 대화했다."
첫날밤 이후 한동안 밤일을 책임지다가 다시 본분으로 돌아온 그녀. 겉으로만 본다면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도 꾸역꾸역 모아놓았다가 한꺼번에 터뜨리는 스타일이다. 더구나 나에 대한 욕심도 강하다."
지금 대화하는 순간에도 속으로는 금욕을 외치고 있겠지. 이건 확실하다."
아. 그리고 루미너스 님께서 아이작 님에게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요?""
무슨 일이 발생해도 당황하지 마시라고요.""
?""
케이트가 대신 전달해준 의미심장한 말. 부정적인 뉘앙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아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하길래 저런 말을 해준 걸까. 일단 평범한 일은 절대 아닐 것 같다."
혹시 건강과 관련된 건······""
그건 아닙니다. 아이는 건강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더욱 모르겠는데. 무슨 일이 생기길래 당황하지 말라고 강조한 거지."
픽!"
그때였다. 귓가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꽂혀들었다."
그 소리에 크게 움찔하여 뒤를 돌아보니 순식간에 사위가 고요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마리는 출산이 용이하도록 원피스형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 위에 이불을 덮고 있다."
그 이불의 아랫부분, 정확히는 마리의 하반신 쪽이 무언가로 서서히 젖어가고 있었다."
양수가 터졌다. 이 말은 즉······"
빠, 빨리 어머니와 유모를 불러줘! 어서!""
으, 응!""
출산이 코 앞까지 들이닥쳤다는 뜻이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간이다."
어머니와 유모는 준비를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상황. 당황하지 말라는 뜻이 이거였나."
내가 다급히 세실리에게 부탁하자 그녀는 텔레포트를 통해 이동했다. 아리엘과 릴리도 하녀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내보냈다."
케이트는 혹여 잘못되지 않도록 축복으로 방 전체를 에워쌓았다. 이리 된다면 산모와 아이 모두 잘못될 일은 없을 터."
아으으······!""
그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다. 나는 전보다 더욱 고통스러워하는 마리의 손을 꼭 잡았다."
아리엘의 새싹을 입에 머금고 있어도 엄청 아픈 모양이다. 유달리 진통이 심한 케이스인 건가."
스윽-"
내가 손을 잡고 있을 때 마리의 다른 손이 나에게 내밀어졌다."
그것도 잡아달라는 건가 싶어서 손을 뻗는 순간, 그녀의 손이 홱- 지나쳤다."
텁-"
이윽고 내 머리카락을 꽉 붙잡았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멍해졌을 때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이게 뭐야! 책임져! 책임지라고!""
아아악! 마, 마리! 잠깐. 잠깐만!""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는데! 내가 미쳤지! 3명이나 낳는다고 해서!""
그녀가 꽥꽥 소리지르며 내 머리를 쥐어뜯을 것처럼 잡아당겼다. 다행히 건강한 신체 덕분에 머리카락이 뽑혀나가지는 않았다."
대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훗날 만물의 아버지를 만나면 머리채를 쥐어뜯는 걸로 승부를 봐야겠다."
벌써 양수가 터졌다고?! 유모! 서둘러 확인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머지않아 어머니가 유모를 대동하고 방에 도착했다. 나는 여전히 마리에게 머리채를 쥐어뜯기고 있었다."
이어서 유모가 이불 안으로 얼굴을 집어넣어 상태를 확인한 후, 밖으로 빠져나와 입을 열었다."
서둘러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아이작······""
아아악! 뜨, 뜯긴다! 마리! 뜯길 거라고!""
뜯겨! 이걸로 헝겊 대신 할 거야!""
미안해요, 유모. 마리가 내 머리를 잡고 놔주지를 않네요."
유모도 나와 마리가 찍는 콩트 아닌 콩트를 바라보다가 곧장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다."
그녀가 부탁한 건 적당한 온도의 물과 양동이. 탯줄을 자르기 위해 신성력으로 소독한 가위 등."
여태까지 어머니의 출산을 담당했던 유모였기에 준비는 누구보다 빨랐다.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가씨. 힘을 주셔야 합니다. 숨을 크게 몰아쉬고, 내쉬세요.""
으으으윽······""
유모가 마리의 입에 헝겊을 물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마리도 유모의 지시에 따라 강약을 조절했다."
물론 내 힘을 줄 때마다 내 머리카락이 뜯기기 일보직전인 건 변함이 없었다."
어쩌겠어. 아이를 위해서라도 참아야지. 이정도는 기꺼이 참을 수 있다."
'익숙해져······ 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마리는 내 머리채를 강하게 잡아당겼다가 놓았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대략 5번 정도 반복했을까. 상태를 확인하고 있던 유모가 소리쳤다."
나옵니다! 아가씨 좀 더 힘을······!""
유모의 응원은 미처 끝맺지 못했다."
아아악!""
허억!""
난데없이 유모가 비명을 지르더니 두 눈을 손으로 감싸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으니까. 그와 동시에 마리가 숨을 강하게 내뱉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출산은 원만하게 해결한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인 것일까. 나는 서둘러 고개를 아래쪽으로 돌렸다."
응애! 응애! 응애!""
탄생을 알리는 힘찬 울음소리. 전혀 시끄럽지 않고 옹알이에 가까운 울음소리다."
여기까지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탄생이겠지. 그러나 현재 내 시야에 들어오는 건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화아악!"
······어?""
이유는 전혀 모르겠지만."
유, 유모! 괜찮······ 저건?""
빛······?""
대체 무슨 일이······""
아이에게서 눈이 부실 듯한 황금색 빛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응애! 응애! 응애!""
결코 범상치 않은 탄생이자 신화 혹은 설화에서 볼 법한 장면."
······이, 일단 할 일을 해야죠! 유모!""
네, 네!""
내 딸은 세상을 향해 비범한 탄생을 알렸다."
시대와 세계를 막론하고 '탄생 설화'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당장 한국에서 유명한 탄생 설화 중 하나, 박혁거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박혁거세는 신라의 초대 국왕으로, 알에서 태어났다는 탄생 설화가 존재한다."
이외에 주몽이라던지, 견훤이라던지 등등. 한국만 하더라도 수많은 탄생 설화를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 그레이스의 탄생도 일종의 설화로 취급될 수도 있다."
솔직히 그 어떤 아이가 빛에 휘감긴 채로 태어나겠나. 눈뽕을 제대로 맞아버린 유모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들었어? 제논 님의 아이가······""
방금 봤어. 빛에 휘감긴 거 맞지?""
역시 신들께서 축복을 내려준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내 딸 그레이스가 태어나면서 빛무리에 휘감겼다는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태어나면서 빛을 내뿜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그레이스는 한동안 빛무리에 휘감겨 있었다."
마치 빛이 그녀를 보호하는 것처럼, 신성한 빛으로 하여금 절로 경건함이 들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했다는 것. 어디 부족한 곳 없이 멀쩡했다."
이상해.""
뭐가?""
정신적으로 힘든데 왜 잠이 하나도 안 오는 거지?""
아리엘의 씨앗을 입에 머금었다지만 출산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던 마리."
그녀는 잠도 안 자고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데 잠을 못 자고 있다."
아직 낮이라지만 보다 더 좋은 회복을 위해 잠은 필수다."
게다가 방금 전 어머니의 조언으로 조금 걷고 왔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원래 그렇데.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어머님께서는 어떻게 4명을 낳으신 거지? 이제 곧 한 명 더 낳으실 텐데 정말 대단하시다.""
참고로 이번에 출산을 경험한 마리는 어머니를 더욱 존경하게 됐다."
한 명으로도 이리 벅찬데 릴리까지 4명, 그리고 또 한 명 더 낳을 예정이었으니."
예로부터 다산은 금실의 증거이자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위대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남자는 다둥이를 낳을 정력을, 여자는 그 남자와 다둥이를 버틸 수 있는 강인함을."
그런 의미에서 마리가 어머니를 존경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작.""
응. 말해.""
얘가 정말로 우리 아이가 맞지?""
마리는 자기 옆에 누워있는 사랑스러운 친딸, 그레이스를 바라보며 나에게 물었다."
나를 닮아 붉은색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 다만 이목구비는 마리와 똑닮았다."
누가 봐도 나와 마리 사이에 낳은 딸이라는 걸 눈치챌 정도다. 여기서 특이할 점은 바로 빛."
태어날 때도 빛을 내뿜었으며 지금도 그 휘광이 약간이나마 존재했다."
물론이지. 네 배에서 나온 아이야.""
신기하다. 이렇게 큰 애가 그 자그만한 구멍에서 나왔다고?""
마리가 그레이스의 볼을 톡- 톡- 건드리며 신기해했다. 그러자 꾸물꾸물거리는 그레이스."
신성력을 무럭무럭 받아먹어서 그런지 그레이스는 우량아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럼에도 난산을 겪지 않고 몇 번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쏙- 나왔으니 신기하다면 신기하다."
이것만으로도 애정을 가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지만, 특별한 점은 끝나지 않았다."
어머님은 막 태어난 아이는 보통 쭈글쭈글하다고 들었는데 우리 그레이스는 아니네?""
처음에는 쭈글쭈글했어. 1시간도 안 되서 이리 된 거고.""
갓 태어난 아이는 양수 때문이라도 쭈글쭈글하다. 그거 때문에 충격을 먹는 산모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다르다. 처음에는 쭈글쭈글하긴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해졌다."
지금도 선명한 이목구비와 더불어 머리카락도 꽤 많은 편이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태어난 지 며칠 된 아이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우응······""
마리가 연신 볼을 찌르자 그레이스가 옹알이를 한다. 그 옹알이에 마리가 엄마 미소를 짓는다."
빛무리에 휘감겨 있어도 그레이스는 내 딸이다. 사랑하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리엘도 생물학적으로 따지자면 내 딸이긴 해도 그레이스가 좀 더 각별히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아리엘이 소중하지 않다는 건 전혀 아니다. 나는 절대 차별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레이스.""
우응.""
앗. 혹시 내 말에 대답한 거야?""
그런 거 같은데?""
내가 긍정적인 대답을 꺼내자 마리가 베시시 웃었다."
우리의 화목한 분위기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레이스도 베시시 미소를 지었다."
'······잠깐만. 웃는다고?'"
재차 확인하니 방긋방긋 웃고 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절로 녹을 정도다."
신생아에게 미소는 자극으로 인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은 지나야 가능한 일이다."
빛무리에 휘감겨 태어났던만큼 평범한 아이라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귀여우니 됐지.'"
아리엘, 릴리, 그레이스. 마이샬 가문의 보물이자 사랑둥이들."
탄생 설화든 뭐든 뭐가 중요하겠나.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험 요소들을 사전에 차단해야겠지. 내 책임이 더욱 막중해지는 순간이다."
똑똑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