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643)화 (644/763)

 이번에 그리는 그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쓰일 전투 장면이다. 은어적 의미의 장기자랑부터 시작해 온갖 혈투가 난무하는 전투."

 아이작의 말로는 지난번 통조림에 갇혔을 당시 자신에게 보여준 장면이란다. 그걸 보고 나서 한동안 속에 있는 걸 게워냈지."

 '빠져나오는 내장을 부여잡으며 오열하는 병사는 다 그렸고······'"

 거의 기계처럼 붓을 움직이고 있지만 결과물은 전부 훌륭하다. 하도 갈렸던 덕분에 실력이 일취월장해진 상태다."

 우선 아이작에게 말만 한다면 최고급 도구는 기꺼이 구할 수 있다. 또한 휴식이 필요하다면 신전의 예배실에서 푹 자고 돌아온다."

 원래 예배실에서 잠을 자는 건 불경한 짓이라며 금지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바로 그 예외가 아이작과 칼즈인 것이고."

 성자라 추종받는 아이작은 물론, 그를 따라 '신성한 의무'를 짊어진 칼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덕분에 피로 회복은 문제가 없다."

 '신성한 의무는 개뿔이. 내가 먼저 구원받아야 할 처지인데.'"

 본인은 속으로 아이작을 열심히 씹고 뜯고 맛보고 있지만. 그는 다음 그림을 그리려다 말고 붓을 내려놓았다."

 문득 첫 계약 당시가 떠오른다. 독특한 그림만 그리던 자신에게 드디어 봄날이 오는구나라 착각했던 그 날."

 가능하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계약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다. 돈을 벌면 뭐하나, 쓸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데."

 '진짜 성자라서 뭐라 할 수도 없고.'"

 소설을 일주일마다 2권씩 내는 건 불세출의 천재라도 불가능하다. 애당초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하지만 칼즈는 알고 있다. 아이작이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일주일에 2권씩 발매하는지를."

 남들이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을 때 칼즈는 그가 진정으로 성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무런 불만도 내지 못한 채 묵묵히 그림만 그리고 있다."

 신이 데려온 성자에게 개길 정도로 깡이 좋지는 않다."

 '······조금만 항의해볼까?'"

 하지만 이대로 노예처럼 굴려지다가는 과로로 사망할지도 모른다. 예배실에서 피로를 푸는 것도 한계가 있다."

 육체적인 피로는 괜찮아도 정신적인 피로가 버티지 못한달까. 칼즈는 텅 비어있는 캔버스를 멀거니 쳐다봤다."

 자신은 '휴가'가 필요하다. 여태까지 쉬지 않고 일했는데 한 달 아니, 일주일의 시간을 줬으면 한다."

 문화의 도시에서 살고 있는데 정작 그 문화를 즐기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용주와 담판을 지어야겠지. 그리고 고용주를 설득시킬만한 무기를 쥐어야 된다."

 휴가를 주지 않는다면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 아이작의 성격상 웃으며 허락할 것이다. 이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리 된다면 자연히 연재가 지연될 수밖에 없다. 피와 강철은 전개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다양한 것들이 튀어나온다."

 따라서 삽화를 필수적으로 넣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아이작에게 간택(?)당한 것이 아닌가."

 그런고로 자신 때문에 연재가 지연된다면 언론의 역풍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이작이 막아주긴 하겠다만 어디 세상이 쉽게 흘러갈리가 있나."

 일단 아무런 걱정없이 쉬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모두가 납득할만한 결과물을 보여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아. 이 사람 엄청 고생했구나'라며 납득해야 된다."

 소위 영혼을 갈아넣은 결과물이 필요하다는 뜻. 이런 저런 변명 같은 건 필요없다."

 감히 성자의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는데 힘들다는 이유로 쉬는 거냐! 라는 말이 쏙 들어갈 수 있도록."

 칼즈는 어떻게 하면 영혼을 갈아넣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텅 비어있는 캔버스에 손이 올라가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이미 완성한 작품들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이번 하이라이트인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연관된 그림들."

 워낙 처절하고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투여서 그림이 더욱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사람들에게 충격을 선사할 수 있으니."

 흠······""

 칼즈는 여태까지 작업한 그림들을 1열로 가지런히 배치했다. 이렇게 나열하니 자연스럽지는 않아도 이어지긴 한다."

 원래는 아이작이 보내준 밑그림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최근에는 원고까지 보내주고 있다."

 전후상황을 알게 되면 좀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는 아이작의 설명이다. 이건 자신도 동의하는 바여서 만족했다."

 '여기서 좀 더 자연스레 이을 수는 없으려나? 중간중간 대사도 넣고.'"

 칼즈는 가지런히 나열된 그림들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삽화다."

 소설을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는 역할. 하지만 이렇게 나열하니 가슴 속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여기에 더 추가하면 소설보다 좀 더 직관적인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이 아닌 상상대로의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이작은 물론 대중들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겠지."

 칼즈는 실로 오랜만에 가슴 속에서 뜨거운 창작 욕구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욕구를 풀기 위한 도구는 옆에 있다."

 하지만 참아야 된다. 아이작에게 말도 없이 멋대로 그렸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이에 그는 잠시 마음을 접어두고 옷부터 챙겼다."

 과연 아이작은 허락을 내려줄까. 칼즈는 긴장된 마음으로 마이샬 저택으로 향했다."

 그는 어지간해서 저택에 박혀있으니 방문만 한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해서, 일주일의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정말 좋은 작품을 보여드릴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음······""

 머지않아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들어온 칼즈. 그는 맞은편에 앉아 고민하는 아이작을 잠자코 기다렸다."

 루미너스로부터 건강한 신체를 얻은 아이작은 전과 비교했을 때 정말 성스러움이 흐르고 있다."

 보기만 해도 절로 무릎을 꿇고 싶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칼즈에게 악덕 고용주인 건 똑같다."

 돈을 많이 준다지만 휴식은 절대 주지 않는 사람. 어떻게든 휴식을 따고 싶은 욕구가 넘쳐났다."

 들어보면 만화 같은데······""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칼즈 씨의 말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여러 장면 및 연출을 추가하고, 더 나아가 대사까지 넣는다는 거죠?""

 아이작의 조리 있는 설명에 칼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원하는 게 딱 저런 형식이다."

 그에 아이작은 다시 한 번 고민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 된다면 칼즈 씨에게 시간이 더 없어질 텐데 괜찮은 건가요?""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칼즈는 긴장된 기색이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최근따라 작업량이 너무 많아서 너무 힘들다.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으나 정신적으로 점점 한계가 온다."

 예배실에서 휴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이다보니 이마저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아이작에게 피해를 주기는 싫으니 우선 영혼을 갈아넣은 작품을 내겠다."

 그 작품을 내서 모두를 납득시킨 후, 적절한 휴식을 취한 이후에 다시 돌아오겠다."

 흠······ 통조림에 다시 들어가는 건 싫죠?""

 다음 날 편지 하나만 놓고 이 영지를 뜨겠습니다.""

 얼마 안 지나서 잡힐 텐데.""

 ··· ···""

 장난입니다.""

 장난이 전혀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칼즈는 개구쟁이처럼 웃는 아이작이 마치 악마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는 악마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만약 거절한다면 울겨 겨자먹기로 다시 작업을 해야겠지. 어쩌면 통조림에 갇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네. 그러세요. 저도 기대가 되네요.""

 저, 정말입니까?""

 그런데 아이작은 흔쾌히 허락했다. 너무 시원하게 허락한 나머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다."

 칼즈의 물음에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실제로 칼즈를 너무 갈아넣긴 했다."

 그에게 휴가도 주면서 겸사겸사 정비도 하면 될 것이다. 어차피 당분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집중할 테니까."

 소련도 여전히 독일군과 치고 박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니까 칼즈의 그림이 필요할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궁금하기도 하고.'"

 과연 최초의 '만화'는 어떤 식으로 탄생할지 기대가 된다. 아이작은 기뻐서 환히 웃고 있는 칼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솔직히 말해 호박이 넝굴째 굴어들어온 격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특히 피의 오마하 해변은 글로 표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으니."

 그래서 그림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노예 아니, 그림 작가가 직접 만화를 그리겠다고 먼저 제안한 것이다."

 '기대되네.'"

 칼즈의 만화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그림은 예술이다. 머나먼 과거로부터 꾸준히 인정받은 사실이다."

 단 한 장만으로 다양하면서 깊은 의미를 담아야하며, 그걸 위해서 기본적인 실력도 구비해야 된다."

 또한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다시 그리거나 막히는 등. 예술가들 중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영감'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 영감을 통해 그림을 그려도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그림 한 장에 모든 걸 표현해야 되다보니 어쩔 수 없다."

 더구나 원근감, 역동감, 화풍 등등. 고려할 사항이 다른 예술가보다 훨씬 많다. 때문에 그림으로 명성을 얻는 건 매우 고된 일이다."

 칼즈도 아이작에게 간택 당하여 명예를 얻었으나 예술가로서의 명예는 글쎄? 라는 의문이 나온다."

 본인은 개의치 않겠지. 돈을 펑펑 벌어들이고 있는데 명예고 나발이고 의미가 있겠나."

 그래도 칼즈가 저평가된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표현력은 좋으나 그 안에 의미를 담지 못하는 그림 작가."

 하지만 그의 작품, '헥토파스칼 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연출 하나는 몇 시대를 뛰어넘을 정도로 훌륭하다."

 아이작도 그 작품을 보며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며 직접 목줄을······ 아니, 스카우트했다."

 이후로 단 한 장의 그림으로 많은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갈리고 갈렸다."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했지만, 아이작이 친히 강제 성장을 시켜준 셈이다."

 [연합군과 추축국 간의 지략 싸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 상륙작전 하나로 추축국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명줄이 늘어날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끊길 것인지.]"

 [상륙작전은 전술과 전략 모두 붙잡은 작전이다. 그러나 지원 사격을 할 해군 및 공군이 강하지 않으면······]"

 그러는 동안에도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점차 수면 위로 등장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워낙 그 명성이 명성이다보니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상륙작전은 처음일 것이다."

 애당초 상륙작전이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으며 기술적으로도 힘들다. 고속정이 반드시 필요한데 상륙 이전에 쳐맞고 끝나겠지."

 따라서 피와 강철에서만 할 수 있는 작전이라고 했으나 미네르바 제국은 다르게 느낄 것이다. 그들은 해군을 점차 강화시키고 있으니까."

 아무튼 모처럼 행해지는 대규모 작전인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도 남았다. 얼마나 박진감 넘치는 전투가 이어질까."

 이런 기대감을 지닌 채 사람들은 피와 강철의 신작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흠흠~ 흠흠흠~ 흠~""

 어느 한 청년이 콧노래를 부르며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청년의 주변에는 수많은 행인들이 오고 가고 있다."

 마이샬 영지에서 지내는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림에 종사하는 남자다."

 비록 '예술가'라 부르기에는 손색이 있으나 그림 실력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지망생."

 돈은 문제가 없는 것이, 마이샬 영지는 한창 발전 중이어서 단순한 노동만 해도 돈이 잘 벌린다."

 그렇기에 원하던 그림도 그리고 겸사겸사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상황.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쌓일 때 축구를 관람하거나 카드 게임을 한다면 모두 해소시킬 수 있었다."

 '오늘은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하군.'"

 그리고 그는 지금 피와 강철 신간을 구매하기 위해 서점으로 발을 옮기는 중이다."

 과거의 서점은 낡은 책 특유의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현재는 리모델링을 거쳐 수많은 책들이 모이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또한 피와 강철 신간이 가장 먼저 발매되는 곳이다보니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니까. 특히 남자가 기대하고 있는 건 바로 '삽화'다."

 '의미를 담지 못하면 뭐 어때?'"

 현재 그림 관련 예술가들 사이에서 칼즈는 '이단'에 가까운 평가를 받고 있다."

 의미를 넣기보다는 표현력에 치중하는 스타일. 아름다움보다는 역동감에 집중하는 스타일."

 제논의 작품과 동업을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대로 묻혔을 스타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 한 장에 다양한 의미를 넣는 게 아닌, 직관적인 표현한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그림이다. 특히 제논 같은 거장과 협업을 한다면 그 효과는 배가 된다."

 '한 번쯤 그와 함께 일하고 싶어.'"

 별의별 의미를 담는 예술이 아닌, 많은 이들이 즐겁게 볼 수 있는 그림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칼즈는 매일매일 처참하고 갈리고 있는 상태. 아이작처럼 쉽사리 만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교단 차원에서 그가 방해되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하고 있는지라 어지간하면 허락을 받아야 된다."

 따라서 칼즈의 그림을 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실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 나중에 문하생이라도 받는다 하면 그 즉시 달려갈 예정이다."

 '근데 왜 이렇게 춥지?'"

 한겨울이라 그런지 몰라도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는 느낌이다. 청년은 이 추위를 달래기 위해 서둘러 서점으로 들어섰다."

 전보다 훨씬 세련된 디자인으로 리모델링된 서점.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건 서점 주인이다."

 사실 서점이라 해봤자 아이작과 관련된 책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낙수 효과라고, 아이작의 책을 보러 왔다가 다른 책을 보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기에 매출은 잘 나왔다."

 응?""

 여느 때처럼 거인과 붉은 군대 두 책을 사려던 청년이 눈을 깜빡였다. 책 자체는 달라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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