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675)화 (676/763)

 하으으······""

 내가 걸렸다는 듯이 빙긋 웃자 리나는 기이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처 가리지 못한 입이 파르르 떨리는 게 포인트다. 피부는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상태."

 정말이지 솔직하지 못한 성격은 여전하다. 황녀로 살면서 얼굴에 쓴 가면은 진작에 모두 박살났다."

 가면을 쓰고 얘기하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구나. 블러핑도 이런 블러핑이 없을 거야.""

 ··· ···""

 정말 무섭네. 작은 명분으로 데이트까지 이끌어낼 줄이야. 정말 감탄했어.""

 증인부터 시작해서 데이트까지. 굉장한 빌드업이다."

 만약 리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면 눈 뜨고 코 베이는 식으로 당했겠지."

 하지만 그녀의 가장 큰 실수는 스타비르크를 언급한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녀 쪽에서 말했다."

 스타비르크에서 있던 일이 인상 깊었어?""

 ······네가 아니었으면 난 크게 다쳤을 테니까.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고.""

 리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대답했다. 차마 시선을 마주치기 힘든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 거기까지는 상관없었어. 황녀로 살면서 위협을 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그러면 왜?""

 너는 정말 바보처럼 나부터 걱정해줬지. 그 누구도 탓하지 않고 말이야.""

 이제 어느 정도 가라앉았는지 찻잔을 들어올리며 대답한 그녀다."

 다른 한 손은 뺨에 갖다 댄 모습이 형언할 수 없는 귀여움을 선사했다."

 원래 귀여움과 거리가 먼 여자인데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더라. 여태까지 살면서 이런 일은 한 번도 못 느꼈어.""

 주변에 좋은 남자가 없었어?""

 다들 내 직위만 보고 달려드는데 좋은 감정은 하나도 없었지. 늦긴 했지만 마리가 널 죽도록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더라.""

 다 들켰다 판단했는지 리나는 거리낌없이 숨겨왔던 본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껏 차곡차곡 쌓였던 호감들이 스타비르크 사건으로 한꺼번에 터졌다고 보면 되겠지."

 황녀, 그것도 형제자매라고는 레오르트밖에 없는 그녀였기에 가면을 쓰고 생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데이트 하려고 구구절절 명분을 붙인 거? 맞아. 그런데 그 명분도 전부 필요한 일이라는 것만 알아줘.""

 증인이 필요하는 것도?""

 응. 아무래도 마리는······ 힘들겠지?""

 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마리를 증인으로 세우고 싶겠지."

 현재 마리는 딱 안정기에 돌입한 상황이다. 유산의 가능성은 거의 없고 아이가 무럭무럭 자랄 시간."

 다만 아이가 너무 잘 성장하는 탓에 낮잠을 자는 시간은 그대로다."

 괜찮을 걸? 지금도 가끔 가다 하고 있어.""

 그래도 괜찮은 거야?""

 루미너스 님 말씀으로는.""

 괜찮다 못해 권유하는 상황이다. 다른 이도 건강한 신체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뱃속의 아이에게도 무리가 없다. 도리어 마나를 더 쉽게,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성관계다."

 마리가 체력적으로 힘들어 할 뿐이지, 안정기에 돌입한 후부터는 옛날처럼 열심히 정을 나누고 있었다."

 어차피 당장 할 것도 아닌데 천천히 생각하면 되지. 급한 건 아니잖아? 네 말대로 데이트를 하는 모습만 보여줘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네 말도 맞아. 그냥······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해서.""

 리나가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

 세상에 리나가 저런 말을 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네 마음은 받아줄게. 그런데 리나.""

 으, 응?""

 증인은 한 명으로 충분해?""

 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질문했다. 리나의 성적 취향을 건드리는 질문이다."

 레파토리대로라면 얼굴을 잔뜩 붉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겠지. 나도 그리 예상했다."

 하지만 나와의 거리가 지근거리까지 좁혀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면이 전부 박살나 더이상 숨길 것도 없다 생각한 걸까."

 새하얀 피부가 빨갛게 물든 것까지는 똑같았다. 그러나 리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즈, 증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게다가 네 애인들은 하나같이 발언권이 뛰어나잖아?""

 ··· ···""

 마리, 세실리, 아르웬 여왕 이 세 명은 말할 것도 없고 레오나는 계급으로 따지면 왕족의 후손이지. 크로스 경도 네 애인으로 알려져 있으니 괜찮을 거고. 또······""

 리나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꼽으면서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떨떠름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반응도 반응이지만 무엇보다 '표정'이 압도적이다."

 흥분으로 인해 커질대로 커진 눈. 작게 걸린 미소. 마지막으로 홍조까지."

 자세히 보면 입에서 침이 떨어지는 것 같다. 세상에 얘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리나.""

 으, 응?""

 너 굉장히 변태 같은 표정 짓고 있어.""

 음란함이 가득 찬 표정 즉, 변태 같은 표정."

 내 말에 리나는 흠칫하더니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밝혔다."

 너도 나로 살아봐. 이런 취향 안 생기나.""

 ··· ···""

 뻔뻔해서 할 말이 없어지네."

 아무튼 리나가 차근차근 원자폭탄을 발사하기 위해 착실히 준비했으며."

 안 돼. 네 취향은 존중하고, 우리도 아이작의 밤을 버티기 위해 협력하고 있어서 기꺼이 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다 함께 하는 건 힘들 것 같아.""

 어, 어떻게 안 될까? 약이 안 들면 도구를 쓰면 되잖아.""

 도구를 쓰니까 밋밋해서 안 되겠더라고. 그리고 너까지 끼어들면 또 나눠야 돼. 엄청 오래 걸릴 걸?""

 이론적으로 가능해도 오래 걸릴 거라는 결과만 나왔다. 따라서 애인들이 머리를 맞대며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원자폭탄에 대해서 회의하는 게 아니라 밤일을 위해 고민하다니."

 '무슨 맨해튼 프로젝트야 뭐야.'"

 정말 기묘하다."

 리나의 리미트가 풀렸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본인의 취향을 거리낌없이 밝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성적 취향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마리, 세실리 이렇게 3명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모른다."

 애초에 리나는 제국의 일로 너무 바쁘게 돌아다녀 다른 사람들과 친해질 길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아카데미에서는 세실리와 친해질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다."

 다른 사람한테는 어떻게 밝히려고? 당당히 밝힐 수 있어?""

 너희들끼리는 취향 공유 안해? 저번에 보니까 2~3명씩 했잖아.""

 ······할 말이 없네.""

 할 말이 없어지는 답변이 돌아와서 넘길 수 있었다. 그래도 친분을 다져야 되는 건 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편이고 서로 얼굴도 안다. 유대감이라고 해야하나."

 다소 늦은 편이긴 하다만 충분히 노력한다면 리나도 잘 녹아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매사에 이성적인 리나라지만 취미를 밝힌 이상 벽은 없다. 평소처럼 티키타카를 하면서 놀면 끝이다."

 역시 예상대로 많이 모였구나.""

 떠들면서 놀다보니 아르웬도 찾아왔다. 무작정 찾아온 세실리와 달리 리나처럼 미리 연락을 하고 온 경우다."

 아르웬은 리나와 달리 응접실까지 데려갈 필요는 없었기에 즉석에서 대화하면 된다."

 왜 찾아온 거야? 혹시 나 보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조금 심각할 수도 있는 이야기라서. 혹시 모라 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이유를 아느냐?""

 응?""

 의외라면 의외인 질문이다. 원자폭탄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줄 알았는데 아니다."

 모라는 지금 세실리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일단 이건 숨긴 채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라 님은 왜?""

 다름이 아니라 다크 엘프 쪽에서 연락이 왔느니라. 모라 님께서 신탁을 내려주지 않으시다고. 꾸준히 기도했다만 신성력만 전달될 뿐,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고 나에게 급히 연락을 했느니라.""

 무슨 일인지 대충 알 것 같다. 모라는 헬리움의 마족뿐만 아니라 다크 엘프도 신봉하는 여신이다."

 알븐하임 추방 사건 이후에도 꾸준히 모라를 신봉하고 있으며, 엘프이다보니 마족보다 좀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모라가 부재 중이라는 것도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챘을 것이다. 아직 헬리움 쪽에서 별 말이 없는 걸 보면 확실하다."

 음······ 말보다는 현실을 보여줄게. 잠깐 따라올 수 있어?""

 무슨 일이 있는 건 확실한 모양이구나. 부디 별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별 일은 아니다. 내 저택에 잉여신이 한 명 눌러앉았을 뿐이지."

 나는 걱정스러워하는 아르웬을 데리고 모라가 지내는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어떻게 됐느냐."

 그 아이들이 원하는 걸 대신 알려줄 수 있니? 나중에 돌아가면 그때 다 들어주면 되잖아.""

 ··· ···""

 네가 보고 있는 나는 모라가 맞아. 그러니까 너무 혼란스러워하지 말렴.""

 세실리 못지 않게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비록 짓궂은 장난을 치지 않았다지만 그에 비견될 정도로 혼란스러워했다."

 그도 그럴게 엘프는 한때 신들을 보좌하던 천사다. 본능이든 뭐든 간에 다른 종족보다 신과의 유대감이 깊다."

 나는 지진이 난 것처럼 떨리는 아르웬의 은회색 눈동자에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줬다."

 너라면 충분히 잘 설명할 수 있을 거야. 모라 님이 완전히 소멸한 것도 아니잖아?""

 ······나도 이제 모르겠구나.""

 보아하니 반쯤 포기한 얼굴이다. 그래도 내 말마따나 모라가 소멸된 건 아니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1년이다. 1년 내외면 모라도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갈 터."

 수백 년의 수명을 지닌 엘프에게 1년은 순식간에 지나갈 테니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아르웬에게도 모라를 소개시켜 준 후에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세실리도 모라와의 대화가 끝난 참이다."

 다크 엘프들이 저희 헬리움으로 온다고요?""

 아직 확정된 건 아니야. 구세대는 알븐하임으로의 귀향을 원하고, 신세대들이 같은 종교를 믿는 헬리움으로 귀화를 원하는 거지.""

 이건 생각치도 못한 부분이네요. 흐음······""

 아르웬이 전달한 소식은 파장이 꽤 컸다. 당연히 알븐하임으로 귀향할 줄 알았던 다크 엘프들이 헬리움으로 귀화를 원하고 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 종교가 바로 저런 힘을 가지고 있다. 국경을 초월하다 못해 공동체를 이루는 종교."

 마치 지구의 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양상이다. 두 국가는 본래 하나였다가 종교 때문에 두 쪽으로 분리됐다."

 방글라데시도 한때 인도의 영토였다가 종교가 다른 탓에 독립한 케이스다.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사안이다."

 조심하는 게 좋아. 자칫하다가 내전이라도 발생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거니까. 다크 엘프는 다크 엘프대로 큰 상처를 남길 거고.""

 여왕님께서는 어떤 선택을 내리실 건가요?""

 내가 끼어들 사안이 아니라 복잡하지. 그들의 선택에 맡겨야 하니라.""

 다크 엘프의 인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장수종 특유의 낮은 출산율과 부족 생활로 인해 턱없이 적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인구가 전부 난민으로 들어온다면 갖가지 사건사고가 터질 확률이 높다. 지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공감할 수 있는 형성대가 마련돼 있다는 것. 헬리움은 종교가, 알븐하임은 마음의 고향이라는 공동체가 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나던지 간에 세실리와 아르웬의 머리가 아파질 수밖에 없다. 인간도 아니고 무려 다크 엘프다."

 우선 급한 건 아니니 넘어가는 게 좋겠네요. 여왕님도 스트레스를 풀려고 여기를 찾아온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러면서 나를 쳐다보는 두 여인들. 그동안 쌓인 게 많은 탓인지 욕망이 가득하다."

 옛날 같았으면 두려워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건강한 신체를 얻은 후로는 여유롭다."

 오히려 저들이 나를 어떻게든 이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그저 방긋 웃어줄 뿐이다."

 안녕! 심심해서 왔는데 놀아도 돼?""

 물론. 그런데 지금 아카데미는 방학인가?""

 방학도 방학이지만 슬슬 졸업할 때지. 난 졸업장만 따면 되걸랑.""

 마지막으로 레오나까지 저택에 찾아오면서 애인들이 다 모였다.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케이트와 체리는 오지 않았다. 두 명 모두 따로 할 일이 있다나 뭐라나."

 아무튼 한 자리에 모여 각종 게임도 하고, 영지에서 진행되는 축구도 보면서 즐겁게 놀았다."

 물론 진지한 이야기가 오고 가지 않은 건 아니다. 자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맡은 사람들인지라 외교적인 대화도 오고 갔다."

 악마 숭배자가 원자폭탄을 발명하는 것만큼은 최대한 막아야 해. 듣자하니 알븐하임에서 연구 중이라 하지 않았어요?""

 연구 중이다만 입증까지는 오래 걸리니라. 하지만 굳이 원자폭탄이 아니더라도 '합체'를 통해 비슷한 위력을 낼 수도 있겠지.""

 합체는 엘프들끼리 가능한 게 아니에요?""

 원리만 안다면 못할 건 없느니라.""

 가장 중요한 건 원자폭탄에 대한 것. 나중에 정식적으로 각 나라의 대표를 모아 회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따라서 이번 회의는 어디까지나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생각은 다들 비슷했다."

 원자폭탄의 발명은 피할 수 운명이라 해도, 그것이 악마 숭배자의 손에 떨어지는 것만큼은 피해야 된다."

 당장 엘프의 합체가 비슷한 위력을 낸다는 게 알려졌으니 그 원리도 철저히 막을 예정이다."

 나는 국정에서 한 발자국 멀리 떨어진 입장이라서 듣기만 했다. 그래도 재미없는 건 아니라 자리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이작.""

 응?""

 너희 세상에서는 원자폭탄이 수백 개를 넘어 수천 발이나 있다는 거. 그건 다른 사람한테 얘기했어?""

 그때 무언가 떠올랐는지 세실리가 나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으니 조금 당황스럽다. 때문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이런 무기가 한두 개도 아니고 수천 개? 그게 무슨 말이야?""

 당장 봉인해도 모자랄 무기를 어째서 수천 개나······""

 정말 화력에 미쳐버린 세상이구나. 무슨 생각으로 만든 건지······""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리나를 제외하고 다들 혼란에 빠진 모습이다. 대신 당황스럽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리나와 세실리도 비슷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 건 없겠지. 어차피 조만간 밝힐 계획이었기에 대수롭지 않았다."

 응.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강대국끼리의 전쟁을 억제하는 역할도 맡고 있어. 한 번 제대로 싸웠다가는 서로 끝장나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