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주의하려무나. 만일 네가 정말로 하나의 종교로 탄생하게 된다면, 옳지 못한 교리를 가르치는 건 최대한 피하렴. 최고신께서도 그것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으니까.]"
최고신께서요?""
[아버지의 이름을 외치며 순리로 돌아가는 이들이 많아서 그래.]"
이슬람, 그것도 아주 유명한 극단주의자들을 말하는 모양이다."
가끔 가다가 종교가 문화가 아닌 사상으로 자리잡는 경우가 있는데, 이슬람이 딱 그런 경우다."
물론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종파가 있긴 하지만 유달리 눈에 띄는 편이다. 그 절정이 9·11 테러고."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된다. 나는 좋은 문화를 퍼뜨리고 싶지, 세상에 온갖 분쟁을 부르기는 싫다."
주의하도록 할게요. 아, 그리고 하나 더 물어봐도 될까요?""
[묻거라.]"
만약 제가 정상적으로 지구에서 살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나요?""
이게 가장 궁금하다. 지금은 신성을 얻어 진정한 의미의 성자로 점점 다가가는 중이다."
명성은 두말할 것도 없으며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나기 직전이다."
반면에 지구에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모라는 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바꿀 운명이었다고 말했다."
완전히 사라진 미래라 상세히 알려주기는 힘들지만 이분들은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질문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연설로 나라의 모든 군인이 널 따른다면 믿겠느냐?]"
······혹시 쿠데타라도 모의한 건가요?""
저도 모르게 그 질문이 바로 나와버렸다."
나치 독일의 군부조차 처음에는 히틀러를 믿지 않았다. 프랑스 6주라는 대기적을 한 번 맛보고 나서부터 따랐지."
그런데 대부분의 군인들이 나를 따랐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그건 아니란다. 군인들의 권력이 강해지는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니?]"
그거야······ 전쟁이 터졌을 때겠죠.""
모라에게 들은 적이 있다. 조만간 지구에 3차 세계 대전이 터질 거라고."
"
그 후로 선출될 대통령이 독재자적인 면모를 보이긴 해도 갈등을 모두 수습할 거라고 말이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한 가정의 가족으로 살아갈지, 아니면 조국을 위해 제 한 몸 던지는 군인으로 살아갈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을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그 누구도 여러분을 모욕하지 않을 겁니다. 무엇이든 간에 여러분은 용기를 갖고 선택하신 겁니다.]"
불현듯 전혀 듣지 못한 목소리가 공간 내에 울려퍼졌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아닌 전혀 다른 남자의 목소리다."
강한 호소력이 담긴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연설의 내용도 상당히 울림이 있는 수준이고."
[연설의 극히 일부만 가져온 거란다. 어떠니?]"
······제가 정치인이라도 되나요?""
[보기 드물 정도로 훌륭한 정치인이 되지.]"
진짜로 정치인이 되는 거구나. 아마 저 연설은 전쟁 직전에 꺼낸 연설인 듯싶었다."
물론 앞뒤 상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자세한 건 모른다. 단지 연설로 군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확실하다."
[여기까지밖에 안 되겠구나. 남은 건 이 세상의 빛과 어둠에게 물어보렴.]"
[즐거운 시간이었다.]"
물어볼 게 많은데 벌써 가시는 모양이다. 이에 내가 인사를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는 동안이었다."
어느새 검푸른색으로 가득 찼던 공간이 스멀스멀 사라지기 시작했다. 현자의 손발에 꽂혀있던 은색 십자가 기운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다음에는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했으면 좋겠구나.]"
이윽고 부처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원래 있던 방으로 되돌아왔다. 현자는 여전히 쥐죽은 듯이 누워있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어안이 벙벙할 때쯤, 내 정신을 일깨우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똑똑똑-"
[아이작 님. 케이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케이트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이윽고 케이트를 비롯하여 아살라가 안으로 들어오고."
이 무슨······?""
혀, 현자 님! 현자 님께서 왜······!""
죽은 것마냥 널부러져 있는 현자를 보며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진실에 가까운 거짓을 입 밖으로 꺼내들었다."
······천벌을 맞으셨습니다.""
다른 세계의 신이어도 천벌은 맞지."
스타비르크의 정신적 지주, 현자가 실은 악마 숭배자였다는 사실은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지금까지 좋든 싫든 스타비르크의 현자로 칭송받던 자다. 그런 자가 악마 숭배자, 그것도 고위 간부급이었다는 건 여러모로 충격적일 터."
무엇보다 여태까지 정체를 잘 숨기고 있던 탓에 아살라가 믿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세계판 사라예보까지 예언한 사람이다보니 쉬이 믿을 수 없겠지."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케이트가 있다. 또한 그녀는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사람이다."
······악마 숭배자가 확실합니다. 미약한 축복인데도 이런 반응인 걸 보면.""
케이트가 간단한 축복으로 확인한 후에 확답을 내렸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다."
그녀는 추기경, 그것도 신성력 하나만큼은 견줄 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높은 성직자다."
일시적으로나마 '성역'을 선포할 정도로 강력한 인물인데 악마 숭배자에게 특효인 축복을 내리는 건 일도 아니다."
애당초 물과 기름처럼 반응하는 식이니 판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더 확실한 판단을 위해 신전으로 데려가야겠지."
신전에서 확실한 판결이 나오는 겁니까?""
죄 없는 자만이 멀쩡히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아살라 님도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 ···""
케이트의 살벌한 대답에 아살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제서야 케이트가 어떤 직급을 갖고 있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
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현자를 곧장 끌고 가지는 않았다. 대신 하루동안 성역을 선포하여 퇴로를 차단시켰다."
지구신들이 조치를 취했겠지만 케이트는 그걸 모르니 일단 가만히 뒀다. 지금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는 게 먼저다."
아. 물론 장기 아닌 장기인 구라를 쳐야겠지.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아살라에게 말했다."
현자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스타비르크를 독립된 나라로 분리시킨 후, 통째로 제물로 바칠 계획이었다고 말이죠.""
그게 무슨 말씀······ 아니. 정말로 현자께서······""
믿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스타비르크는 현자에게 농락당하고 있던 겁니다.""
··· ···""
아살라는 포박당한 채 작은 성역 속에 갇혀있는 현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굳게 믿고 있던만큼 배신감도 어마어마할 터."
스타비르크를 향한 현자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잊혀진 불과 대장장이의 신, 달로스를 언급한 걸 보면 반쯤 확실하다."
그러나 악마 숭배자가 저지른 악행은 그걸 덮고도 남았다. 종족을 가리지 않고 제물로 쓰는 놈들인데 말 다했지."
세이비어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죠. 스타비르크는 이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타락한 추기경······""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스타비르크는 사실상 사각지대였던 겁니다.""
······실례지만 사각지대가 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사각지대에 대해서도 잘 설명하자 아살라가 마른세수를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
세이비어에 명확한 선례가 있다보니 차마 부정할 수도 없겠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하마터면 본인의 이야기가 될 뻔했다."
마음이 복잡하실 겁니다. 아마 스타비르크의 독립성도 현자가 꾸민 흉계라고 생각하실테죠. 어느 순간부터 독립심이 강해졌으니까요.""
··· ···""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스타비르크는 고유의 민족성을 갖고 있던만큼 언젠가 독립을 외쳤을 거예요. 제가 살던 세계의 수많은 나라가 그러했고, 제 고향이 그랬으니까요.""
민족성은 절대 무시하지 못한다. 민족성 덕분에 나치 독일이 유럽을 전부 집어삼켰고, 대한민국은 끝까지 일본에 대항했다."
우크라이나도 전쟁 하나로 러시아와 민족성이 완전히 갈라지고, 끝까지 항전하는 계기가 됐다."
중국의 가장 요긴하게 쓰는 것도 민족성이다. 용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폭넓다."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스타비르크는 특정인의 조언이 아닌,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모아 국가의 향방을 정할 겁니다. 아살라 씨도 그래야만 하고요.""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힘 있는 대답이었으나 착잡함이 묻어나오는 얼굴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당장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에 나는 아살라에게 쉴 시간을 주기 위해 잠깐 방 밖으로 내보냈다. 아살라는 떠나기 전, 현자를 힐끔거렸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실수를 몇 번 했지만 현명한 사람이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
그런고로 방 안에 남은 사람은 현자를 비롯하여 나와 케이트였다. 케이트는 벌레를 보는 것처럼 혐오감이 가득한 표정이다."
케이트 씨.""
말씀하세요.""
혹시 이 자가 스타비르크의 정신적 지주라 해서 스타비르크를 멸망시켜야 된다거나 그런 생각을 품은 건 아니죠?""
타락한 추기경 사건이 없었더라면 그런 생각을 했겠죠. 하지만 미꾸라지가 물을 흐린다 해서 물 전체를 갈아엎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동안 성장했구나! 나는 실로 감격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바크 추기경 사태가 없었더라면 스타비르크는 이대로 멸망 확정이다. 내가 구원하든 말든 의미가 없다."
이에 현자가 악마 숭배자였다는 사실도 퍼뜨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야 막 초입 단계인데 벌써부터 물을 흐릴 수는 없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뭐가요?""
아까 확인했을 때 바크와 견줄만한 자였습니다. 천벌을 맞았다고는 하지만 루미너스 님이나 모라 님의 기운은 전혀 아닙니다.""
케이트가 호기심이 담긴 눈빛으로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애매하여 잠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계의 신, 그것도 최고신들이 도와줬다고 하면 과연 믿을지 모르겠다. 일단 시간을 끌어야지."
현자에게 기운이 남아있는 건가요?""
네. 생전 처음으로 겪는, 다소 독특한 기운들이었습니다. 하나는 평온함과 편안함이 느껴지는 반면, 다른 하나는 슬픔과 무거움이 느껴졌죠.""
부처님과 예수님의 신적 특징을 잘 표현했구나. 잘 생각해보면 케이트도 꽤 표현력이 좋은 것 같다."
원래 본인이 느낀 바를 곧장 말로 표현하는 건 매우 어렵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자세한 건 루미너스 님께 여쭈어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이걸 과연 제 입으로 말해도 될지 모르거든요. 꽤 중요한 사항이라서.""
알겠습니다. 그러면······""
케이트는 그리 말하더니 조용히 검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아직까지 백색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뒤이어 포박된 현자에게 다가가더니 그대로 발목을 그어버렸다."
촤악!"
기절한 상태여서 그런지 발목이 그여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는 현자. 아무래도 아킬레스건을 자른 모양이다."
저리 되면 평생 걷지 못하는 몸이 되겠지. 성역 안에 갇혀 있는 상태라 회복조차 못할 것이다."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했고, 남은 건 휴식이겠네요. 다음 날이 되자마자 신전부터 방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죠.""
일단 지금 시간이······""
케이트의 말에 나 또한 시계를 쳐다봤다.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갔기 때문인지 어느새 취침에 들 시간이다."
나는 딱히 잠을 안 자도 되는 몸이긴 하지만 케이트는 아니다. 게다가 아침 예배를 위해서라도 케이트는 일찍 재워야 된다."
저녁 식사는 하실 건가요?""
아. 전 괜찮습니다. 케이트 씨는요?""
저도 괜찮습니다. 상황을 보면 식사를 준비할 여력도 되지 않을 것 같고요.""
하기야 현자가 악마 숭배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지도부는 혼란의 구덩텅이에 빠졌을 것이다."
지금은 그들의 위해 시간을 내줘야 되니 저녁 식사는 생략하는 편이 낫다. 귀찮기도 하고."
이에 각자 씻기 위해 환복했다. 아살라 쪽에서 미리 준비했는지 케이트를 위한 잠옷도 따로 준비했더라."
편의성이 꽤 좋군요.""
그러게요.""
끈이 달린 원피스형 잠옷. 통풍을 위해 나풀거리는 재질로 만들어진 옷이다."
몸매도 몸매지만 역시 외모가 대단하다보니 뭘 입어도 모델 같다. 순수성이 묻어나오는 외모인만큼 더욱 그렇다."
갑옷을 입었기 때문인지 속옷도 스포츠 브라에 가까웠다. 저건 아델리아도 주로 착용하는 거라서 별 감흥이 없다."
아이작 님이 먼저 씻으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 아뇨.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한 번만 도와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래도 등을 맡기는 건 한사코 거절했다. 자칫하다가는 나도 자제력을 잃을 것 같았으니."
약조차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거사를 치렀다가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애당초 케이트도 반장난식으로 물어본 거다."
아무튼 샤워까지 모두 끝낸 후에 케이트와 나란히 한 침대에 눕게 됐다. 예전 같으면 가슴이 두근거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침착하다."
물론 케이트가 매력이 없다는 게 아니다. 분위기 자체가 그런 쪽으로 쏠리지 않아 무덤덤할 뿐이다."
'예쁘긴 예쁘구나.'"
평소 땋은 머리를 하고 다니는 케이트. 그러나 지금은 그 머리를 모두 풀어 기다란 황금색 머리카락이 흩뿌려져 있다."
태양 아래의 황금밀밭을 연상시키는 머리카락. 밤인데도 수수하게 빛나는 눈동자."
그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케이트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왜 그리 쳐다보시나요?""
케이트 씨가 너무 예뻐서요.""
평소에도 많이 듣는 말이네요. 아이작 님께서 말씀하시니 더 특별하게 들립니다.""
건강한 신체 덕분인지 몰라도 케이트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눈에 띄었다."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손을 뻗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그러자 더욱 짙어지는 그녀의 미소."
아이작 님.""
말씀하세요.""
아이작 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요.""
진심이 절절하게 묻어나오는 말이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꾸준히 쓰다듬으면서 경청했다."
아이작 님이 없으셨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됐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요. 분명 더러운 악마 숭배자 놈들이 이 아름다운 세상을 해쳤겠죠.""
네.""
문화가 이토록 발전하지도 않았을 테고······ 많아도 너무 많아 고르기 힘드네요. 죄다 한 사람이 해냈다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은 것들이에요.""
그래서 먼 훗날 역사학자들에게 쌍욕을 먹을 예정이다. 하나만 해도 어마어마한 위업인데 그걸 여러번 행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