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숨 쉬듯이 영웅적인 업적을 달성하는 가문이다. 정작 본인들은 그 업적이 알려지는 걸 싫어한다."
어쩌면 선조가 행했던 죄가 드러날 수도 있으니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털썩-"
나는 클라크 할아버지 옆에 앉아 무엇을 조각하는지 잠자코 지켜봤다. 어떤 한 여인의 얼굴을 조각하고 있다."
뼈밖에 없는 손이지만 손재주가 상당히 좋은 건지 꽤 정교한 조각이다."
누구에요?""
[호크 애미.]"
··· ···""
순간적으로 흠칫거릴 수밖에 없는 발언이다. 저 나이대에 사람들이 으레 그랬듯이 입담은 걸쭉하다."
그는 좀 더 세밀하게 조각하면서 할아버지답게 옛날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그 전설이 사실이라면 다른 전설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구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거라서 믿기 힘들지만.]"
대표적인 전설은 뭐가 있는데요?""
[바다의 신을 찾으러 바다 속으로 잠수했다가 크라켄을 사냥했다는 거라든지. 아니면 마키나의 광산을 몇 개 만들어줬다던지 등. 꽤 많단다.]"
··· ···""
저게 전부 진실이라면 조금 놀라운데. 단순무식해도 가문의 무력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낮은 것도 아니다."
당장 우리 아버지조차 군대의 도움을 통해 드래곤을 토벌했지 않았는가. 할아버지는 한 술 더 떠서 군주들을 전부 죽였다."
'좀 억지 아닌가······?'"
역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 하면 우리 가문과 긴밀히 연관된 것 같다. 가문 자체가 영국 같은 놈인 셈이다."
그래도 이런 건 알려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괜스레 혼란을 유발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 이때까지만 해도 신경 끄자고 생각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작 님. 아이작 님 덕분에 시련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뭘 했어요?""
아이작 님이 진정으로 뭘 바라는지 깨달아 레티시 백작을 설득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또 뭐야."
또 무슨 착각을 하고 있길래 눈이 저리 초롱초롱한 거야."
케이트는 체리를 설득하는데까지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전에 언급했듯이 체리는 귀족이다. 그것도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 실세에 해당하는 백작급 귀족."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상당히 복잡하게 얽힐 수밖에 없다. 설령 정치적이지 않아도 여러모로 제한이 많다."
안녕하십니까. 루미너스의 충실한 종이자 창의 역할을 맡고 있는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라 합니다.""
미네르바 제국의 들보를 맡고 있는 레티시 블라썸 로즈베리 백작이라 하오. 루미너스 님의 대리인과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케이트와 체리의 아버지, 레티시 백작이 응접실에서 정식적으로 인사했다."
지난번 아이작과 만났을 때와 다르게 외관이 살짝 변해있는데, 분홍색 콧수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이작이 보았다면 '프랑클스 아저씨'라 생각할 법한 수염. 마치 성숙함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이뿐만 아니라 백작급에 해당하는 가문의 응접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꽤 화려한 풍경을 자랑했다."
그중에서도 로즈베리 가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벚꽃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정말로 봄의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같다."
안주인인 드모아 블라썸 로즈베리라고 해요. 루미너스 님이 총애하는 분과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티시 백작 옆에 앉은 여인이 예법대로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곧 20세에 접어드는 체리를 가진만큼 이제 막 40대에 접어드는 중년인."
꾸준한 관리로 비교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피부의 탄력이 대단했다."
분홍색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지닌 레티시 백작과 다르게 진한 금발을 가진 드모아."
케이트는 드모아에게 인사하면서 체리의 우월한 유전자가 어디서 나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외모든 아니면 몸매든 간에 말이다."
케이트 추기경 님께서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루미너스 님의 축복인 건가요?""
그리 말씀하시는 드모아 안주인께서도······""
처음에는 시덥잖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케이트도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면서 호감을 샀다."
한편 케이트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체리는 입을 꾹 다문 채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레티시 백작도 간간이 체리를 힐끔거리면서 케이트와 대화를 나눴다."
흠. 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을 때쯤 레티시 백작이 헛기침을 하며 주목을 끌었다."
뒤이어 그는 케이트를 바라보면서 진중함이 깔린 목소리로 질문을 걸었다."
케이트 추기경 님.""
네. 말씀하세요.""
듣자하니 제 딸이 케이트 추기경과 지낸다고 들었는데······""
뒷말을 흘리며 체리를 힐긋거리는 레티시 백작. 체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차만 홀짝거렸다."
이에 레티시 백작은 다시 케이트를 바라보며 본론을 꺼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 딸과 무슨 일을 하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케이트 추기경 님 정도 되시는 분이 무슨 이유로 제 딸과 어울리는지 궁금합니다.""
아. 그거 말이군요.""
나름 진지한 질문이었지만 케이트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지었다."
어차피 이번에 모든 일을 다 꺼낼 예정이다. 대신 상세한 건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체리는 저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체리가 없다면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정도죠.""
······그정도입니까?""
네.""
레티시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체리를 바라봤다. 체리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자 눈만 느릿느릿 깜빡일 뿐이었다."
그 반응에 레티시 백작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 때문에 맑고 명랑하던 아이가 저리 됐으니."
아이작의 촌철살인으로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렸다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지는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이것만큼은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레티시 백작이 상세한 정황을 묻자 케이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때문에 유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체리가 케이트에게 도움이 될만한 게 무엇이 있겠나."
'굳이 있다면······ 글을 쓰는 것밖에 없는데······'"
그릇된 철학으로 갈갈이 찢어버렸던 체리의 꿈이자 장점. 아이작 덕분에 새로이 생명을 얻은 희망."
생각나는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철학 가문 출신이니 다양한 철학에 대해 알려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겨우 그것들 가지고 케이트를 연결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다만 아이작 님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것만 알려줄 수 있습니다.""
제논 아니, 아이작 님과?""
깊은 고민에 빠져있을 때 케이트가 아이작이라는 연결고리를 언급했다."
처음에는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할 수 있었다."
체리는 아이작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제 꿈을 실현시켜줬으며 가문의 압박을 받지 않도록 도와줬다."
케이트는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루미너스의 종이라지만 아이작과 크고 작은 연관이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만약 아이작을 중심으로 삼아 서로 이어진 셈이다.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네. 체리와 저는 아이작 님을 중심으로 만남을 가졌고, 그 후로 뜻이 맞아 함께 일을 하게 됐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체리는 현재 아카데미에 휴학 신청을 한 상황이다. 휴학은 최대 1년까지이며, 그때까지는 글을 쓰는구나 싶었다."
허나 생각보다 더 큰 일을 하는 것으로 추측됐다. 무려 루미너스 교단의 추기경이 얽혀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
그것이 무력과 관련된 일이라고는 생각치도 않았다. 체리는 나약하디 나약한 일반인에 지나지 않으니까."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로즈베리 부부가 동시에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지금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디 체리가 아이작 님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협력해주십시오.""
예?""
그게 무슨 말······ 이시죠?""
이 만남의 이유를 꺼내면서 또다른 시련(이자 착각)을 시작한 밝힌 케이트."
로즈베리 부부는 케이트가 꺼낸 부탁에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루미너스의 종이라면 모를까, 아이작의 사도라니."
마치 아이작이 진짜 '신'이 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정작 본인은 루미너스의 사도인데도 말이다."
아이작 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신 분입니다. 억울하게 핍박당한 마족을 구원한 것부터 시작해 세상을 어지럽힌 악마 숭배자를 모조리 처단하셨죠.""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또한 신들께서 친히 데려오신 분입니다. 그 분은 현재 성자를 넘어 승천의 경지까지 목도하고 계십니다.""
과장 혹은 거짓말을 섞어서 진실을 포장하는 아이작과 다르게, 케이트는 오직 진실만을 입에 담았다."
신들이 데려온 것도 진실. 성자를 넘어서 승천의 경지까지 바라보고 있는 것도 진실이다."
이상함을 느낄 건덕지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여러모로 아이작보다 대단하다면 대단한 화법."
그리고 체리는 아이작 님에게 구원받으셨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백작님께서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 ···""
케이트의 뼈 있는 말에 로즈베리 부부가 체리 쪽을 쳐다봤다.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 담긴 표정이다."
현재 저와 체리는 아이작 님의 승천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체리는 그중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죠.""
저희 체리가요······?""
떨떠름하게 묻는 드모아 백작 부인. 그도 그럴게 쉬이 믿기 힘든 이야기다."
잔인하게 짓밟힌 재능이자 꿈을 아이작이 구원해준 것도 모자라 승천을 돕고 있다니."
마치······ 신화에서 나올 법한 내용이지 않은가. 신이 버젓이 실존하는 세계이기에 그쪽으로 사고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네. 제가 루미너스 님의 은총을 받았던 것처럼, 체리 또한 은총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운명인 셈이죠.""
운명······""
그래서 로즈베리 백작가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체리가 아이작 님에게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이건 체리도 결정한 바입니다.""
케이트는 길고 긴 이야기 끝에 요구하는 바를 꺼냈다. 이제 남은 건 레티시 백작에게 달렸다."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케이트는 루미너스에게 은총을 받아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니까."
체리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새로운 신앙으로 탄생 중인 아이작이지 않은가."
'정치'를 한참 초월한 '신앙'이다. 레티시 백작으로서는 거절하기에도 힘들겠지."
······정말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하지만 레티시 백작의 입에서 의외의 거절이 튀어나왔다. 그 거절에 체리가 레티시 백작을 쳐다봤다."
케이트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지만 예상 범주 안이었는지 최대한 침착을 유지했다. 우선 이유부터다."
이곳으로 오기 전, 체리로부터 로즈베리 백작가의 현황에 자세히 들었다."
어째서입니까? 로즈베리 백작가는 후계자 문제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케이트 추기경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이작 님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제 딸······ 의 존중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거절하는 것인가. 케이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체리를 기꺼이 아이작에게 보내도 로즈베리 백작가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도리어 이득이란 이득은 모조리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려 은총을 직접 내리는 것이다."
훗날 아이작이 '종교'로 탄생한다면 그 후광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터."
모든 사람의 의아해하고 있을 때, 레티시 백작이 두 손을 맞잡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본 아이작 님은 남의 의견을 존중하실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저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주신 분이기도 하셨죠.""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네. 제 딸이 아이작 님을 돕는다고 했을 때 깨달았습니다. 제 딸, 체리는 더이상 제가 품을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걸요.""
사실상 딸의 독립을 인정하는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죄책감에 발로한 결정인지는 잘 모른다."
그 말에 케이트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때쯤, 레티시 백작이 우려하는 바를 꺼냈다."
그러나 저는 아이작 님의 사상이 의심됩니다." "
사상······ 말입니까?""
네. 정확히는 인류를 믿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레티시 백작의 발언. 뒤이어 그가 이어서 말했다."
아이작 님께서는 피와 강철을 통해서 인류의 악이 어느 정도로 치닫을 수 있는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심지어 그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본인이 살던 세상의 이야기라 하셨죠.""
··· ···""
심지어 본인의 세상은 인류의 심한 악행으로 한 번 멸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라 해서 다를 게 있냐고 자조적으로 화두를 던지셨죠.""
레티시 백작은 아이작과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아이작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집중해서 파고든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들릴 법한 내용이다. 실제로 저 발언 이후 종말론이 한참이나 성행했다."
비록 잠잠해졌다지만 레티시 백작으로서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이 진실된 마음으로 인류를 믿고 있는가."
본인의 세상마저 인류가 악행으로 신들에게 심판을 받았다고 했으니 더욱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염세주의라고들 하죠. 피와 강철에서는 나치 독일이 악마 못지 않은 악으로 묘사됩니다. 거기에 대항하는 미국과 소련이 상대적으로 정의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죠?""
아이작 님이 말씀하셨듯이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는 형태로 경쟁하기 때문이죠. 이익을 쫒는다는 뜻입니다.""
맞는 말이다. 심지어 소련은 정의라기보다는 '복수'라는 테마에 맞춰 묘사했다."
미국조차 진주만 공습으로 거세게 분노하고, 나치와 일본 제국처럼 큰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터스키기 매독 생체 실험과 냉전 당시의 미국의 개짓거리를 본다면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저는 아이작 님이 정말 인류를 믿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그러니 케이트 님의 제안을 거부한 거죠.""
아이작 님께서는······""
케이트는 말을 하다가 간신히 억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목소리를 내어라고 외치고 싶다."
그리 된다면 효과가 반감되다 못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건 새하얀 종이가 색에 서서히 스며들듯이, 스타비르크로부터 퍼져나가야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