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건 왕은 만물의 아버지와 대면했고, 그에게 육체를 강탈당했다."
이곳에 속박된 것도 아마 루미너스가 조치한 거겠지. 영혼마저 빼앗긴다면 문제가 될 테니까."
생물학적으로 따지자면 모건 왕은 여전히 살아있는 몸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혼이 멀쩡히 남아있는 것일 터."
유체이탈에 가까운 상태라고 보면 편하다. 그런데 정작 그 몸은 다른 이가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러모로 기이한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다. 나 같은 필멸자가 감히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폐하의 옥체를 빼앗은 거죠?""
[거기까지 도달한 자가 나밖에 없었으니까. 그 자의 영혼을 감당할 자가 나밖에 없기도 했고.]"
신체를 얻었는데도 활동을 하지 못한 이유는······""
[그 놈도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인 거지. 신앙이 없는 성자는 그저 성자에 불과하니.]"
현재 만물의 아버지는 신으로 승천하기 직전의 단계인 성자의 단계에 접했다."
악마 숭배자가 제대로 활개쳐서 신앙마저 얻었다면 완전히 부활했겠지."
신의 영혼을 버틸 수 있는 건 성자의 권위에 다다른 자."
모건 왕도 한때 성자에 해당하는 신체를 얻었다는 소리다."
어디서 만나셨는지 아시나요?""
[어디서 만났는진 중요하지 않아. 이름을 알게 된 순간부터 존재를 인지할걸세.]"
모건 왕마저 신신당부하는 이름이다. 도대체 그 이름이 무엇이길래 이러는 건지."
만물의 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이름이라는 건 알고 있다."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 미쳐버릴 가능성이 높다 했으니 말 다했지."
[대신 영혼 상태가 아닌, 짐의 옥체를 얻었으니 현세에 존재하겠지. 악마 숭배자가 잘 알지 않겠는가?]"
그런 거라면 현자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네요. 알려줄지는 미지수지만.""
[만약 갈 거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는 걸 추천하지. 성자에 준하는 자들만이 그나마 버티는 게 가능할 걸세.]"
그럼 안 갈게요.""
[이보게.]"
모건 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이게 현명한 거다."
무력으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 건강한 정신도 없으니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리겠죠. 그럴 바에는 폐하가 말씀하신 것처럼 안 가는 게 나아요.""
[끄으응······ 그래. 너는 원래 이런 놈이었지. 깜빡하고 있었군.]"
아무튼 조언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만물의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조지는 건 뒷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우선 루미너스를 강제적으로 주신의 위치에 앉힌 뒤, 건강한 정신을 얻고나서 상대해야 할 듯했다."
물론 세상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니 만일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
'아리엘 머리 새싹을 좀 갖고 다녀야겠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클라크와 이어지는 새싹은 목걸이 형식으로 차고 다닐 예정이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질문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게나.]"
루미너스가 인종청소에 준하는 짓을 저지르셨다고 하는데······ 그거 정말로 혼자 하신 게 맞아요?""
이건 당사자는 물론 모라에게도 물어보기 꺼려지는 부분이었다."
모건 왕은 루미너스가 홀로코스트 상위호환격인 짓을 저질렀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만물의 아버지를 만행을 보았을 때 석연찮은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정말로 루미너스가 주도해서 저지른 일인지, 아니면 인류가 신들의 전쟁에 휘말려 소멸한 것인지."
[흐음······]"
모건 왕은 내 질문을 듣고 하늘을 힐끔거렸다. 루미너스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모양새다."
뒤이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대답했다. 허락을 받은 것 같다."
[그렇다네. 자신의 아내를 죽인 신을 소멸시키면서 신자들까지 모두 살해했거든. 물론 신들이 점차 소멸하면서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낮과 밤이 뒤틀리며 인류의 대부분이 사라졌다는 걸 감안해야 할 걸세.]"
나치 독일보다는 낫다는 거네요.""
[마냥 낫다고는······]"
쿠르릉!"
모건 왕이 반박하려던 찰나에 갑작스레 천둥 소리가 울려퍼졌다. 말 그대로 마른 하늘의 천둥이다."
비록 벼락까지는 떨어지지 않았으나 루미너스가 입 닥치라고 한 건 확실했다."
[거 참. 째째하기는. 그정도로 죽였으면 인정해야지.]"
······얼마나 죽이셨는지 아세요?""
[자네는 지금까지 먹은 빵의 갯수를 알고 있나? 그거랑 동급일걸세.]"
··· ···""
저 대사를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는데. 하여튼 전쟁의 신이셨으니 수도 없이 생명을 취했을 것이다."
[다른 질문은 더 없는가?]"
딱히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부디 안녕을 빌도록 하지. 아참.]"
슬슬 헤어지려고 하던 찰나, 모건 왕이 무언가 뒤늦게 알았다는 듯이 나를 불렀다."
나도 그의 조언이라면 원없이 받을 생각이어서 그를 바라봤다."
[설령 만물의 아버지의 진명을 들어도 혼란스러워하지 말게나. 그 찰나의 순간이 자네의 영혼을 빼앗을걸세.]"
유달리 강조하는 만물의 아버지의 진명.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그 진명이 무엇이길래 저 정도로 경계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은 호기심의 동물."
나는 그 진명의 힌트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 모건 왕에게 물었다."
진명에 대한 간접적인 힌트라도 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에 대한 모건 왕의 대답은."
[자네도 이미 알고 있네.]"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
모건 왕과 만남을 가진 후에는 계획대로의 일을 진행했다."
가족들과 애인들은 내가 떡밥을 뿌렸을 때를 대비하여 계획을 세웠으며, 나 또한 머스크와 손을 맞췄다."
여태까지 팬사인회를 펼친 적은 거의 없었으니 삐걱거리도 했지만, 머스크의 천부적인 사업 수완으로 수월히 진행할 수 있었다."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기사. 곧 있으면 그의 결말이 등장하게 된다.]"
멸망기사의 완결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로만이 맛깔나게 썼던지라 다들 호평을 내렸다."
이제 곧 완결이 난다면 세상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겠지. 그때까지만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하지만 할 일을 하더라도 결코 빼서는 안 되는 일이 있었으니."
끄으응······""
괜찮아? 도와줄 거 없어?""
당장 네 머리를 쥐어뜯고 싶으니까 조용히 해······""
마리의 출산일이 코 앞까지 다가왔다."
마리는 작년 4월 초에 나의 청혼을 받으면서 임신했다. 멸망기사가 완결에 다다르기 직전인 지금은 2월 초. "
인간의 임신은 약 10개월 정도 되니 산기가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대다. 그래서 미리미리 마리의 출산을 대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의 산기가 올라오기 시작하여 저택이 분주해졌다. 어머니의 주도 하에 다들 빠르게 움직인다."
신전은 병원의 역할을 하고 있기에 입원 신청을 하면 받아준다. 하지만 나와 연관돼 있다보니 그쪽에서 직접 찾아오더라."
물론 케이트와 세실리까지 떡하니 지켜주고 있는지라 크게 필요없었다. 잘못되지 않도록 기도만 해달라고 해야지."
으으······""
··· ···""
나는 진통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마리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손을 잡아줬지만 의미는 없었다."
이 세상은 아직 마취라는 개념이 없다. 특히 외과술은 처참할 정도로 수준이 낮다."
신성력이 모든 걸 대체하기 때문이다. 치료는 할 수 있어도 고통은 줄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진통을 비롯하여 모든 고통은 마리 홀로 담당해야 된다는 뜻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와 고통을 분담하고 싶었다."
흐으······""
진통이 어느 정도 갔는지 마리가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뒤이어 감았던 눈을 슬금슬금 떴다."
초첨이 나가기 직전의 푸른색 눈동자. 나는 땀에 젖어 달라붙은 앞머리를 치워줬다."
그러자 마리가 힘을 주며 내 손을 꽉 붙잡았다. 힘이 다 빠져나갔는지 강하지도 않았다."
아이작······""
필요한 거라도 있어?""
그냥······ 옆에 있어줘······""
다른 건 다 필요없고 옆에 있어달라는 그녀의 부탁. 기꺼이 들어줄 수 있다."
이에 말없이 그녀의 이마에다가 키스하고 있을 때였다."
엄마. 많이 아파?""
아파?""
침대 옆으로 귀여운 꼬꼬마 둘이 마리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한 명은 아리엘이고, 다른 한 명은 릴리다."
아리엘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릴리는 어느새 짧게나마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마리는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두 소녀에 힘겹게나마 미소를 지어줬다."
난 괜찮아. 아리엘은 곧 동생이 태어나고, 릴리는 조카가 태어나겠네?""
동생 못 됐어. 엄마를 아프게 하고.""
못 됐어?""
아리엘이 툴툴거리자 옆에서 릴리가 따라말한다."
두 소녀 모두 적발금안이라는, 마이샬 가문의 특징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자매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는 베베 꼬이다 못해 실타래처럼 얽힌 족보라지만, 지금은 언니와 동생처럼 지내는 중이다."
아리엘.""
응. 엄마.""
동생이 태어나면 아리엘이 잘 지켜줄 거지?""
마리가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물었다. 부모님이 첫째에게 할 만한 질문이다."
그녀도 이제 곧 부모가 된다는 뜻이며 아리엘을 자기자식으로 인정했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리엘도 마리의 따스한 마음을 읽었는지 베시시 웃었다. 정말이지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미소다."
아참. 엄마 이거.""
뽁!"
그때 아리엘이 자기 머리 위에 난 새싹을 뽑아 마리에게 전달했다."
마리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새싹을 받아들였다."
만약 아프면 이거 먹어. 그러면 나아질 거야.""
······그걸 아리엘이 어떻게 아니?""
그냥 알고 있는 건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도 모른다는 뉘앙스로 대답하는 아리엘."
필멸자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천사였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래도 효녀다운 마음씨라는 건 변하지 않았기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어쩌면 실제로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지."
아으윽······!""
또다시 진통이 닥쳐왔는지 마리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에 서둘러 새싹을 입에 넣었다."
새싹을 입에 머금자 실제로 고통이 줄어들었는지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효과가 있어?""
응······ 아픈 건 똑같은데 그래도 엄청 편해졌어.""
어때? 아리엘 말대로지?""
자신이 도움이 됐다는 걸 아는지 아리엘이 우쭐거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뒤의 반투명한 날개가 파닥거리는 걸 보아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 옆의 릴리가 그 날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든다."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래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히르트 님께서 나에게 축복 그 이상의 선물을 주셨다."
아리엘이 없었다면 악마 숭배자에게 몸을 강탈당했을 테고, 마리가 고통을 전부 느껴야 했겠지."
신성을 먹인 건 넘어갈 수 있다. 전화위복이 되어 건강한 몸을 얻게 될 단초를 마련했으니까."
덜컥-"
마리가 한창 난관을 겪고 있을 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케이트와 세실리였다."
저 둘은 각각 루미너스와 모라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자들. 아무래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모양이다."
어때? 아직도 진통이 심해?""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세실리였다. 표정에서 걱정이 우러러 묻어나왔다."
마리는 그녀의 질문에 쓰게 웃는 것으로 대답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짐작할 것이리라."
아까는 엄청 아팠는데 아리엘 덕분에 괜찮아졌어.""
아리엘이?""
응. 아~""
마리가 입을 벌리며 입 안의 새싹을 보여줬다. 새싹을 통해 고통이 나아졌다는 표현이다."
그에 세실리가 묘한 눈으로 아리엘을 쳐다봤다. 여러모로 신기한 존재라고 느끼겠지."
그러는 동안 마리는 세실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약간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세실리는 좋겠다.""
응? 왜?""
골반이 넓어서 아이 낳기도 쉽잖아.""
마리의 골반은 결코 작은 편이 아니다. 도리어 몸매를 가꾼만큼 훌륭한 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