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3 - 건강한 몸(2)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 공간에서 시간을 세는 건 의미가 없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지구처럼 다양한 운동 기구를 이용하지 않는다. 중력만 조금 강하게 올리고 무조건 맨몸 운동이다.
이러면 세밀한 부위를 키우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지 않냐 할 수 있다. 이런 내 의문에 루미너스가 알려줬다.
"건강한 몸이 곧 근육이 가득한 몸을 말하는 게 아니란다. 곧 있으면 알게 될 거란다."
그래서 미친듯이 굴렀다. 속으로 불평불만과 욕을 뱉어도 루미너스는 온화하게 웃으며 넘어갔다.
대신 그에 따라 강도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신이라서 대놓고 개길 수도 없으니 꾹 참고 넘어갔다.
여기서 악질인 부분이 있는데, 정신이 막 피폐해지려는 찰나에 휴식을 취한다. 신체가 신체인지라 눈만 잠시 감았다 떠도 회복된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다보니 어느새인가 체감이 될 정도로 체력이 늘어나더라. 어느새 무아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신체적 고통에 막 익숙해졌을 때쯤, 루미너스가 말했다.
"이만하면 되겠구나."
"네?"
내가 의문을 품기도 전에 루미너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나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중력이 강해지기 전에는 몰랐는데 몸이 이렇게 가볍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 구석구석 살펴봤다.
땀에 절여진 옷이 방해되서 상의는 벗어던진지 오래다. 솔직히 말해 달라진 곳은 거의 없다.
그나마 있다면 잔근육이 좀 더 오밀조밀해졌다는 걸까. 어깨도 살짝 넓어진 것 같다.
"신성력을 전달한다는 건 신체가 신성력에 완벽히 적응해야 된다는 것. 즉, 필멸자의 신체가 아닌 신의 육체를 가져야 된다는 뜻이란다."
"응?"
몸을 둘러보는 동안 루미너스가 담담하게 설명을 꺼냈다. 저 설명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행동이 이상하다. 손에 웬 쇠몽둥이 하나가 쥐어져 있는 게 아닌가.
안 그래도 무서운 몸을 가진 분인데 몽둥이까지 쥐어져 있으니 더 무섭다.
그나저나 저걸로 뭘 하시려는 거지?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오랜만이로군."
아니. 저 말은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내가 당황해서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까앙!
반응할 틈도 없이 루미너스가 몽둥이를 세차게 내려쳤다. 그것도 내 머리를 향해서.
너무 놀란 나머지 뒤늦게 팔을 들어 막았지만 이미 몽둥이는 내 머리를 정확히 강타한 후였다.
원래라면 기절하다 못해 곧장 저승으로 날아갈 위력. 하지만 기이하게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루미너스 님?"
"느낌이 어떠니?"
"느낌이고 자시고 심장이 벌렁벌렁거립니다."
"농담할 기운이 남아있는 걸 보면 괜찮은 모양이구나."
루미너스는 피식 웃으며 쇠몽둥이를 뒤로 던져버렸다. 그러자 쇠몽둥이가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당최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이에 내가 눈만 깜빡거리자 루미너스가 입을 열었다.
"신의 육체가 완성된다면 신성력이 모든 해악에 반응한단다. 방금 전처럼 말이지. 신성력이 모두 소모된다면 해를 입힐 수 있겠지만, 신성을 가진 신들은 신성력이 생성되니 의미가 없는 거란다."
"······그냥 미리 설명해주면 되지 않아요?"
"한 대 때려도 되겠냐 물으면 거부할까봐 그랬거든."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지금까지 속으로 욕을 좀 많이 했으니까.
아무튼 요지는 이거다. 내 몸에서 신성력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 누구든지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조건이 약간 걸린다. 대표적으로 매운 음식을 먹을 때다. 매운맛은 미각이 아니라 '통각'이라고 들었으니.
게다가 술도 있다. 술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끔 가다 가족들과 함께 마시는 경우가 있다.
확실히 필멸자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사람으로서의 감각은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신성력은 해악이 될 때 반응하는 거지, 감각은 그대로 유지가 되니까. 기준을 잘 모르겠다면 독을 마셔도 독 특유의 톡 쏘는 맛만 날 뿐, 그 독이 너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거란다."
"언제 들어도 비유는 잘하시네요. 전쟁이 아니라 문학도 담당하시나요?"
"··· ···"
궁금해서 물은 건데 루미너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 아픔을 건드린 모양이다.
나는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넘겼다.
"아, 아무튼 육체는 바뀌어도 감각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죠? 평소처럼 행동해도 된다는 건가요?"
"그래. 그 상태로 관계를 맺는다면 신성력을 전달할 수 있을 거란다."
"관계 없이 신성력을 전달하는 방법은요?"
"한 번 손을 바라보겠니?"
루미너스의 말에 따라 손을 쳐다봤다. 이제야 안 사실이지만 굳은살들이 전부 사라져 있다.
모라의 신성을 섭취하고도 박혔던 굳은살인데 완전 말끔하다. 고된 일을 했다고 생각될만한 손이 절대 아니다.
"그 상태로 한 번 마나를 손에 모아보겠니?"
화륵!
루미너스의 말을 따라 마나를 손에 모으니 웬 불꽃이 강하게 올라왔다. 깜짝 놀란 나머지 몸을 움찔거렸으나 곧바로 눈을 깜빡였다.
무채색에 가까웠으나 중간중간 빨간색과 황금색이 일렁이는 불꽃이다. 마치 내 머리카락과 눈동자처럼 말이다.
"그 기운을 압축해서 자그만한 구슬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구슬을 먹으면 신성력이 전달될 거란다"
"······지금 이게 마나가 아니에요?"
"마나가 전부 신성력으로 치환됐다고 보면 돼. 넓게 보자면 둘 다 '에너지'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서로 다른 것 같은 이론을 하나로 합치는 이론이 등장한 셈이지."
마나와 신성력 모두 '에너지'에 속한다. 이건 문과인 나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여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든 자연 법칙에 통달한 신들이니 결국에 같은 에너지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루미너스 님이나 모라 님처럼 기도를 통해 얻는 게 아닌가요?"
"지금은 안 돼. 너를 포함한 필멸자들은 3차원에 소속돼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속한 차원에 입성해야 기도만으로 신성력을 얻을 수 있을 거란다."
결국 이 불꽃을 꾸역꾸역 압축시켜 구슬로 만들어야 된다는 뜻이다. 건강한 신체가 완성되었으니 건강한 정신을 얻어야 할 터.
나는 손 위에 넘실거리는 불꽃을 거두고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루미너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이제 밖으로 나갈 때가 됐구나."
"네? 기운을 압축하는 연습은 안 하나요?"
"그건 네가 개인적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해도 상관없거든. 그리고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와 달리 내가 가르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건강한 신체는 건강한 정신을 얻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성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들도 깨달음을 뒤늦게 얻었다.
그러나 과연 내가 그들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내 성격이 성격인지라 어쩔 수 없다.
"굳이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단다. 언젠가 너만의 깨달음을 얻을 때가 올 테니까. 세상 또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이고."
"의미심장한 말씀이시네요."
"우리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너의 역할이 커질 테니 이정도는 예상할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 열심히 글이나 쓰라는 거구나.
중간중간 이곳을 찾아와서 신들의 과거를 듣거나 훈련도 하면 될 것이다.
"부디 잘 이겨내기를 기원하마."
"응원할 거면 책을 쓰기 쉽게 과거에 대해 조금만 알려주실 수 있나요?"
"허허허."
재빠른 내 부탁에 루미너스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뒤이어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뒤이어 복잡한 미소를 짓더니 나에게 말했다.
"과거에 내가 수염을 길렀다는 것만 알고 있으렴."
"수염이요?"
"그래. 수염. 풍성하게 길렀지."
외모가 외모다보니 풍성한 수염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오히려 수염을 기르는 게 근육질 몸매와 시너지가 맞아보인다.
마블의 토르 느낌이 물씬 풍길 듯한 느낌. 전쟁의 신과도 어울린다.
"또 기를 생각은 없으신가요?"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신도들이 생각하는 내 이미지가 아예 그쪽으로 고정됐거든. 그래서 함부로 기를 수가 없어."
"그 말은 신도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에 따라 신들도 외형이 변한다는 거예요?"
흥미로운 가설이다. 저 말이 진실이라면 과거의 외모가 지금과 다르다는 뜻이 아닌가.
"완전히 변하지는 않는단다. 단지 인상이 달리지지. 지금 내 얼굴이 '전쟁의 신'이라 생각하니?"
"아뇨. 빛과 희망이 가득한 얼굴이십니다."
"그런 거란다."
어쩐지 얼굴과 몸의 매칭이 잘 안 된다 했어. 완전히 변하지는 않아도 인상 자체가 변하는 거구나.
"그러니 너도 잘 기록해두렴. 네 특색이 특색이다보니 인상만큼은 잘 기록되겠지만 걱정되는구나."
"에이. 걱정도 참."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다라는 기록 하나로 성별이 바뀐 신이 있어서 그렇단다."
"··· ···"
그거 참 끔찍한 이야기네.
'그래도 이상하게 기록하지는 않겠지?'
*****
칼즈와의 인터뷰까지 끝난 케이트와 체리는 신전으로 복귀했다. 밤이 늦었기에 오늘은 두 명 모두 신전에서 머물 예정이었다.
케이트야, 신전에 머무는 날이 많으니 괜찮다지만 체리는 처음이다. 신전에는 순례자를 위한 방이 있으니 거기에 지내면 된다.
"만약 혼자 지내시는 게 힘드시다면 같이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괜찮으신가요?"
하지만 케이트는 그러지 않았다. 체리와 얘기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남았으니.
체리도 그녀의 권유를 흔쾌히 수락했다. 그녀도 케이트와 좀 더 말을 나누고 싶었다.
또한 친구라 부를만한 사람이었기에 거절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처럼 말이 통하는 상대는 찾기 어려우니.
"혹시 씻을 때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체리께서는 귀족이시니 하녀의 도움을 받았을 텐데."
"괜찮아요······ 혼자 씻는 건 가능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체리 먼저 씻······"
끼익-
케이트가 미처 말을 끊기도 전에 개인 예배실의 문이 열렸다. 그에 케이트와 체리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신전은 응급 환자 혹은 고해성사가 아닌 이상 문을 닫는다. 자연히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음? 아, 케이트 씨셨군요. 체리도 있고."
아이작이었다. 루미너스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저녁 늦게까지 남아있었다.
케이트와 체리는 생각치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 늘 그랬듯이 인사하려 행동에 나섰다.
아니. 정확히는 행동에 나서려고 했다.
샤아아-
"······아?"
"어······?"
그에게서 따스한 기운이 넘어오기 전까지는.
이전에도 이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진해도 너무 진했다.
저절로 무릎을 꿇고 싶은 경건함이 든달까.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 모두 즐거운 저녁 되세요."
하지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로했던 아이작은 그들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쳤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아까 그 기운이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이에 두 여인은 홀린 듯이 아이작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아침에 봤을 때와 다를 게 없지만, 몸이 더 탄탄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셔츠로도 가릴 수 없는 건강한 신체.
꿀꺽-
"······핫!"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가 화들짝 놀랐다. 가슴 속 안에서 우러러 나오는 '욕망'이 반응해버렸다.
혹여 체리가 눈채챘나 싶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들켰다면 정말 부끄러웠겠지.
"헤에······"
"······체리?"
하지만 체리의 상태가 이상하다. 어두운 눈동자는 여전하지만 입을 헤- 벌린 채 바보처럼 서 있는 게 아닌가.
입에서 침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이, 누가 봐도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체리! 정신 차리세요! 체리!"
"에, 에에?"
건강한 신체의 부가 요소는 건강한 정신만을 얻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호감. 특히 자신에게 이성으로서의 '애정'을 지닌 대상에게 주요했다.
쌩판 모르는 남이었다면 욕망보다는 경외감이 들었겠지.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에게는 전혀 다르게 작용했다.
그 예시는 아이작이 저택으로 복귀했을 때 드러났다.
"벗어."
"갑자기? 나 피곤한데."
"이렇게 꼴리는 몸을 가지고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빨리 벗어."
조용히 잠자고 있던 북극곰을 깨워버렸으며.
"저······ 아이작?"
"아델 누나도 하려고?"
"응······ 왠지 참을 수 없어서······"
충성심 강한 강아지도 앵겨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몰랐다.
"세, 세실리를 불러야 돼······ 더이상은······"
"아르웬······ 아르웬 여왕님이랑 레오나도······"
루미너스가 괴물을 키웠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