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대비했으니까 걱정 마. 네 말을 듣고나서 일정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식으로 잡았거든.""
그런 거라면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이런 경고를 함으로써 예언 아닌 예언이 실행될 수도 있었으니까."
내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짓자 리나는 피식 웃더니 걱정 말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번에 함께 따라갈 클로제 후작은 영민한 사람이거든. 어지간한 위협은 전부 차단할 수 있을 거야.""
이번 남매를 경호하는 인력은 클로제 후작이다. 스타비르크 주둔군의 사령관이자 '총독'에 가까웠던 사람."
아까 전에 한 번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전생의 독일 축구 선수랑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닮았더라."
차이점은 콧수염의 유무다. 그걸 제외하면 월드컵 최고 득점선수와 똑같이 생겼다."
애초에 오늘 가는 것만으로도 좋아할 스타비르크민은 거의 없어. 국빈으로 대우만 해줘도 우리는 좋지.""
왜 하필 오늘로 잡은 거야?'"
솔직히 오늘이 아니라 다른 날로 잡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오늘은 스타비르크 민족에게 불쾌한 날이었으니까."
종족 전쟁이 끝나고 미네르바 제국이 새로 탄생했을 때 스타비르크도 여기에 병합됐다. 그 날이 오늘이다."
당시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나 독립심이 강해지면서 불쾌한 날로 자리잡은 것이다."
나라를 대놓고 빼앗긴 건 아니지만 눈 뜨고 코 베였다는 느낌이겠지."
그런 국치일에 황태자와 황녀가 방문하니 눈꼴시려운 건 당연하다."
국치일이 독립기념일로 바뀐다면 상징적일 테니까. 스타비르크로서는 짜증나긴 해도 기대할 수밖에 없을 걸?""
대단하네. 이런 계산을 다 깔고 들어가는 거구나.""
어때? 반할 거 같아?""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자 리나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콧대를 세웠다.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니 놀리고 싶어진다."
이에 일부러 리나의 외모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다가 약간 안쓰럽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렇게 예쁘고 능력도 좋은 애가 어째서 그런 취향을······""
야! 그걸 왜 지금 말해! 어차피 나중에 할 거잖아!""
그때도 구경만 할 건 아니지?""
··· ···""
장난식으로 말했는데 리나가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한다. 차마 부정하지는 못하겠다는 반응."
그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설마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야?""
······한 번 생각해보고.""
진짜 부정은 안 하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채 대답한 리나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지만 트리거를 건드리면 취향을 들킨 소녀처럼 발끈한다."
이미 속살 빼고 알건 다 알고 있기에 이리 가까워질 수 있던 건지도 모른다."
과거에 다소 험악했던 관계에 비하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똑똑똑-"
[리나. 이제 곧 출발하니까 슬슬 준비해.]"
때마침 바깥에서 레오르트가 노크를 하며 준비를 알렸다. 이에 리나도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질로 빠르게 가라앉혔다."
나도 더이상 장난을 칠 마음이 없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근위대만 착용한다는 제복을 입으니 기분이 묘하다."
내가 참여하는 것도 아는 사람만 알고 있다. 근위대를 포함한 클로제 후작, 레오르트, 리나가 끝."
비밀을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지만 다들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서 괜찮다."
어차피 본분은 황족의 보호였으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모자를 점검했다."
우리가 갈 곳이 가르칸이라고 했지?""
스타비르크는 영토가 꽤 큰만큼 지역도 다양하다. 클로제 후작이 영주(사실상 총독)으로 있던 시절에는 '가르칸'이 중심부였다."
내 질문에 리나는 나를 뾰루퉁하게 째려보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맞아. 하루만에 협상을 끝내기 위해서는 가르칸 말고는 없지.""
암살자들이 텔레포트 기관을 망가뜨릴 수도 있지 않아?""
그걸 대비해서 근위대 중 일부가 방어할 거야. 따라서 직접적인 경호는 몇 없겠지. 대신 스타비르크에서도 경호원을 붙일 거라 위험은 없어.""
음······""
정말 괜찮은 거 맞을까. 나는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자 역사의 분기점, 사라예보도 경호원의 숫자를 줄인 나머지 사태가 발생했으니."
물론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도 있고 판단 미스도 있었다. '운명'이 있다면 사라예보 사건을 언급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다."
'뭔가 놓치는 게 있는 거 같은데······'"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암살을 할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
미네르바 제국의 대표단이 텔레포트 기관에 탑승하고 있을 시각."
스타비르크에서도 국빈을 대우하느라 한참 바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게 황제 다음의 권력자인 황태자와 황녀의 방문이다."
국치일이나 다름없는 날짜에 방문하는 건 짜증나는 일이지만, 의외로 여론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리나가 예상한 것처럼 오늘 독립이 된다면 국치일이 아니라 광복일이 될 테니까."
모두가 그 날이 되기를 염원하며 한창 바쁜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바쁜 움직임을 보이는 건 맞다. 단지 조용하고 은밀하며 위험한 움직이었다는 것."
모두 준비는 되셨습니까? 곧 있으면 사절단이 방문할 겁니다.""
스타비르크 과격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청년, 자크가 조용한 목소리로 주변 사람에게 물었다."
자크를 포함해 동그란 테이블을 기준으로 둘러싼 3명의 사람들. 그들도 자크처럼 어른의 티가 나기 시작한 청년들이었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자크와 뜻이 맞는 자들이다."
나는 준비가 끝났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아요. 각자 무슨 무기를 준비하셨죠?""
자크의 물음에 콧수염을 기른 청년이 품 속에서 무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짧은 길이의 바람총과 그곳에 들어갈만한 작은 침. 마지막으로 독으로 추정되는 병까지."
콧수염의 청년이 준비한 건 다름아닌 독침이었다. 성공 확률은 떨어지지만 은밀히 사용할 수 있는 무기."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뭐 병······ 같은 반응을 지었겠지. 하지만 이들은 원래부터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다."
작은 동물을 사냥할 때 쓰는 거지만 독은 오우거도 일시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지. 나는 이걸로 정했소. 마음 같아서는 다른 걸 사용하고 싶었지만 배신자들이 무기를 전부 압류하는 바람에······""
괜찮습니다, 이안.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바그라트는?""
덜그럭-"
다음은 얼굴이 길어 말상에 가까운 청년이었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테이블 위에 동그란 공을 올려놓았다."
마치 폭탄처럼 심지가 달려있는 동그란 구체. 그들은 단번에 정체를 파악했다."
화약을 이용한 폭탄입니다. 안에 철조각들을 넣어 위력은 충분할 겁니다. 자크 씨는요?""
마지막으로 자크가 조립한 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독침과 폭탄, 그리고 총까지."
여론은 사절단을 환영하자는 분위기가 많았으나 극단주의자들의 귀에 들릴 일이 만무하다."
무엇보다 이들은 삐뚤어진 애국심을 가진 자들. 자크는 각자가 준비한 무기들을 보다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암살이 성공한다면 제국은 분명 전쟁을 선포할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평화가 아니라 투쟁을 해야 됩니다. 아살라 님은 틀렸어요.""
애국심은 말 그대로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는 감정."
저희가 스타비르크를 올바르게 이끌 겁니다. 반드시.""
이들은 이 일이 올바른 행동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 하려는 짓이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행위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단지-"
레오르트 씨.""
왜 부르지?""
혹시 몰라서 말하는데 예정에 없던 일은 하지 마세요.""
?""
화약고를 넘어선 원자로가 떡하니 있다는 게 변수였지만 말이다."
스타비르크에서의 일정은 간단하다. 레오르트와 리나는 마차에 탑승하고, 나는 변장을 한 채 그들을 호위한다."
물론 내가 진짜 기사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변장을 한 거라서 직접적인 호위는 하지 않는다."
마차 뒷좌석에 앉은 리나 옆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게 끝이다. 나머지는 근위대가 지킬 거고."
기사는 한 명 한 명이 전술병기에 가까운 존재들이라 대부분 이런 식으로 호위하는 편이다."
또한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고기 방패로도 사용할 수 있다. 아마 내가 그런 역할이겠지."
스타비르크에서 온 수행원이 꽤 많네.""
이들도 전쟁은 기피하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근위대는 텔레포트 기관을 지켜야하는 입장이라 스타비르크에서 수행원을 붙여줬다."
대표단 말로는 믿을 수 있는 자들만 선출했다고. 이들도 독립을 원하지만 극단주의까지 몰리지는 않았단다."
이리하여 마차를 기준으로 근위대 및 수행원이 둘러싼 형식으로 목표 지점까지 향하는 식이다."
목표 지점은 시청 역할을 하던 저택. 주둔군이 철수하기 전에는 총독 겸 영주였던 클로제 후작이 거주하던 저택이다."
지금은 대표로 있는 아살라가 거주한다고 들었다. 앞으로 스타비르크 임시 정부 기관으로 변모할 것으로 보인다."
'경호 자체는 괜찮아 보이는데······'"
마차를 중심으로 앞뒤에 말을 탄 기사들을 배치한 상황이다. 기마병은 현대로 치자면 전차에 가까운 존재."
여기에 평범한 병사도 아니고 기사까지 탑승했으니 사실상 무력 시위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전차가 떡하니 있는데 누가 습격이라도 하겠어? 라는 마인드."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는 힘들겠지만 주위를 둘러보기에는 탁월하겠지.'"
이들은 무력을 선보이는 거고 실질적인 경호는 마차 주변을 둘러싼 스타비르크 측 수행원들일 것이다."
더구나 스타비르크 쪽에서도 수행원을 붙여줬으니 암살자들도 쉽사리 덤벼들지 못할 터."
설령 덤빈다고 해도 수행원이 몸을 날려 막는다면 여론의 힘을 등에 업을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스타비르크 쪽 인력을 텔레포트 기관에 배치하는 게 낫지 않나?'"
약간 걱정되는 건 인력이다. 미네르바 제국 사절단은 근위대를 텔레포트 기관에 과도할 정도로 배치했다."
여의치 않으면 고기 방패로 나설 사람들은 있지만, 과연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대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라예보 사건도 대공이 경호 배치를 싫어해서 객기를 부렸다가 사단이 발생했으니까. 그나마 경호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괜찮다."
이들은 대낮인데 누가 대놓고 암살을 시도하겠어? 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겠지. 사실 이게 정상이고 시대에 맞는 현상이다."
레오르트 전하. 이제 슬슬 출발하겠습니다.""
알겠네. 자리에 가도록 하지.""
배치를 보면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차오르고 있을 때 출발의 시간이 다가온 모양이다."
레오르트는 클로제 후작의 전언을 듣고 리나와 함께 나란히 마차에 앉았다. 정말로 화려한 외모를 지닌 남매다."
참고로 이 둘이 착용한 복장은 드워프가 손수 제작했다. 화살을 완전히 막기는 어려워도 깊숙히 박히지는 않는다."
아마 검도 수월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애당초 대낮의 암살이라고 해봤자 멀리서 활 혹은 석궁으로 저격하는 것밖에 없겠지."
출발하겠다! 모두 자리로!""
책임자인 클로제 후작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근위대와 스타비르크의 수행원이 제각기 자리로 이동했다."
나 또한 리나와 살짝 떨어진 곳에 섰다. 아까 말했다시피 앞뒤의 기마병을 제외하면 전원이 두 발로 걸어간다."
······마차가 왜 이래?""
그런데 마차가 조금 이상하다. 나는 마차의 형태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안에 탑승할 인원을 보호하기 위한 틀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마차가 그런 형식이다."
헌데 레오르트와 리나가 탑승한 마차는 오픈카마냥 시원하게 개방돼 있다. 대놓고 나 노리라고 광고하는 거야 뭐야."
위잉-"
그런 생각을 가지려던 찰나 마차의 주변으로 푸른색 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차 전체를 둘러싸는 푸른색 막."
뒤이어 천장까지 만들어지자 푸른색 막은 그 색을 점점 잃어버렸다. 보아하니 마법을 사용한 듯하다."
이에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리나가 놀리는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마법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니?""
아.""
그러고보니 마법이 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너무 뻥 뚫려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이것도 리나가 조용히 설명해줬다."
이번 일은 우리에게도 중요해. 훗날 스타비르크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어서 어쩔 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만약 이번 협상이 양쪽 모두 좋게 흘러간다면 스타비르크 내에서도 우호적인 여론이 생길 터."
무엇보다 레오르트와 리나는 외모가 매우 뛰어나다. 반감을 가진 자들도 이들의 외모만큼은 까내릴 수 없겠지."
외모도 하나의 전략으로 이용하는 셈이다. 특히 이들 같은 고위층에게 이미지는 상당히 중요하다."
위험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면 최대한 취하자. 미네르바 제국이 내놓은 대답인 것 같다."
찰싹!"
리나와 속닥거리는 와중에 마부가 채찍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말들이 마차를 끌기 시작했다."
이제 밖으로 나가는구나. 리나는 자리로 돌아갔으며 나 또한 긴장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밖으로 나서자 스타비르크 특유의 기후가 나를 반겨줬다. 듣던대로 겨울임에도 햇볕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