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620)화 (621/763)

Chapter 619 - 공모전(2)

이런 말이 있다. 원시인은 지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해 멍청한 거라고.

부모는 원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자식은 항공기 조종사였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가끔 가다 양복을 차려입고 고향을 방문한다 들었다.

이처럼 인류의 지능은 보편적으로 보았을 때 원시인과 다를 바가 없다. 문명의 발전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뉠 뿐이지.

또한 풍족한 삶도 한몫했을 것이다. 유명한 철학가들을 보면 대부분 부유한 자산가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옛날 사람이라 해서 현대인보다 지능이 낮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

이건 환생하기 전에도 갖고 있던 생각이고 환생 이후에도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승승장구한 나머지 약간 오만해졌을까.

[최근 제논 공모전에서 등장한 소설이 화제다.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기사. 이 작품은 제목처럼 멸망을 향해 다가가는 세계 속에서 각 종족이 무엇을 할지 보여주며······]

[기사는 그 어떤 묘사도 되지 않는다. 단지 두터운 철갑옷과 투구를 쓴 기사일 뿐. 인간인지 엘프인지 마족인지 수인인지 드워프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 어떤 체형도 묘사되지 않아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세계관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다. 하늘은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죽은 자들이 부활해 순리가 망가졌다는 걸 보여준다. 여기서 기사처럼 멀쩡히 이성을 유지하는 자들은 걸어다니는 자 즉, '워커'라고 칭하며 반대로 이성을 잃은 자들은 평범한 언데드로 칭한다.]

피와 강철 다음으로 쓸 예정이었던 작품이 공모전에 등장했다. 원래 갖고 있던 소재를 눈 뜨고 코 베이는 식으로 빼앗긴 것이다.

피와 강철은 지구의 역사를 그대로 따온 거라 오만해질 일이 없지만, 제논 일대기가 문제다.

제논 일대기의 예상치 못한 대성공으로 이 세상이 문학 또는 창작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이는 말 그대로 잘못된 생각이었다. 나는 경험의 스케일이 큰 것일 뿐, 엘프나 마족처럼 나보다 오래 산 종족이 널려있다.

하물며 상상력이 부족할 일도 없다. 그냥 책을 안 쓰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 상상력을 자극할 소재는 넘쳐난다.

3000년 전에 발발한 악마 전쟁부터 시작해 300년 전의 종족 전쟁. 미지로 판명되고 있는 바다와 개발되지 않은 숲.

마지막으로 진실이 묻혀있는 고대 왕국, 게리오스 왕국까지. 소재는 여기저기에 널려있다.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기사(이하 멸망기사) 외에 훌륭한 작품들이 많지만, 이중 멸망기사가 제일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다만 멸망이라는, 아주 자극적인 소재로 인해 교단 측에서 적지 않은 반발이 존재한다. 세상이 멸망한다는 건 즉, 신들이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하니.]

[제논을 비롯해 출판사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제논 일대기처럼 소설은 소설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기사, 줄여서 멸망기사는 약간 과장을 보태 제논 일대기에 버금가는 관심을 얻었다.

다른 작품들도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소재가 소재다보니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필력 및 가독성도 흠잡을 곳 없이 뛰어나다. 어려운 단어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단어를 채택하고, 잘라야 할 곳은 확실히 잘랐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분위기. 하늘에서 꾸준히 쏟아지는 소나기도 소나기지만 묘사되는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다.

체리가 성격에 맞지 않게 따뜻하면서 감성적인 문체가 인상적이라면, 멸망기사는 정확히 반대다.

음울하고, 무미건조했으나 그것이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냥 재밌다.

"그냥 미리 낼 걸 그랬어······"

그래서 더 침울해졌다. 차기작으로 지정된 소재였는데 누군가 덜컥 빼앗아갔으니 조금 우울해졌다.

전생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시간 관계상 입맛만 다시고 넘어갔다.

지금은 경우가 약간 다르다. 요식업으로 치자면 나만이 알고 있다 생각한 비법 소스를 누군가 선점한 느낌이랄까.

알게 모르게 깔려있던 오만함에 치명타를 가한 나머지 현타가 몰려왔다.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야?"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향해 마리가 물었다. 웃음기가 담겨있는 걸 보아하니 내 모습이 조금 웃긴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리니 아름다운 마리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에 들기 전이라 빛은 등불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의 새햐얀 미모는 감출 수 없었다.

"질투는 아닌데······ 당연히 내 거라고 생각하던 걸 눈 뜨고 빼앗긴 느낌?"

"저 사람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같은 거?"

"비슷한······ 가? 아무튼 그런 거야."

마리는 내 대답을 듣고 소녀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의외네. 나는 네가 시원하게 넘길 줄 알았거든. 가끔 가다 이렇게 귀여운 면모가 있단 말이야. 그래서 어떡할 거야?"

"어떡하긴? 지켜봐야지. 그거 원래 내가 먼저 선점한 거라며 다시 빼앗을 수도 없잖아? 그러기도 싫고."

소재는 이미 나에게 손을 흔들고 강을 건넜다. 내가 더 빨리 쓸 수 있겠지만 그러면 공모전을 연 의미가 없다.

그래서 가만히 지켜보기로 정했다. 사실 이 말도 마리에게만 한 거지, 머스크를 비롯해 다른 지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괜히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고 그 사람은 100% 확률로 매장당한다.

더 나아가 폭군 이미지를 얻을 수도 있어 지금으로서는 잠자코 지켜보는 게 좋다.

"너는 읽었어?"

"당연히 읽었지. 분위기가 이정도로 어두울 수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 한 번 만나볼 거야?"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히트를 치고 있는 작품인만큼 작가는 직접 만날 예정이다.

공모전에 참여할 때 본인의 인적 사항을 모두 적으라고 했으니 저택에 초청하는 건 어렵지 않을 터.

작가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좀 나누고, 더 나아가 어떤 스토리 라인을 잡을 건지 의견을 들어볼 예정이다.

"만나서 한 번 얘기를 들어봐야지. 객관적으로 보면 다소 불경한 이야기잖아? 순리가 어긋났다는 건 신이 제 역할을 못 한다는 뜻이고, 신이 제 역할을 못 한다는 건 패배했다는 뜻이니까."

"하긴. 그거 때문에 말이 많더라. 그럼 작가가 부담되지 않도록 네가 힘을 써줄 거야?"

"일단은."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지만 결국 부담감은 본인이 직접 해결해야 된다.

나도 제논 일대기를 작성할 때 중간중간 회의감이 들었지 않았는가. 취미로 썼을 뿐인데 왜 이리 됐냐고.

"선택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한테 있어. 나는 도움만 주는 거고."

"못 하겠다고 너한테 떠넘기면?"

"감사합니다라고 해야겠지?"

"못된 아이."

내가 냉큼 대답하자 마리는 피식 웃으며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살포시 두 손으로 맞잡았다.

이제 정겨운 대화는 그만하고 슬슬 잠에 들 때다. 마리도 내 의사를 읽었는지 부드럽게 웃어줬다.

"그럼 아침에 봐."

"응. 좋은 꿈 꿔."

"이미 꾸고 있는 걸?"

어쩜 이리 예쁜 말만 골라서 할까. 나는 등불을 끄기 전 마리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오늘도 하루가 무난하게 지나갔다. 쓸쓸할지언정 정말 행복한 하루가.

*****

공모전의 규칙은 매우 간단하다. 간단하게 인적 사항을 적은 후, 본인이 내고 싶은 작품의 원고를 제출하면 끝.

대신 자기가 썼다는 인증이 필요하기에 전반적인 스토리를 요약해야 된다. 한 마디로 대리 제출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는 의미다.

신변이 알려지면 안 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냐고 할 수 있는데, 맞는 말이다. 가끔 가다 곤란한 사람이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악마 숭배자가 섞여있을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마이샬 영지에 찾아온 것만으로도 걸러지겠지만 만약이 있으니.

그래서인지 아주 가끔 가다가 고위급 귀족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더라. 심지어 작은 왕국의 왕족이 찾아온 적도 있었다.

물론 익명을 원한다면 필명을 대신 내세우는 편이다. 대부분의 공모전 참가자가 필명을 사용하고 있다.

저택에 초대하기로 정했던 멸망기사도 비슷한 예시다. 다만 멸망기사의 작가 같은 경우는 매우 '독특'했다.

"정말 본인이 작가 맞으시죠?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기사를 작성하신 분."

"네, 네! 맞습니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남자답게 각진 얼굴. 우묵한 눈과 짧게 친 갈색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

남자는 평범한 의복이 아닌 새하얀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나는 저 복장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잘 알고 있다.

빛과 희망의 신, 루미너스의 신도만이 착용할 수 있는 옷. 다시 말해 성직자다.

"성함이······"

"로만 벨루어입니다."

"네. 로만 씨. 그런데 인적 사항이 조금······ 독특하신데요?"

멸망기사는 멸망 직전에 다다른 세상 속에서 주인공 및 각 종족의 행동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구라면 그거 어디에나 있을 법한 소재 아님? 이라 하겠지만 이 세상 입장에서는 불경하다! 라고 외칠만한 소재.

당장 성직자가 이런 소재를 가지고 책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건 그의 직업이다.

"보아하니 케이트 추기경을 따르고 있는 이단심문관이라고 하시던데······"

"······네."

"심지어 교황의 친아들이시고."

이단심문관인 건 진작에 알고 있었으나 교황의 친아들인 건 처음 알았다. 이건 머스크가 따로 알려준 정보다.

현 교황은 케이트 이전의 대심문관이었던 사람이다. 겸사겸사 케이트의 첫번째 무예 스승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의 아들이 참으로 불경한 소설을 썼다.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교황님께서는 이를 알고 계신가요?"

"······전혀 모릅니다."

"알게 되신다면?"

"불경하다고 절 불덩이에 집어넣겠죠."

이른바 아주 좆 돼버린 것이다. 하지만 로만의 사정은 사정이고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 있는 로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약간 이해가 안 간다는 식으로 물었다.

"왜 이런 소재를 사용한 겁니까? 성직자나 되시는 분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냥 취미로 쓴 겁니다."

"취미요?"

"네. 그런데 이렇게 관심을 받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 ···"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더 심하지 않나?'

이 사람은 목숨이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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