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8 - 공모전(1)
일주일 동안 짧게 진행됐던 강의는 무난하게 끝마쳤다. 성공인 것도 실패인 것도 아닌 정말 무난했다.
다만 작문법 즉, 문예창작과라는 개념이 없었던만큼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이 세상의 문학이 아무리 어렵다지만 문맹은 거의 없다.
교육이 시대에 비해 잘 발달된 것도 있지만 신의 선물인 언어를 못 배우는 건 죄악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만큼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더라도 종교계가 대신 깨우치게 도와준다. 덕분에 문맹률은 극히 적다.
하지만 글을 깨우치는 것과 별개로 소설이나 시를 가르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성작가들이 글을 너무 어렵게 쓴 것도 있지만 자기가 알아서 독학해야 된다는 마인드가 깔려있다.
이러한 분위기 덕분에 테르스 왕국에서 다양한 시인 및 작가들이 등장할 수 있었으며 그 개성마저 뚜렷하다.
문제는 가끔 가다가 자신의 글이나 시의 문체를 따라했다고 시비를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 때문에 관련 법까지 개정됐다더라.
그래서인지 시나 소설을 쓸 때마다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나 또한 비슷한 일례를 겪은 탓에 공모전도 폐기됐지 않았는가.
[헤일로 아카데미에서 일주일 동안 강의를 끝낸 제논. 조만간 출판사 측에서 공모전을 개최할 것.]
이제는 아니다. 강의를 한 이유에는 재단 홍보도 있었으나 공모전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서다.
지난번에는 교단에서 말이 되면서도 안 되는 듯한 구실을 대는 바람에 묻혀버렸지만 강의 이후부터 당당해질 수 있다.
내가 그러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그걸 기반으로 둔 사람들이 공모전에 참여하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글은 분위기나 문체를 따지지 않고 자유로워야 된다. 애당초 사람마다 개성이 천차만별인데 글의 분위기가 똑같을 일은 없다.
물론 복사를 한 것마냥 내용이 똑같다면 단호하게 잘라야겠지. 겸사겸사 영지 홍보도 할 수 있으니 더 좋다.
[쿠르스크에서 발발한 거대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보다는 아니지만 10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병기들의 피해는 더 극심하다. 1만에 가까운 강철 병기들이 전부 고철덩어리가 되었다.]
[나치 독일과 소련만이 행할 수 있는 전투. 마치 기사들의 전투를 방불케한다.]
피와 강철의 연재도 잊지 않았다. 때마침 기갑 전력들의 한 판 승부, 쿠르스크 전투가 발발해 많은 주목을 끌었다.
쿠르스크 전투는 전에 말했듯이 두 나라 사이의 기갑 전력들끼리 맞붙은 대결이다.
소련은 늘 그랬듯이 인해전술로 나섰고, 나치 독일은 티거를 위시한 전차들을 내세웠다.
그리고 소련은 나치 독일에 비해 약 4~5배나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규모만 보자면 소련의 패배다.
[소련은 그냥 많이 만든다. 전차도, 비행기도, 사단도. 그냥 많이 만든다.]
[군대는 질도 질이지만 양이 제일 중요하다. 더구나 나치 독일은 소련만큼 뛰어난 생산 능력이 없다.]
[여기에 미국의 렌드리스까지 있으니 나치 독일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기갑 전력은 이 전투를 기점으로 공세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전선에 나서는 개개인들의 능력은 더할 나위없이 훌륭하지만, 그 놈의 보급과 지원 능력이 발목을 붙잡았으니.
아니. 이제는 발목을 붙잡은 수준이 아니라 발목을 잘라버렸다. 더이상 나치 독일은 전차를 찍어낼 여력이 없다.
반면 소련은 이야기가 다르다. 독소전쟁 초기 공장들 대부분을 우랄 산맥 쪽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말로만 들으면 쉽겠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겠다. 공장들을 말 그대로 옮겼다. 그것도 전쟁통에.
덕분에 소련은 안전하게 물자 공급을 할 수 있었으며 사람만 갈아넣으면 땡인 상황인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병기여도 적재적소에 투입시키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전쟁은 늘 그랬다.]
[원래 소수의 정예 병력보다 균등한 양질의 군대가 강한 곳이 승리하는 법이다.]
[가장 큰 강점이었던 기갑 전력 대부분을 상실한 나치 독일. 점점 그들의 패망이 다가오고 있다.]
나치 독일의 창이 부러진 것과 달리 소련의 창은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생산되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누가 유리하고 누가 불리한지 알고 있을 터. 참고로 이 전투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생존자, 드미트리도 참여했다.
일반적으로 보병은 전차병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개연성을 위해 드미트리가 형벌 부대원이라는 설정까지 추가했다.
가끔 가다가 형벌 부대가 전차병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으니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첫번째 탑승 전차가 쓰레기 중의 쓰레기인 경전차라서 생존 확률이 한 자리 수라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드미트리는 주인공이니 나름 실적도 쌓아 T-34에 탑승시켰다. 아버지를 모티브로 둔 사람이 죽으면 좀 이상하지.
[티거를 비롯한 나치 독일의 전차들을 완파시킨 드미트리. 그의 영웅적 행보는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언젠가 드미트리가 나치 독일에 소련의 깃발을 꽂을 거라 확신한다.]
독자들도 드미트리의 복수혈전에 열렬히 응원했다. 주인공이 생기니 붉은 군대의 인기가 나날이 상승하더라.
뭔가 전생의 모 게임이 떠오르긴 하지만 넘어가자. 어차피 드미트리는 나치 독일을 조지는 걸 제외하고 관심없다.
이처럼 복수귀가 나치 독일의 숨통을 서서히 옥죄고 있지만, 문제는 소련뿐만이 아니라 다른 연합국마저 다가오고 있다.
['기사' 패튼의 활약으로 시칠리아의 점령한 연합군.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의 도움으로 도망쳤다.]
[몽고메리의 욕심으로 분열이 일어날 뻔한 연합군.]
[끝까지 나치 독일의 발목을 붙잡는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추축국이 맞는가?]
북아프리카 전선을 정리한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를 침공한 것이다. 이 전투로 지중해의 제해권이 완전히 넘어갔다.
다만 작전이 부드럽게 진행되지 않았는데, 몽고메리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인해 미국과 갈등이 발생했다.
성질머리가 포악한 패튼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건 당연한 수순. 다행히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다.
이렇듯 북아프리카 전선이 사라지고 이탈리아 전선이 새롭게 생겼을 때쯤, 태평양 전쟁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을 하면, 미군이 쓸어버리는 전개가 끝이다.]
딱 저거다. 저런 전개가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가끔 가다가 해전이 발생하고 있지만 별거 없다.
마음 같아서는 전설의 '임팔 작전'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아직 조금 남아있다. 이걸 보여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금 기대된다.
'슬슬 하이라이트에 접어들고 있네.'
조만간 이탈리아가 패배해 연합군으로 전향할 것이고, 카이로 회담에서는 대한민국의 독립이 언급될 것이다.
이후의 테헤란 회담에서도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그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나치 독일의 목숨을 끊어버릴 바그라티온 작전까지.
또한 여기에는 미 대통령 암살 미수까지 포함돼 있다. 거짓말 같지만 진실이며 심지어 같은 팀에게 당할 뻔했다.
이것도 상당히 골 때리는 일화인 것이, 어뢰가 장착돼 있는 줄도 모르고 훈련용으로 쐈다가 발사된 거라고.
한 술 더 떠서 루즈벨트는 어뢰를 지켜보고 싶다고 갑판에 데려달라 했단다. 4선 괴물다운 깡이다.
아무튼 피와 강철도 몇 번의 크고 작은 전투만 거친다면 완결이 날 것이다. 그중에 백미는 원자폭탄 투하겠지.
또한 조만간 신들의 과거를 직접 들을 날이 머지않았다. 이건 루미너스와 모라가 본인의 신성까지 걸려 제안한 것이다.
'그전에 떡밥 겸 TRPG 배경도 만들 겸 신작을 써야지.'
신들의 과거를 배경으로 둔 소설이 아닌, 멸망 직전의 세상을 배경으로 소설을 쓸 예정이다.
여기에 루미너스가 절멸시켰다던 종족 및 인종들이 대거 출현할 예정이다. 사람들은 이를 보며 의문을 지닐 테고.
아닌 말로 엘프, 마족, 수인, 드워프, 인간밖에 없는 세상에 리자드맨이나 용족이 등장한다고 치자. 분명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무턱대고 신의 과거를 밝히겠습니다! 라고 선언하면 아무리 나라도 이상하게 쳐다보겠지. 말 그대로 빌드업인 셈이다.
휴식? 그딴 건 나에게 있을 수 없다. 악마 숭배자가 언제 습격할지도 모르는데 열심히 글이나 써야지.
"공모전은 잘 진행되고 있어요?"
"예. 참가자만 해도 벌써 100명이 훌쩍 넘었습니다. 어떤 작품이 등장할지 정말 기대가 되네요."
그래도 가끔 가다가 즐길거리는 있어야겠지. 나는 싱글벙글 웃는 머스크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맨 처음에 말했다시피 공모전을 개최할 예정이며, 머스크와 협업을 할 계획이다.
어째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공모전을 개최하느냐 물을 수도 있는데, 아예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다.
강의에서 가르쳤던 것처럼 글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다. 제논 일대기와 피와 강철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여태까지 쉽고 간결한 글을 쓸 수 있는데도 저 두 작품 때문에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체리는 그나마 비밀리에 만날 수 있어서 가능했던 거지, 다른 사람들은 교단의 눈치를 보느라 꽁꽁 숨을 수밖에 없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자기가 쓴 내용을 뺏었다고 난리를 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런 경우를 대비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혹시 상품은 정했습니까?"
"상품보다는 신문에 기재하는 편이 훨씬 좋을 걸요? 책이 더 많이 판매되기 위해서는 이름을 알려야 되니까요."
꾸준히 강조했듯이 예술가는 돈보다 명예가 더 중요한 직업이다. 명예가 높다면 돈은 알아서 굴러들어오거든.
가끔 가다가 명예가 밥 먹여주냐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정말로 밥 먹여준다.
이름값 하나로도 돈이 굴러들어오는데 욕할 수가 없다.
"따로 선별할 사람들도 구했어요?"
"물론이죠. 제논 일대기와 피와 강철에 호의적이었던 작가들을 포섭했습니다. 충실히 이행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머스크 님에게 맡기도록 할게요."
물론 말은 저렇게 한 거지, 사실 나에게도 속셈이 있다.
'나도 다른 글 보고 싶어.'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되고 싶다. 체리의 글로 어떻게든 버텼지만 그녀도 신작을 구상 중이라 작품이 안 나온다.
지금이라도 막혔던 혈로를 뚫어야지, 아니면 평생동안 비슷한 글이 안 나올 수도 있다.
이에 머스크를 내보내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기다렸던 공모전이 개최됐다.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기사]
"······어?"
그리고 소재를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