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 척하지 말고. 과학으로 이만한 위력을 내는 게 가능하냐고 물었어.""
가장 먼저 날 찾아온 사람은 마리가 아니라 세실리였다. 최근 헬리움은 '교국'의 지위를 얻는다는 소리가 있어 바쁘다."
당연하게도 왕위 승계자인 세실리도 한창 바쁠 텐데 내 저택으로 달려온 것이다."
가능하니까 적은 거겠지? 안 그러면 적지도 않았어.""
정말이었구나. 나는 네가 극적인 효과를 위해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는데.""
믿어주는 거야?""
믿어야지.""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력이 위력이다보니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세실리조차 믿지 못한 모양이다."
나야, 원자폭탄이 발명된 세상에서 왔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다."
하기야 마법으로도 하기 힘든 걸 오직 과학 하나만으로 해냈으니 이해는 간다."
마법으로도 이런 위력은 못 내?""
나랑 비견되는 마법사들이 힘을 모은다면 가능할 걸? 그 전에 제지당하겠지.""
일상이면 몰라도 파괴력에만 집중하는 건 힘든 모양이네.""
애당초 익스플로젼을 화살처럼 발사하는 세상이 이상한 게 아닐까?""
세실리가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하기야 포격의 위용을 본다면 저런 말이 나올만도 하다."
마법은 발동시키기 위해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만 포격은 그럴 필요도 없다. 장전 후에 발사가 끝이다."
물론 포탄을 제작하기 위해 시간이 걸리지만 재료만 충분하면 공장에서 찍어낼 수 있다."
아무튼 원자폭탄? 그걸 선보인 이상 또다시 국제 회의가 열릴 거야. 아르웬 여왕님도 참석하겠지.""
이걸 제작하지 말자고 회의하는 거야?""
그것도 있지만 눈치 게임 시작이지. 특히 약소국에서 눈에 불을 켜고 발명하려 들 걸?""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북한이 미친듯이 핵무기를 발명하려던 이유기도 하다."
핵무기는 군사력이고 나발이고 전부 씹어먹을 정도로 강력한 무기다. 오죽하면 미국조차 눈치를 보면서 어루고 달랠 정도다."
만약 약소국이 핵무기를 발명하게 된다? 그 약소국이 공공의 적이 되더라도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발사하면 좆된다."
비록 이 세상은 원자폭탄을 발명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사실상 '미래'나 다름없어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너무 우려할 필요는 없어. 화학은 제대로 정립조차 되지 않았고, 맨해튼 프로젝트는 전세계의 두뇌를 총망라해서 시작한 거니까. 애당초 그만한 전쟁이 터질지도 의문이고.""
그런 사람이 질량-에너지 동등성을 마음대로 뿌리고 다녔어요? 그리고 인간에게나 먼 미래지 나는 직접 겪어야 하는데?""
아. 아아.""
세실리가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며 타박했다. 생각해보니 세실리는 수명이 엘프와 비견될 정도로 긴 마족이다."
500년 후에도 멀쩡히 살아있을 확률이 높으며, 그때라면 지금보다 문명이 발달돼 있을 터."
나에게는 미래지만 그녀에게는 다가올 현실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걸 간과하고 있었다."
······누나도 알잖아. 나도 누나만큼, 어쩌면 누나보다 오래 살 거라는 걸.""
말 잘했네. 그러면 3년에 한 번씩 아이를 낳자. 할 수 있지?""
갑자기 왜 그쪽으로 이야기가 새는 거야?""
그동안 바빠서 못 했으니까.""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지. 하지만 지금은 힘들 것 같다."
나중에 하자. 누나에게 소개시켜줄 사람도 있어서.""
소개시켜줄 사람? 설마 여자야?""
여자긴 한데······""
정확히는 여신이지. 나는 뒷말을 흐렸다."
세실리는 내가 여자라고 답하자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보아하니 또? 라는 생각하는 모양이다."
마리에게 허락은 받았어?""
허락은 받았어.""
알았어. 누군지 한 번 보러 가야지. 얘가 또 어떤 순진한 양을 꼬셨을까?""
꼬신 게 아니라 빌붙어 사는 사람입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모라를 향한 평가가 점점 각박해졌다."
나는 삐진 듯 안 삐진 것 같은 세실리를 살살 달래주고는 모라가 지내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차라리 다행이야.""
뭐가?""
미래에 이런 무기가 나올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줬잖아. 만약 악마 숭배자 같은 놈들이 소리소문없이 만들었다 생각하면······'"
그건 좀 끔찍하네.""
가끔 테러리스트가 핵폭탄을 빼돌리고 테러를 저지르는 스토리가 있다. 꽤 충격적인 스토리였지."
세실리는 핵폭탄에 대해 잠깐 생각하더니 나에게 다른 질문을 건넸다."
그 정도 위력이면 보통 봉인하지 않아? 다른 나라들이 전부 규탄할 텐데.""
이미 수천 발 넘게 있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자 세실리가 눈을 깜빡거렸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한순간 멍해졌다."
이어서 그녀는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멸망하지 않은 게 신기하네.""
냉전 당시 100번 이상 멸망할 뻔했다."
아이작.""
응?""
네가 어째서 가끔 가다가 초연한 모습을 보이는지 알 것 같아.""
······?""
이번에는 또 무슨 오해를 하는 거지."
이상한 착각에 빠진 세실리를 데리고 모라의 방으로 데려갔다."
세실리는 어떤 여자인가 싶어서 자꾸만 질문했지만, 나는 일단 보면 안다고 애써 대답을 회피했다."
분명 가슴은 크겠지?""
그 얘기가 왜 나와?""
네 주변 여자들을 보면 이런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걸? 혹시나 하는 말인데 나보다 커?""
음······""
부정할 수 없는 전제에 세실리의 가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현재 그녀는 가슴트임이 강조되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자신감의 근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세실리의 압도적인 흉부에 비빌 사람은 체리밖에 없다. 게다가 체리는 세실리처럼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악마화를 한다면 서큐버스의 피가 발현되어 여기서 더 커진다. 그냥 압도적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아니. 애당초 누나만한 사람이 거의 없지.""
다행이네. 그럼 그 사람이 뭐가 좋아서 받아들인거야? 내가 아는 사람이긴 해?""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일단 보고 말해.""
흠?""
내가 한사코 부정하자 세실리도 뭔가 알아차렸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제가 다르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이후로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모라가 지내는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노크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들어와!]"
반말?""
노크를 하자마자 안쪽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발랄한 목소리와 달리 반말을 하자 세실리의 표정이 더욱 묘해졌다. "
보통 사람 같으면 예의를 담아 존댓말을 사용하겠지. 그러나 반말을 사용한다는 건 '높으신 분'이라는 뜻에 직결된다."
그 점을 눈치챈 세실리가 문을 열기 전,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대체 누구냐는 무언의 표시다."
이에 나는 애매하다는 미소를 지어주며 말없이 문을 열었다."
끼익-"
안녕!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
안녕! 세실리 엄마!""
문을 열자마자 모라, 그리고 그녀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아리엘이 손을 들며 힘차게 반겨줬다."
모라의 신성에 이끌리기 때문인지 몰라도 아리엘은 모라와 자주 붙어다녔다. 모라도 아리엘을 끔찍이 귀여워하는 편이고."
정신연령대가 비슷해서 그런지 서로 죽이 잘 맞더라. 가끔 가다가 바둑이나 콜 오브 듀티도 재밌게 하고 있다."
저 사람이야?""
응.""
무릎 위에 아리엘이 앉아있는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본 느낌이······""
누나를 제일 아껴주던 여신이에요. 그리 말하고 싶다."
의식체라도 모라는 신. 당연하게도 특유의 분위기가 있으며 거기서 기시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말했다가는 도리어 믿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 차차 설명하기로 정했다."
그동안 잘 지냈니? 내가 여기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참 바쁜 것 같던데.""
······절 아시나요?""
처음 보는 대상이 반말을 했음에도 세실리는 존댓말로 대했다. 직감적으로 범상치 않은 사람이란 건 깨달은 모양이다."
모라는 떨떠름한 세실리에 무언가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났는지 미소를 지었다. 장난기가 다분히 들어있는 미소다."
내가 누군지 몰라?""
······네.""
잠깐 이리로 올 수 있어?""
또,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나는 짜게 식은 얼굴로 모라를 쳐다봤다."
그러는 사이 세실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를 바라봤다. 가도 되냐는 표정이다."
누나도 잘 아는 분이니 괜찮을거야.""
······알았어.""
내가 보증까지 서주자 세실리는 헷갈린다는 얼굴로 모라에게 다가갔다. 나 또한 슬금슬금 따라갔다."
이윽고 세실리가 침대에 앉아있는 모라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을 때, 모라가 기습적으로 손을 뻗었다."
얍!""
앗!""
너무 갑작스러운 반응할 시간도 없었다. 더구나 모라가 손을 뻗은 곳이 세실리의 가슴 쪽이다."
변태처럼 꽉 움켜쥐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툭- 쳤을 뿐이다."
하지만 이후에 벌어진 상황은 세실리에게 '공포'를 선사하고도 남았다."
어, 어어? 꺄아아악!""
처음에 당황스러운 소리를 내던 세실리가 느닷없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며 뒤로 물러갔다."
나는 깜짝 놀라 세실리에게 다가갔다. 모라가 장난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누나! 괜찮······""
괜찮냐고 물으려던 찰나, 세실리의 변화를 보고 잠깐 뇌가 정지됐다. 그녀는 분명 두 팔로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단순히 허전한 걸 넘어서 거의 없는 수준이다."
내, 내 가슴이······""
··· ···""
세실리의 체형에 딱 맞았던 드레스가 헐렁해지다 못해 흘러내렸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없어졌다. 자부심이라 말할 수 있을만큼 우월했던 세실리의 가슴이."
작아진 것을 넘어 절벽이라 표현해도 될 정도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어?""
세실리가 충격에 빠진 동안 모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 질문에 세실리가 새파래진 안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보니 기억난다. 옛날에 모라가 세실리에게 이런 장난을 친 적이 있었다고."
세실리는 마족이기에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다. 당연히 이런 장난을 누가 쳤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서, 설마······""
응. 맞아.""
모라 님이 어째서······ 아니. 그보다도······""
세실리는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운 얼굴로 모라와 드레스를 번갈아봤다."
모라가 이곳에 현신한 건 둘째치고 가슴이 사라진 게 더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아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는 악동처럼 웃는 모라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아끼는 신자를 두고 이게 뭐하는 짓이야."
따악!"
악!""
장난은 그만하세요. 누나가 곤란해하잖아요.""
으으······""
시원하게 딱밤을 놓으며 핀잔을 주자 모라가 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의식체여도 감각은 느껴지는 모양이다."
모라는 내 핀잔에 툴툴거리면서도 세실리의 가슴을 원래대로 복구시켰다. 아까 전처럼 손으로 가슴을 툭- 치니 다시 돌아오더라."
사라지는 것도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복구도 순식간에 복구됐다. 하지만 흘러내린 드레스만큼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아, 아이작. 도와줄 수 있어?""
응.""
사소한 해프닝이 발생했으나 유야무야 넘어갔다."
다만 어지간히도 충격적이었는지 세실리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고작 가슴이 없어졌다고 안정까지 취해야 하냐고 물을 수 있는데, 솔직히 이해할 수 있다."
나 같아도 아랫도리가 작아지면 큰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 이건 모라가 잘못한 게 맞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요.""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 이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모라가 뺨을 긁적이며 바보 같이 웃었다."
실제로 효과적이긴 했다. 말보다는 행동이라고, 세실리도 모라의 존재를 인정했으니까."
단지 그것이 과격하다는 게 문제였을 뿐. 분명 나보다 오래 살았을 텐데 왜 이리 철이 없을까."
'2대 모라라서 그런 건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는 표정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신들의 과거가 아니다. 나는 세실리에게 모라를 소개시켜줬다."
누나도 느꼈겠지만 이 분은 모라야. 사정이 있어서 잠깐 본래의 차원에서 추방되셨지. 당분간은 우리 저택에서 지낼 예정이야.""
그, 그래? 어째서 모라 님이 차원에서 추방된 거야?""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