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670)화 (671/763)

 전에 마리아 여왕이 서신을 보낸 것도 있다. 그 일은 테르스 왕족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으며 독단적인 행동이라고."

 '한 번쯤 테르스 왕국에 방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테르스 왕국은 루미너스를 국교로 삼는 나라다. 루미너스의 시야에 들고 있으니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 알 수 있을 터."

 하지만 말 그대로 심증만 있는 거라 샅샅이 파악할 필요가 있다. 위험하긴 해도 어쩔 수 없다."

 남에게 시키자니 괜스레 큰 사건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그런 예감이 든다."

 대답해주시죠, 현자님.""

 ··· ···""

 현자님?""

 그런데 현자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한다. 마치 인형 같은 모습이라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케이트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현자를 툭- 툭- 건드렸다. 아무런 반응도 없다."

 이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때쯤, 무겁게 닫혀있던 현자의 입이 열렸다."

 [오만방자한 놈이로구나.]"

 옳거니. 왔구나."

 현자가 전에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내며 말문을 틀었다. 노이즈가 낀 것 같으면서도 울림이 강한 목소리다."

 케이트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내 곁에 오면서 메이스를 꺼내들었다."

 화륵!"

 황금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불꽃이 메이스에 휘감겼다. 클라크에게 특훈을 받았기 때문인지 순도가 더 강해진 느낌이다."

 하지만 소용 없을 것이다. 어차피 현자는 버리는 카드나 다름없어서 쓰러뜨리면 이쪽이 손해다."

 대신 만약을 대비하는 건 나쁘지 않다. 저쪽이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달려들 수도 있었으니."

 이제야 대화를 할 기분이 된 모양이군요.""

 [사는 세상이 달라져도 인류의 오만함은 바뀌지 않는군.]"

 원래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죠.""

 어느새 현자의 눈동자도 바뀌어져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이면서도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 같다."

 ······설마 화신?""

 현자의 눈동자를 확인한 케이트가 두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그녀가 저런 반응을 짓는 건 극히 드문 일인데."

 화신이라고 했습니까?""

 ······네.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화신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눈이죠.""

 그러고 보니 전과 비교했을 때 눈동자가 다르긴 하다.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때는 목소리만 바뀌었지,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지금은 눈동자마저 바뀐 상태다. 바다, 그것도 심연을 연상케하는 눈동자로."

 [네 놈의 오만함으로 이 세상은 멸망의 길을 달릴 것이다. 정녕 천벌이 두렵지 않느냐?]"

 현자 아니, 만물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존재가 담담하면서도 강한 힘이 실린 투로 나에게 말했다."

 천벌이라······ 솔직히 말해서 두렵긴 하다. 지구의 신들이 내 뒷배여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쥐도 새도 없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딱 잘라 말할 수 있다.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다. 이미 한 번 죽었던 몸, 또 죽어봤자 순리대로 환생하겠지."

 두려운 건 내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가족들이다. 더구나 마리는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 절대 죽을 수 없다."

 오만한 게 아니라 자신감입니다. 도리어 제가 물어보고 싶군요. 왜 그리 이 세상에 집착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곳은 내가 창조한 세상이다. 애착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애착이라······ 그 부분은 따로 할 말이 없네요.""

 자기가 창조한 세상이니 애정을 가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것만큼은 만물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애정이 아니라 집착이다. 가질 수 없으면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마인드."

 나는 만물의 아버지로부터 그 말을 듣고나서 한 가지 생각했다."

 정말이지······ 인간적이시네요.""

 [뭐라고 했느냐?]"

 인간적이라고 했습니다.""

 루미너스도 그렇고, 모라도 그렇고, 히르트도 그렇고, 만물의 아버지도 똑같다.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건강한 신체와 건강한 정신을 얻었더라도 희노애락이 존재하는 인격체들."

 스케일이 클 뿐, 인류조차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만물의 아버지께서 평생 존경받지 못할 이유기도 하죠. 과욕을 부려 자기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으니.""

 [네 놈이 신앙에 대해서 알고 있기는 하느냐? 숭배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기나 해?]"

 그런 사람이 세상을 싸그리 리셋시키려고 합니까? 아니면 노아의 방주마냥 악마 숭배자 중 일부만 남겨두고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어요?""

 만물의 아버지는 너무 오랫동안 세상에 집착한 나머지 정상적인 사고 회로가 불가능하다."

 신앙심? 그것이 얼마나 달콤한 건지 모른다. 나는 아직 신성조차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만물의 아버지를 숭배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맛이 간 사람들밖에 없었다."

 마을 하나가 단체로 세뇌되었을 때 로라는 모진 학대를 받았고, 악마 숭배자 중 일부는 인신공양까지 진행했다."

 이걸 과연 정상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현자에게도 말했지만 너무 급했습니다. 당신을 숭배하는 악마 숭배자는 이 세상에 있어서 없어져야 할 악으로 자리잡았죠. 그런데 제가 살던 세상에서는 악마 숭배자보다 더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만물의 아버지가 원하던 이상향, 그러니까 지구는 온갖 사건사고가 발생했다. 그중 절정이 2차 세계대전의 광기다."

 나치 독일과 일본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잔악한 인체실험을 진행했고, 정의라 믿었던 미국조차 비슷한 실험을 진행했다."

 당시에는 그것들을 '악'이라 규정하지 않았다. 윤리의식이 제대로 박살난 시대였기에 말 그대로 실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이곳은 시대에 비해 윤리 의식이 매우 높아요. 세이비어가 마녀 사냥을 저지를 때도 루미너스 님이 직접 제지하셨죠. 이를 보았을 때 신이 직접 다스리는 세상도 나쁘지 않다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게냐?]"

 대체 뭘 보고 제가 살던 세상의 사상에 감화된 겁니까?""

 그토록 묻고 싶었던 질문이다. 지구의 광기를 한 번이라도 목격했다면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만물의 아버지는 광기가 절정에 다다랐던 2차 세계 대전을 지켜보지 못했다. 만약 그걸 봤더라면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걸 배제하더라도 지구의 역사는 온갖 광기로 떡칠돼 있다.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올만한 문화부터 시작해서 야만적인 발상까지."

 오죽하면 좆간이 좆간했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인간의 악은 상상을 초월한다."

 [도리어 이쪽이 묻고 싶군. 너는 우리의 지배를 받는 세상이 좋다는 게냐?]"

 장단점이 있다는 거죠. 특정 초월자가 패악질을 부린다? 그러면 그 초월자를 싫어하는 자에게 부탁하면 됩니다. 당신을 숭배할 테니 저 새끼 좀 조져달라고 말이죠.""

 신앙은 민주주의로 따지자면 '투표'에 가깝다. 신앙으로 먹고 사는 존재가 신인데 그걸 무기로 이용하면 된다."

 일례로 루미너스와 모라가 있다. 둘은 각각 전쟁과 평화를 관장하고 있으며, 상반된 권한이라 이용하기도 쉽다."

 하지만 지구는 그런 것도 없이 자기들 알아서 지내고 있다. 잠재력은 뛰어나도 다양한 사고가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리 된다면 인류는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됐을 것이다.]"

 아뇨. 절대 아닙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근거야 충분하고도 넘친다. 지구의 역사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허구한 날 서로 치고 박고 싸운 역사가 만년 가까이 된다. 하지만 그중에 '세계 대전'이라 부를 수 있는 전쟁은 불과 100년 전에 일어났다."

 또한 세계 대전으로부터 약 200년 전에 산업 혁명이 발발했다. 그렇다면 산업 혁명 이전까지의 시대는 어땠을까."

 제가 살던 지구는 자유의지가 넘쳐났음에도 기원후를 기준으로 1700년 간 시대가 비슷했습니다. 인구와 도시가 증가하고 전쟁이 좀 더 커졌을 뿐, 생활상은 엇비슷했죠. 그러나 1700년대를 기준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결국 특정 지점부터 성장폭이 증가한다는 뜻이죠.""

 [그 기간까지······]"

 이 세상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드워프의 존재가 있으니 더 빨랐겠죠.""

 만물의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본인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겠지."

 나는 정말이지 인간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신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지랖입니다. 결국에는.""

 [··· ···]"

 만물의 아버지께서는 분명 지혜롭지만, 그 지혜로움이 눈 앞을 가려 현명함마저 덮어버렸죠. 그리고 그것을 오만이라 부릅니다.""

 [입 닥치거라!]"

 쾅!"

 역시 신이라도 팩트폭력은 아픈 모양이다. 만물의 아버지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는 걸 보면 확실하다."

 그의 돌발행동에 케이트가 메이스를 겨누며 경계한 반면,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든 자기가 창조한 세상을 갈취하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이 썩 안타깝다."

 차라리 크로노스나 우라노스처럼 시원하게 퇴장했으면 모를까, 추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예로부터 너 같이 입만 산 필멸자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똑똑히 지켜봤느니라!]"

 최후라······""

 나는 최후라는 단어를 듣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노기가 가득찬 만물의 아버지와 당당히 마주했다."

 말해보세요.""

 [뭐?]"

 만물의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제 최후가 궁금하네요. 제 최후가 어떤지 말씀해주시죠. 제가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언이란 예언을 퍼뜨렸다고 하시던데.""

 내 말에 만물의 아버지가 퍽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게 나에게 예언은 통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지구신이 걸어놓은 제약으로 인해 내 미래는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제아무리 신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감히 나를 우롱하는게냐? 그쪽에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잘 알고 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은 불가능해도 일말의 이성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건 조금 아쉽다."

 전에 모건은 누군가 스스로를 예언자라 칭했을 때, 뺨을 한 대 시원하게 때리라고 말했다. 자기 앞일도 모르는 예언가가 무슨 예언가라면서."

 하지만 나는 폭력을 쓰기가 싫다. 지금 현자와 접촉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좋아요. 제 미래는 읽을 수 없다는 거군요. 그러면 그쪽의 미래는?""

 [뭐?]"

 그쪽의 미래는 어떤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내 질문에 만물의 아버지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약간 굳어진 얼굴로 답한다."

 [나는······]"

 저는 앞으로 만물의 아버지를 고자로 표현할 겁니다.""

 [··· ···]"

 그리 말하자마자 입을 꾹 다무는 만물의 아버지다. 그가 정말로 자신의 미래를 엿보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 순간 그리 될 확률이 100%에 수렴한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만물의 아버지가 어떻게 생기셨는지 모르니 미남으로 표현할지, 추남으로 표현할지도 모르고요. 아, 물론 루미너스 님을 봤을 때는 미남으로 표현할 것 같네요.""

 [나는······]"

 말년에는 추하게 표현할 예정이지만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리 기억할 겁니다. 그릇된 욕심으로 모든 신앙을 잃고 추악하게 소멸한 신으로요.""

 만물의 아버지의 표정은 썩 볼만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다."

 이에 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아넣었다."

 자기 앞날도 모르면서 예언을 하는 건 예로부터 이리 표현합니다. 오지랖이 넓다.""

 [··· ···]"

 루미너스 님도 다양한 권한이 있는데 만물의 아버지께서는 그 안에 오지랖이 있는 건 아닌지?""

 [이 놈이!!!]"

 결국 참다 참다 폭발한 만물의 아버지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지금 만물의 아버지는 현자의 몸을 빌렸을 뿐이다."

 다시 말해 케이트 선에서 해결이 가능하다는 뜻. 케이트는 그가 달려들자마자 메이스를 휘둘렀다."

 뻐엉!"

 그 사이 마력을 거두었는지 머리가 터지는 일은 없었다. 단지 배트에 맞은 야구공마냥 현자가 멀리 날아갔을 뿐."

 나는 벽에 쳐박힌 현자를 바라보면서 약간 걱정했다. 아직 정보를 못 뽑았는데 죽으면 곤란하다."

 곧바로 치료하겠습니다. 아직 죽기에는 이르죠.""

 다행이네요. 아참. 케이트 씨.""

 네. 말씀하세요.""

 케이트는 무언가 후련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와 마주하며 쓰게 웃었다."

 참견일 수도 있는데,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나중에 전부 알려드릴 테니까요.""

 아이작 님의 조언이 왜 참견이라 생각하십니까? 만물의 아버지처럼 신앙이 없으면서 예언을 하는 게 참견입니다.""

 다행히 신앙에 혼동이 오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아이작 님의 말씀은 곧 교리. 그것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예?""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아닌가. 나는 온화한 미소를 짓는 케이트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작 님께서는 루미너스 님 대신에 목소리를 내주시는군요. 어째서 침묵하지 말고 목소리를 내라고 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 ···""

 서둘러 체리에게도 알려줘야 될 것 같네요.""

 뭔가 다른 일이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최고신이었던 존재, 만물의 아버지와의 설전은 승리 아닌 승리로 끝맺었다."

 사실 만물의 아버지가 지구의 사상에 감화될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의 말마따나 한계를 뚫을 수 있었으니."

 역사적으로 인류는 신을 끌어내리려 시도한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간절히 기도하며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애썼다."

 초월자가 바로 그런 존재다. 어떻게든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며 가능성을 좁혀버리게 만든다."

 현자는 심문을 위해 지하실로 남겨두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케이트가 지내는 방에서 다과나 즐길 예정이었다."

 케이트 씨.""

 네. 말씀하세요.""

 케이트 씨는 어떤 세상이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살던 세계처럼 인류에게 무한한 자유의지를 준 세계와, 이 세상처럼 그렇지 않은 세계.""

 겸사겸사 신에게 총애를 받는 케이트에게 질문했다. 과연 어떤 세상이 더 나은지 궁금하다."

 내 예상대로라면 케이트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 피와 강철만 보더라도 대부분 후자를 고르겠지."

 하지만 케이트는 예상 외의 대답을 꺼냈다. 그녀는 내 질문을 듣고 온화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고요?""

 네. 도리어 제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루미너스 님은 정말로 이러한 체제가 이어지는 걸 원하실까요?""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가끔 가다 보면 케이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영 모르겠다."

 나를 신격화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나를 좋아해서 따르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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