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625)화 (626/763)

Chapter 624 - 엿(3)

주객전도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앞뒤가 완전히 뒤바뀐다는 의미를 지닌 사자성어.

비슷한 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혹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라는 속담이 있다.

다만 위의 사자성어 및 속담은 이 세상에 없었기에 내가 직접 만든 것들이다. 덕분에 사람들도 저 말의 뜻은 안다.

이번에 내가 발표한 제논 일대기의 모티브도 일종의 주객전도라 할 수 있다. 제논 일대기를 미리 쓴 후에 클라크가 등장했으니.

그 안에 담겨있는 진실도 마찬가지다. 악마의 기원은 클라크로부터 들었지만 나머지는 전부 내 상상 속의 이야기다.

[제논 일대기는 실존하던 영웅의 이야기? 제논이 직접 밝히다.]

[세상을 악마 숭배자로부터 보호하던 영웅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모두 사라져······]

[마이샬 가문은 악마 전쟁 이후부터 50년 전까지 악마 숭배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상에 빨간머리가 별로 없는 이유 중 하나.]

하지만 제논 일대기는 실존한 이야기를 각색해서 만든 거라고 밝혔다.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거냐면 전에 말했듯이 아주 커다란 엿을 먹이기 위해서다.

원래는 그냥 '좆까' 한 마디만 하고 넘어갈 계획이었다만 며칠 전 테르스 왕국의 여왕, 마리아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이번에 일부 기자에 의해 일어난 사태는 자신들의 통제를 넘어선 일이라고. 누가 사주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들도 엄벌에 처할 거라고.

그 편지를 보고 바로 직감했다. 이거 분명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저지른 거구나. 테르스 왕국에서도 석연찮은 점을 느끼고 있구나.

이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낚아볼 요령이었다. 설령 낚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저들이 조져지는 건 똑같으니까.

[정말 괜찮겠느냐? 스켈레톤이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부터 문제로 삼을 텐데.]

"신들이 직접 부활시켜주셨는데 뭐가 문제가 될 건 없는데요? 그리고 케이트 씨도 보증할 테고요."

당연하게도 가족들, 특히 클라크와의 상의가 필요했다. 그는 지금도 두터운 갑옷을 입은 채 생활하고 있다.

저택의 고용인 및 공무원들에게는 아버지의 친한 친구라고 둘러댔지만 의심하는 사람도 슬슬 생기던 참이다.

아무리 친구여도 몇 달이 지나도록 저택에 박혀있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도 투구를 쓴 채.

기왕 이렇게 된 게 시원하게 밝히고 겸사겸사 엿도 먹이면 될 것이다.

[내가 말할 거라도 있는게냐?]

"그냥 옛날 이야기 해주시면 될 거예요. 무슨 단체 같은 걸 설립하면서 악마 숭배자들을 쓰러뜨렸다면서요?"

[단체라기보다는······ 그냥 모임 수준이었지. 다들 나한테 뭐 그리 급하냐고 묻다가 동행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비록 여정 도중에 다 죽었지만.]

클라크는 씁쓸하게 말씀하셨다. 해골이라서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지만 쓴웃음을 짓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의 인생은 제논 일대기 그 자체라 해도 무방하다. 내가 저런 기사를 당당히 낼 수 있던 것도 이때문이다.

업적을 이용해서 난관을 타파한다고? 애당초 그의 업적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오직 신들만이 알고 있었다.

클라크의 업적을 전세계에 알리고, 나를 때린 언론사에게 엿도 먹이고, 뒷배가 누군지 파악할 수 있다.

"흐음······"

나는 창문을 통해 저택 바깥을 쳐다봤다. 내가 퍼뜨린 소식 때문인지 대문 밖에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있다.

아마 내 말의 진의를 깨닫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겠지. 저 중 대부분은 언론사에 소속돼 있을 것이다.

조금 있으면 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내 이야기가 아닌 클라크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런데 정말 괜찮겠느냐? 만약 네 말이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난다면 더 골치 아플텐데.]

투구를 쓴 클라크 할아버지가 우려섞인 말을 꺼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케이트 그 아이가 도와준다고한들 너와 내가 만난 기간만 파악하면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을게다. 더구나 내 아들내미는 북부의 국경지대에서 고생했지 않느냐. 이건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구나.]

"아. 그거요?"

그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 듯하다. 미네르바 제국측에서 통제했다지만 지하 사원의 발견부터 제논 일대기 사이의 간극은 크다.

클라크 할아버지의 존재는 미네르바 제국과 케이트가 보증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제논 일대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다.

대대로 이어져 온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희생한 영웅. 정작 그 아들부터 시작해 후손은 업보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다.

이른바 연결고리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잘 설명해야 다들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

"그거 그냥 꿈으로 꿨다고 하면 끝이에요."

[꿈?]

"네. 신들의 도움으로 클라크 할아버지의 일생을 알게 됐다는 식으로요. 다만 무의식적으로 기억한 나머지 책의 형태로 쓸 수밖에 없다고 하면 될 거예요."

거짓말은 아니다. 클라크 할아버지와 만남을 가지고 나서 그 날 밤 꿈을 꿨으니까.

치명상을 입은 그의 모습과 소환에 실패한 군주들의 시체. 얼굴이 함몰되어 입만 살아있는 엘프까지.

비록 마지막이지만 클라크 할아버지에 대한 꿈을 꾼 건 사실이다. 못 믿겠다면 신에게 물어보라고 하면 끝이다.

[······손자야.]

"네. 할아버지."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믿을 수밖에 없는 거짓 아닌 거짓에 클라크 할아버지가 진심으로 탄복한다. 나는 괜스레 부끄러워져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다 꾸며내긴 해도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올 수도 있다. 이건 어느 정도 대비해야 된다.

보나마나 나를 공격한 언론사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겠지. 대충 예상이 간다.

똑똑똑-

[아이작 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때마침 바깥에서 케이트가 우리를 불렀다. 그녀도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그에 나와 클라크는 밖으로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문을 여니 해맑은 표정의 케이트와 마주했다.

평소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지만 지금처럼 해맑게 웃는 정도는 아니었다. 방금 전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케이트 씨?"

"말씀하세요."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뒷말을 흐렸다. 테르스 왕국 쪽 언론사가 나를 공격했을 때 케이트의 반응은 무시무시했다.

당장이라도 이단자를 쳐부숴야 된다며, 교단 차원으로 재판을 내려야 된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니.

표정도 매우 살벌했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말이다.

반면 지금은 행복에 가득 찬 얼굴이라 조금 의아해졌다.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로서 드디어 확신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무슨 확신을 말이죠?"

"아이작 님이 '성인(聖人)'이라는 확신입니다."

"··· ···"

그러고 보니 케이트는 내 진짜 정체를 모르고 있구나.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클라크를 쳐다봤다.

그는 말없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릴 뿐이었다. 지금 말해봤자 바뀌는 건 없으니 후딱 치우자는 무언의 표시다.

케이트의 오해 아닌 오해가 점점 깊어지긴 했으나 당장은 상관없다. 지금은 해결해야 될 일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다.

"음······ 좋은 일인 것 같으니 다행······ 이라 해도 되죠?"

"네. 아이작 님께서 무슨 진실을 밝히든, 그것이 곧 신의 뜻이니 충실히 따를 겁니다."

"··· ···"

어쩐지 신앙심이 전보다 더 깊어진 듯한 것 같다. 나는 부담스럽기 그지 없는 그녀의 눈길을 애써 피했다.

제논 일대기가 실존하던 영웅의 이야기를 각색했다는 것만 발표했을 뿐이다. 그런데 저런 반응이니 내가 놓치는 게 있나 싶었다.

케이트는 클라크와 직접 만남을 가진데다가 여러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그런 걸 수도 있다.

아니면 본인만의 사고 회로가 작동했다던가. 어찌 되었든 할 일은 같다.

이윽고 두 사람과 함께 저택 밖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중간에 껴있는 입장이라 동행하지 않았다.

마리와 아델리아도 마찬가지. 마리는 안정이 필요한 시기이며 아델리아는 그런 마리를 지켜야 되는 상황이다.

"제논이다! 저기 제논이야!"

"어디? 어디? 어! 진짜다!"

"여러분! 제논이 나왔습니다! 서둘러 준비하세요!"

내가 저택 밖으로 나오자마자 대문 쪽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오늘 대문을 지킨 경비원들에게 보너스라도 줘야겠다.

끼이익-

마침내 굳게 닫혀있던 대문이 열렸다. 대문이 열리자마자 무수한 시선들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대부분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이었으나 몇몇은 작정하고 나왔는지 긴장한 얼굴이다.

경비원들은 혹여 돌발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많은 의미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경비원들이 친히 만들어 준 공간에 당당히 섰다.

"······정말 많은 분들이 찾아와주셨네요."

그 한 마디로 순식간에 좌중이 조용해진다. 조금이라도 기록하기 위해 펜과 수첩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목걸이를 살포시 쥐었다.

"루미너스시여. 축복을 내려주소서."

간단한 기도문이었지만 시전자가 케이트다. 그녀는 두 손에 맺힌 빛의 기운을 천천히 옮겼다.

내가 아니라 두터운 갑주를 착용한 클라크에게로. 빛의 기운은 이윽고 그에게 서서히 스며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째서 축복을 클라크에게 시전했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반응이었지만, 그 반응은 머지않아 경악으로 바뀌었다.

축복을 받은 클라크가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리더니 두 손으로 투구를 서서히 벗었으니까.

"어, 어어?"

"스, 스켈레톤?!"

"맙소사. 어떻게 스켈레톤이······"

"축복을 받았는데? 대체 어떻게?"

투구를 벗자마자 드러난 건 평범한 얼굴이 아닌, 뼈밖에 없는 두개골. 푹 꺼져있는 눈에는 황금색 빛만 일렁였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은 건 두개골 전체에 불꽃처럼 일렁이는 황금색의 기운.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무슨 고스트 라이더도 아니고 성스러움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건 예상에도 없던 일이다.

'설마 케이트 씨가?'

이에 케이트를 힐긋거리니 그녀는 방긋 웃는 얼굴로 대응했다. 아무래도 신성력이 미쳐날뛰는 나머지 간단한 축복만으로 이런 모양이다.

어쨌거나 클라크는 누가 보아도 사령술로 부활한 스켈레톤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악스러운데 클라크는 한 술 더 떴다.

[이러면 되느냐?]

"네."

"마, 말까지 한다고?"

"이게 무슨······"

역시나 다들 믿지 못한다는 반응들이 대다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스켈레톤은 이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말을 하더라도 이성은 거의 없다.

사실상 몬스터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데 클라크는 이성을 멀쩡히 유지하고, 심지어 축복까지 받았는데 아무렇지 않다.

세간의 상식을 전부 부수는 현상. 이제 내가 할 일은 지금부터다.

"여러분께 소개드리겠습니다. 제논 일대기의 모티브이자 제 조부님 되시는 분입니다. 성함은 클라크 마이샬."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클라크에 대해 소개했다.

"보시다시피 다른 스켈레톤과 달리 신들의 가호를 받아 부활하셨으며······"

한치의 구라도 없는 진실이었다.

"제논 일대기의 주인공, 제논처럼 악마 숭배자의 계획을 직접 막으신 분입니다."

여기까지도 진실.

"그리고 저에게 그 영향을 끼쳤고, 그 덕에 제논 일대기가 탄생했습니다."

지금까지는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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