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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621)화 (622/763)

Chapter 620 - 공모전(3)

가끔 가다 심심풀이로 행한 일이 세계의 역사를 크게 바꾸기도 한다. 이건 나만 통용되는 소리가 아니다.

지구의 가장 큰 예시로는 그 유명한 뉴턴이 있겠다. 약간 과장을 보태어 그는 심심풀이로 '미적분'을 발명했다.

기존 수학으로는 복잡한 계산이 불가능하여 자기가 직접 만들었다나 뭐라나. 덕분에 현대의 수많은 고등학생이 수학을 포기했다.

이 세상도 미적분이 존재하지만 여러 학자가 머리를 맞대며 연구한 결과다. 뉴턴처럼 시대를 초월한 학자가 심심풀이로 만든 게 아니다.

아무튼 심심풀이 혹은 취미로 저지른 일이 세상의 역사를 크게 바꾸는 경우가 많다. 당장 나만 해도 역사가 오락가락하는 중이다.

멸망기사를 집필한 로만도 비슷한 심정이겠지. 본인 딴에는 과연 이 작품이 통할까 싶어 남몰래 공모전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예상을 한참 웃도는 관심과 더불어 제논 일대기에 버금 간다는 평가까지 받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는 5권부터 그 관심을 얻었는데 소재가 워낙 맵다보니 멸망기사는 등장 초기부터 관심을 얻었다.

로만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나에게 푸념만 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그는 성직자, 그것도 이단심문관이다.

일체의 과장도 없이 이단자라며 화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신의 의의를 건드리는 건 용납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마치 나를 욕해도 부모님을 욕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는 개념과 비슷하다. 실제로 교단은 자기들이 욕 먹어도 너그럽게 넘어간다.

하지만 그들이 모시는 신을 건드리는 순간 눈이 뒤집힌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지만 교단은 그런 거 없다.

신을 모욕하는 순간 뚝배기가 날라갈 준비부터 하는 게 좋다. 심지어 주변인조차 도와주지 않는다.

물론 사람 말은 잘 들어야 하기에 재판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모욕도 애매한 모욕이 있으니.

"무슨 약······ 아니. 무슨 정신으로 이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로만이 저지른 짓거리는 이단자의 범위를 한참 넘어섰다. 이단이고 뭐고 신성모독에 준하는 수준이다.

심지어 그는 교황의 아들로 잘 알려진 인물. 광신도에 가까운 케이트가 직속상관인데 지금 엄청 똥줄이 타고 있지 않을까.

로만은 내 질문을 듣고 착잡한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논 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성직자는 신학을 연구합니다. 신이 행하신 일을 통해 철학을 깨닫고 나아갈 길을 잡는 편이죠."

"알고 있습니다. 루미너스 님의 신학에서는 빛이 곧 희망이요,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지는 법이라고 하셨죠. 그 그림자를 짊어지고 나아가야 된다고 하셨고요."

겉으로만 본다면 철학적이면서도 좋은 신학이자 교리다. 대다수의 루미너스 신도가 저 교리를 충실히 이행하고 따른다.

하지만 곱씹어본다면 심히 의미심장하다. 여기에 나는 루미너스의 본성과 진실을 얼추 알고 있다.

한때 전쟁을 관장한 신으로서, 또한 패륜을 저질렀던 아들로서 그림자는 다양한 의미를 포함했다.

저기서 언급하는 그림자는 절대 모라가 아니다. 은연 중에 본인의 잘못을 담았다.

"역시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저 또한 그 교리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하지만 회색 사막 원정에서 얻은 진실로 그림자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진실이라면······"

"악마의 기원이 실은 인간이라는 진실이죠. 제논 님이 먼저 알려줬던 진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클라크 할아버지가 직접 알려주신 진실이라 별로 놀랍지 않다.

물론 세이비어 교국은 난리가 났지만. 모라를 신봉하는 헬리움에서도 세이비어와 비견되는 충격을 받았다.

국제 사회에서의 힘이 세이비어가 더 강했기에 묻힌 거지, 헬리움에서도 원정 참여를 적극적으로 나섰던 걸로 안다.

"그 진실을 알고 나서 조금씩 깨달았습니다. 신들께서도 잘못이 있으셨구나. 그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신 거구나라고."

"흠. 그것과 멸망기사가 무슨 관계인가요?"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악마의 기원이 인간이라면, 누가 악마를 창조한 것일까. 이 세계가 아닌 외부의 신이 침략을 위해 고의적으로 그런 게 아닐까······ 라고."

나는 저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인은 상상력에 기반한 이야기겠지만 진실에 근접해 있다.

외부의 신을 악마 숭배자가 추종하는 만물의 아버지로 바꾼다면 딱이다. 작은 눈덩이 하나가 산사태로 변하는 중이다.

"이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건 제가 제논 일대기의 팬이라서 그렇습니다."

"제논 일대기의 팬인 게 원인이라고요?"

"네. 만약 영웅이 등장하지 않은, 혹은 패배한 세상은 어떻게 될까······ 라는 이야기죠. 여기에 악마의 기원을 추가한 거고요."

돌고 돌아 나 때문이구나. 내가 뿌린 씨앗들이 합쳐진 게 멸망기사라는 작품이다.

신을 굳게 믿고 있는 성직자인만큼 큰 혼란을 겪었을 터. 거기서 약간의 틈이 생긴 것 같다.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직자가 이런 글을 썼는지 이해가 조금 갔다. 이단적인 건 똑같지만.

"잘 알겠습니다. 혹시 루미너스 님께 예배는 드렸나요?"

"예."

"아무런 반응도 없으셨나요?"

"평소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쓸 수 있던 거고요."

"그러면 당당히 밝혀도 되지 않나요?"

사실상 루미너스도 허락한 건데 그냥 당당히 밝히면 되지 않나 싶다.

내 의문에 로만은 쓴웃음을 짓더니 많은 의미가 함축된 대답을 꺼냈다.

"혹시 가끔 가다 루미너스 님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경우를 겪은 적이 있으십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요."

할 말이 없군. 한때 제논 일대기를 집필했던 자로서 심히 동감이 가는 말이다.

갑작스러운 관심도 관심이지만 부담감이 장난 아니다. 취미로 쓰는 건데 세상이 막 난리를 치니까.

베스트셀러 혹은 셜록 홈즈처럼 특정 나라만 관심을 가지는 거면 모른다. 그런데 세상의 관심이 쏠리니 머리가 어지러울 것이다.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당분간 익명성을 유지하는 걸로 결정하면 되겠네요. 실례지만 앞으로의 스토리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어······"

내 질문에 로만의 갈색 눈동자가 데록데록 굴러간다. 그 반응에 뭔가 불길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윽고 그는 머쓱한 웃음을 짓더니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솔직담백하게 말했다.

"모르는데요?"

"······예?"

"정한 게 없습니다. 진짜 취미 수준으로 쓴 거라서······"

"그런 사람이 결말을 그런 식으로 적었어요?"

멸망기사 1권의 결말은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는 식이다. 그 전에 각 종족마다 행동 양상을 보여주는 건 덤.

엘프는 없어진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미쳐가는 중이고, 드워프는 할 일 없이 땅만 우직하게 파고 있다.

마족은 절제심을 잃어버린 나머지 틈만 나면 악마로 변하고, 수인은 아포칼립스 특유의 약육강식에 적응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제일 다양한데, 온갖 인간군상이 몰려있는 인간들인지라 선악조차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미쳐가고, 어떤 사람은 우직하게 할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고.

이후에 주인공은 그런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며 여행을 떠난다. 난 당연히 다음 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상관없지 않습니까?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으니 괜찮은 결말이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런 상상력을 더 자극시킬 수 있도록 글을 더 쓰셔야죠."

그냥 책 하나로 끝내면 되지 않냐는 쪽과 더 써야 된다는 쪽으로 갈렸다. 이건 예상 외의 상황이라 나도 열변을 토했다.

로만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그것과 별개로 이대로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소재다.

각 종족마다 보여준 행동 양상도 양상이지만 좀 더 창의력을 발휘해야 완성도가 높아지는 작품.

'뭔가 장기 연재를 끌어내는 출판사 같긴 해도······'

작품이 망가질 일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전적으로 케어할 테니까.

이쯤되면 사실상 공동 집필이긴 해도 나 또한 부담을 짊어지는 셈이니 나쁜 건 아니다.

"그······ 실례지만 저는 제논 님 같은 분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2권씩 낼 여력이 없어요."

"선생님. 그건 제가 이상한 거고 원래 한 달에 한 권씩 내는 게 정상입니다. 아닌 말로 저 말고 누가 30권 이상에 달하는 이야기를 내겠어요?"

"그것도 그렇네요."

솔직히 제논 일대기의 스토리가 비정상적으로 긴 거지, 멸망기사가 지극히 정상적이다.

지구의 유명한 책들을 보면 대부분 책페이지가 두꺼울지언정 한 권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허나 멸망기사의 소재는 한 권으로 끝내기에는 너무나 아쉽다. 당장 차오르는 아이디어만 하더라도 수 십개가 넘었다.

"그래도 한 번 재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이디어가 걱정되신다면 제가 직접 조언을 드릴 수 있어요."

"조언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죠?"

"전반적인 스토리 라인부터 시작해 캐릭터 조형이라던가 특정 인물의 비밀이라던가 등등. 많죠."

지구에서 잘 쓰이는 소재 중 하나가 멸망 직전의 세계, 그러니까 아포칼립스물이다.

좀비, 역병, 자연재해, 핵전쟁 등등. 온갖 이유를 다 갖다 대고 멸망 직전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중 9할에 달하는 작품이 현대를 배경으로 두지만, 가끔 가다가 판타지 계열의 아포칼립스물도 있다.

둘의 공통점은 꿈도 희망도 없다는 것. 그냥 자기만 잘 살 거나 아니면 정처없이 배회하는 경우가 많다.

"음······ 예를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감이 잡히지 않는 건지 로만은 조심스레 부탁했다. 이에 나는 미리 구상했던 설정 중 하나를 시원하게 밝히기로 정헀다.

어차피 내가 아니라 로만이 쓸 건데 숨길 게 뭐가 있다고. 로만이 쓸 수만 있다면 다 좋다.

"헬리움에 리퍼를 알고 계십니까? 2년 전에 헬리움 측에서 밝힌 결사단체."

"원래는 결사단체였다지만 지금은 기사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리퍼면 알고 있습니다."

가르츠가 몸 담고 있는 기사단, 리퍼는 원래 비밀 결사 조직이다.

악마화가 진행 된 마족을 처치하거나 혹은 강경파 마족의 흔적을 쫒아 처단하는 단체.

이전까지는 임무가 임무다보니 상당히 비밀스러운 조직이었지만, 제논 일대기에 '악마 사냥꾼'이 등장하면서 정체가 탄로났다.

나로서는 이왜진 그 자체여서 심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사크란의 활약이 활약인지라 그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도리어 거룩한 운명을 스스로 짊어진 기사단이라며 추종하고 있다. 세실리에게 듣자하니 마족 아이들의 꿈이 리퍼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 리퍼라는 단체의 비극성을 한층 더 강조할 예정이었다. 로만이 멸망기사를 쓰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리퍼는 본래 악마화가 진행된 동족을 처단하는 결사단체죠. 그러면 멸망기사 속의 세상은 어떻게 됐을까요?"

"마족이 시도때도 없이 악마화가 되니까······ 그들을 처치하고 다니겠죠?"

"네. 그리고?"

"그리고? 또 있습니까?"

로만이 의아한 표정을 되물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약간의 힌트를 줘야할 것 같다.

"당연히 있죠. 어느 날 주인공이 악마와 마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있는 리퍼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 리퍼는 사방에 악마가 있다며 미쳐버린 상태로 주인공을 공격하는 거죠."

"··· ···"

"아니면 본인들마저 악마화를 이기지 못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참상을 발견한다던가? 선택은 자유롭게 하면 됩니다. 어쨌거나 마족 특유의 비극성을 강조시킬 수 있으니 좋은 설정이죠."

내 설명을 들은 로만의 반응은 사뭇 볼만했다.

"제논 님. 감히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평소에 무슨 마약을 하시길래 그런 설정을 곧바로 지어낼 수 있는 겁니까?"

악마 혹은 이단자를 처형하는 이단심문관으로서의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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