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2 - 엿(1)
세상이 바쁘게 움직여도 차근차근 진행되던 회색 사막 원정.
본래 엘레나가 예상한 바로 원정대가 수도로 진입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짧아도 반년으로 예상했다.
정복 국가로 명성이 자자했던만큼 영토 하나는 기가 막히게 넓었으니. 서쪽 전체를 지배했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따라서 수도로 진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이건 원정대뿐만 아니라 세이비어 교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하던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게리오스 왕국의 특징이다.
나라마다 독특한 문화가 있듯이 게리오스 왕국도 고유의 문화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기록'이다.
정복 국가가 으레 그러하듯 군사력이 아무리 강해도 내부가 엉망진창이라면 곧 무너진다. 이걸 묶는 것이 바로 '문화'다.
로마가 콜로세움을 비롯한 투기장을 지역 곳곳에 배치했듯이 게리오스 왕국도 점령지 곳곳에 도서관을 건설했다.
이 도서관은 평범한 도서관이 아니다. 성별과 계급을 막론하고 고위급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설이었으니.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무력 및 통솔력을 드러낸다면 누구나 장군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이는 '혈통'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다른 고대 국가는 혈통의 문제로 노예나 평민이 고위급 관직에 오를 수 없다. 그러나 게리오스 왕국은 다소 독특하다.
주술을 이용한다면 붉은 머리카락과 맹수의 눈동자를 얻을 수 있었으니. 혈통이 걸림돌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때문에 도서관은 기록을 모으는 곳임과 동시에 일종의 대학교와 비슷한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지식이 한데 모이는 곳이 등장하니 다양한 학문이 발전할 수밖에 없고, 승진의 길도 열려있으니 그 누가 충성하지 않을까.
비록 악마 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 및 기록이 소멸했으나 아주 약간이나마 남아있다.
[회색 사막 원정대가 도서관으로 추정되는 건물에서 기록을 발견했다.]
[피처럼 붉은 머리에 맹수의 눈을 가진 자가 이곳을 자신의 땅이라 호령했다.]
[이외에 남은 기록들을 보면 붉은 머리와 금안을 지닌 자가 항상 등장했다.]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고고학자들이 모인 원정대인만큼 고대어를 해독하고 문자를 조합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로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지 추측하는 괴물들. 여기에 문자만 있다면 파헤치는 건 일도 아니다.
덕분에 점령지를 지배하던 장군들의 특징이 '붉은 머리'와 '맹수의 눈'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모두 알다시피 붉은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는 마이샬 가문 고유의 특징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 사실은 바깥으로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 다음이 문제지.
[어째서 세이비어 왕국은 왜 수도의 진입을 막는 것인가? 원정대에 참여한 자들은 이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안전을 위해서라는 말은 거짓이다. 이들은 분명 숨기는 것이 있다.]
[원정 초기부터 시작된 잡음은 내부의 갈등으로 번져······]
원래부터 세이비어 교국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았던 상황이다.
다른 나라의 지원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신탁이랍시고 출발한 것부터 불만의 시작이다. 여기에 자기들이 먼저 수도로 진입하기까지.
고고학자들은 단지 확인을 위해 수도의 진입을 원했을 뿐이다. 헌데 세이비어 쪽에서 말도 안 되는 구실로 막아버리니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스트라이샌드 효과라고, 그냥 통과시켜주면 되는 것을 괜히 막아버려 세계의 이목이 회색 사막 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여기서 세이비어 교국이 할 수 있는 일? 그런 건 없다. 아무리 세이비어 교국이라도 여론의 압박은 이기지 못한다.
결국 온갖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끈 상태로 원정대의 수도 진입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짐의 왕궁에 귀찮은 놈들이 우르르 몰려온 거군.]
"······그렇습니다."
악마 전쟁 속에서도 건재함을 과시하던 왕궁의 알현실.
게리오스 최후의 왕, 모건은 세이비어 교국측 책임자인 데이모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데이모스가 전달해준 아이작의 책을 읽으면서 여흥을 즐기고 있었는데 웬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온 게 아닌가.
듣자하니 원정대에서 불만을 품고 강경하게 나선 고고학자들이라고. 물론 모건은 아무렴 상관이 없었기에 평소처럼 맞이해줬다.
원령이 가득 찬 왕궁 내부를 보자마자 곧바로 도망친 사람도 있었고, 알현실까지 도달해 약간의 진실을 마주한 자도 있었다.
이후로는 모건과 간단한 담소 아닌 담소를 나누면서 마이샬 가문에 대해 알려줬고. 여기까지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예?"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그대들이 곤란하든, 루미너스가 곤란하든 짐은 알 바가 아니다만?]
물론 모건 왕 입장에서는 '어쩌라고' 그 자체다. 고고학자들이 수도의 땅을 파든, 왕궁을 뒤적거리든 상관없다.
미련 같은 건 하나도 없는데다가 모건이 원하는 건 '성불'이었으니. 그래서 아이작에게 자신의 시체를 찾아 태워달라 부탁한 것이다.
뭐, 지금까지 보면 시체를 찾기는커녕 책을 쓰기 바쁜 것 같지만. 3000년을 기다렸는데 10년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저, 정말 괜찮으십니까? 이 진실이 퍼져나가면 왕의 후손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데······"
맞는 말이다. 진실이 퍼져나가면 루미너스 같은 신들보다 아이작을 포함한 마이샬 가문에 영향이 갈 것이다.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주범에다가 마족을 탄생시킨 왕족의 후손. 타이틀을 보면 여러 의미로 굉장하다.
그런 가문이 악마 숭배자를 조져버리고 핍박받던 마족을 구원했으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글쎄. 고작 그걸로?]
"예?"
[고작 그런 걸로 짐의 후손을 겁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만.]
하지만 모건은 심드렁한 반응만 보일 뿐이다. 오히려 뭐 그리 귀찮게 구냐는 표정이다.
이에 데이모스가 당황하는 동안 모건은 전에 만났던 아이작을 떠올렸다. 다른 세상에서 왔기에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멘탈도 은근히 유리 같으면서도 단단한 후손이다. 겨우 이정도 일 때문에 정신이 무너지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귀찮게 하지 말고 할 일이나 하러 가거라. 짐도 바쁘니까.]
"··· ···"
데이모스는 모건의 축객령에 그를 말없이 쳐다봤다. 모건 왕은 축객령을 내리자마자 책을 마저 읽었다.
그가 읽는 책은 '피와 강철: 붉은 군대'였다. 미국보다는 화끈한 소련이 더 마음에 든다나 뭐라나.
참고로 모건조차 나치 독일을 '미친 놈들'이라고 칭했다. 물론 윤리적인 의미의 미친놈들이 아니었다.
그 많은 양의 인구를 노동력이나 제물로 쓰지 않고 모조리 제거했으니 미친 놈이라고 한 것이다.
많은 의미로 윤리 의식이 옅은 고대인의 사고 방식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데이모스는 모건이 독서(...)에 집중하자 조용히 인사하고 알현실 바깥으로 나섰다.
뒤이어 활짝 개방되었던 알현실의 대문이 굳게 닫히고, 모건 왕만이 왕좌에 앉아있었다.
모건 왕은 알현실의 문이 닫히자 손에 쥔 책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러면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짐의 후손이 아니라 루미너스를 더 걱정해야 될 텐데.]
아이작에게 약간의 피해라도 생기면 똥줄이 타는 건 신들이다. 지구의 신이 이때다! 하며 침략할 수도 있었으니.
그 생각이 들자 모건 왕은 피식 웃으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장면이 나왔다.
[나치 독일과 소련을 합친 신이 그 놈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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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라도 6개월로 추정되던 회색 사막 원정대의 수도 진입이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졌다.
세이비어 교국이 숨기려다가 오히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세이비어의 실수라 할만하다.
엘레나 교수 입장에서 뒤통수를 맞은 격이겠지. 그나마 다행히도 엘레나 쪽에서 먼저 나에게 언질을 했다는 것.
언질이라 해봤자 원정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니, 그러니 미리 대비하는 게 좋다는 식에 가까웠다. 그래도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충격! 마족들은 사실 게리오스 왕국민들이었다! 악마와 마족의 기원은 인간임이 증명되었다.]
[마족을 탄생시킨 건 게리오스 왕국의 왕과 노예. 이들은 마이샬 가문과 같은 붉은 머리카락과 금색의 눈동자를 지녀······]
[왕궁에는 게리오스의 마지막 왕의 원령이 존재했다. 그가 직접 마이샬 가문은 본인의 후손이라 밝혀······]
준비하는 동안 세간의 시선은 마이샬 가문, 특히 내 쪽으로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진실이 진실이다보니 어쩔 수 없다.
물론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어서 별 반응은 없었다.
무려 3000년이다. 강산도 10년이면 변하는데 3000년은 지구로 따지면 기원전이다.
기원전에 발발했던 사건의 죗값을 끌고 온다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마이샬 가문은 3000년 간 악마 숭배자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았다. 이것만 본다면 누가 피해자인지 모르겠다.
[세상을 악마로부터 위협 받게 만든 마이샬 가문은 처벌 받아야 된다!]
끌고 오더라. 이 귀엽지도 않은 십새끼들을 보았나.
대체 어느 여론이 이딴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꺼낸지 봤더니 테르스 왕국 쪽이다.
정확히는 테르스 왕국 쪽의 언론사가 이딴 기삿거리를 내놓은 거지만 사실상 테르스 왕국이 한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어쩌면 마이샬 가문이야말로 진짜 악마 숭배자와 연관이 있을지도······]
[마족들을 구원한 것도 계략의 일부······]
[대공황을 촉발시킨 피와 강철도 어쩌면······]
여론의 질타를 받는데도 꿋꿋이 기사를 내놓더라. 입으로 똥을 싸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나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내가 따로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묻힐 테니까.
하지만 원래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한 번 의심이 피어오르니 다른 사람들도 점점 바뀌었다.
[제논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해명을 해야 된다. 그는 이 진실을 알고 있었는가?]
[모를 리가 없다. 그는 분명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진실을 알고 있기에 제논 일대기와 피와 강철 같은 작품을 썼을 것.]
억까를 시전하더라. 이걸 보고 나서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마리와 내 가족들은 당장 재판에 회부시킬 거라니 뭐니 했지만 간신히 뜯어말렸다.
이들이 먼저 공격한만큼 나도 따로 준비한 게 있었다.
"뭘 준비한 거야?"
"엿."
"엿?"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마리에게 상큼한 미소를 지어줬다.
"아주 크고 아름다운 엿을 먹을거야."
"······?"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가 이리 귀여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