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7 - 강의(4)
자유가 우선이냐 질서가 우선이냐. 비루스 교수의 질문은 여러모로 철학적인 부분이 많다.
딱 잘라 대답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게다가 나는 두 가지 모두 경험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사실상 방관에 가까울 정도로 지켜보는 세상과 새장에 가두어 안전하게 지켜보는 세상.
서로 뚜렷한 장단점이 있는데다가 그 장단점이 워낙 큰 나머지 무어라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그 전에 비루스 교수님의 의견부터 묻고 싶네요.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원래는 자유 쪽에 무게를 두었지만 최근에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피와 강철을 읽고 난 이후에 말이죠."
"나치 같은 자들이 등장할까봐 우려하는 거군요."
내 대답이 정확했는지 비루스 교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나치의 행보로 인해 사람들은 신들의 존재를 감사히 여기고 있다.
책 속의 이야기라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다. 여기에 내 명성과 더불어 생생한 현실감까지 더해지니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세이비어의 마족 학살 사건을 보듯이 루미너스가 직접 광신을 제지하지 않았던가.
물론 나치는 자유를 가장한 방임이다. 최악의 경우를 보여준 셈이니 다짜고짜 질서를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죠. 아이작 교수께서도 그런 의미를 담아 피와 강철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전 그냥 지구의 역사를 통째로 날먹한건데요. 세상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으나 자유와 질서는 아니다.
제논 일대기와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이다. 가끔 가다가 내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물이 튀어나온다.
이에 나는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글쎄요. 나치 독일이 최악의 형태이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독일은 질서가 통제 수준으로 강력한 나라이지 않습니까?"
"예."
"이를 본다면 자유와 질서를 분립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달라도 결국 동전인 것처럼 말이죠."
자유와 질서는 동전 같은 존재다. 서로 상극처럼 달라보이지만 결국 같은 존재라는 것.
사람들은 '권리'만 요구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이지, '책임'까지 진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간다.
반대로 책임을 지라고 할 때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주지 않는다면 정말 싫어한다. 돌고 돌아 같은 이야기다.
"물론 이 곳처럼 질서가 더 강한 세상이 있고, 피와 강철처럼 자유가 더 강한 세상이 있을 수도 있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둘 다 고유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다. 비루스 교수도 마찬가지.
두 세상을 모두 겪어본 경험자로서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저들은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걸 전혀 모른다.
혹여 누군가 눈치챌 수도 있으니 최대한 애둘러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적절한 '표본'이 하나 있었다.
"피와 강철 같은 세상은 신의 존재가 불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인류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죠. 하지만 제지할 존재가 없는만큼 인류는 본인들이 스스로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잘못을 저지를 겁니다. 나치 독일, 그리고 홀로코스트가 그 예죠."
"정말로 인류가 그런 끔찍한 행위를 저지를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결국 판타지잖아요."
어느 한 남학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묻는다. 하기야 그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
나야, 지구에서 살았던 몸인만큼 확신할 수 있지만 그는 아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이비어에서 마족을 학살했던 예시를 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2000년 넘게 된 역사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문명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했고요. 300년 전 종족 전쟁에서 수인들이 학살당했다지만 그건 신들께서 직접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꽤 당돌한 학생이다. 확실히 세이비어의 마족 학살 사건은 악마 전쟁 직후 일어난 사건이다.
시간상으로 2000년이 훨씬 넘는 기록이며, 지구로 따지자면 기원전에 있던 일을 언급한 셈이다.
1000년 단위로 사는 엘프와 마족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다른 종족들 입장에서는 '또?'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럼 악마 숭배자는 뭘까요?"
그래서 곧바로 필살기를 사용했다. 신의 눈에서 벗어나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악마 숭배자들.
남학생은 악마 숭배자를 언급하자마자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 악마 숭배자가 그만큼 존재감이 굉장하다.
"악마 숭배자는 신들의 눈을 피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닙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들끼리 피와 강철 속 세상에서 살고 있는 셈이죠."
"··· ···"
"미리 말씀드리지만 인간이 아닌 인류의 광기는 신이 직접 제지해야 될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거예요."
나치 독일만큼 광기를 잘 표현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사람을 부품처럼 여기는 나라.
심지어 말도 안 되는 이상을 위해 사람 목숨을 가축처럼 막 다루고, 더 나아가 절멸수용소까지 만들었다.
인류의 상상력은 무한하고 그 상상력이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거지만, 가끔씩 심할 정도로 탈선하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가 살짝 엇나갔네요. 아무튼 자유와 질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공존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결코 무게를 둘 수 없죠."
"··· ···"
"대답이 됐나요, 비루스 교수님?"
"명쾌한 대답이었습니다. 아이작 교수."
비루스 교수는 그리 말하며 장하다는 듯이 박수를 쳐줬다. 그의 박수를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도 따라 박수를 쳐줬다.
뭔가 인정을 받는 기분이라 괜스레 부끄러워진다. 사실 이것도 전생의 기억을 빌린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강의실이 조용해질까지 기다렸다.
콩닥거렸던 가슴이 약간이나마 진정되는 느낌이다.
"자. 질문도 끝났으니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조금 늦게 끝날 것 같은데 혹시 바쁘신 분 있으신가요?"
아무도 손을 안 들더라. 만약 바쁘다하면 빼줄 생각인데 다들 듣고 싶은 모양이다.
게다가 마지막 날인만큼 학생 한 명 한 명마다 개인 질문을 받을 예정이다. 방금 전 같은 토론적 질문은 제외하고.
그렇게 일주일동안 짧고도 긴 강의가 끝나가려던 찰나, 나는 사람들을 한 번씩 둘러보다가 강조하듯이 말했다.
"자신의 이론을 당당하게 밝히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이론이 헛소리라면 그것이 헛소리라는 걸 증명할 테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작은 부스러기조차 황금에 준하는 가치를 가질 겁니다. 그리고 그 증명에 다시 반박하고, 또 반박한다면 세상이 좀 더 발전할 테죠."
작문법을 지나치게 어렵게 만든 나머지 과학 혁명조차 제대로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다.
본래 어떤 한 이론이 책으로 나온다면 기술자가 그걸 읽으면서 상호작용이 되어야 하는데, 여기는 그런 게 부족하다.
그나마 다행히 문맹이 거의 없었다는 거지만 책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는 그게 조금 안타까웠다.
"혹여 익명성을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조만간 재단을 세울 예정이거든요."
"재단? 무슨 재단입니까?"
"신분 및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각자의 연구를 할 수 있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전에 말했듯이 모든 마법사는 학자지만 학자는 마법사가 아니다. 여기서 일종의 차별이 발생하고 있다.
안 그래도 마법사가 훨씬 유리한데 학자를 따로 끼워주지 않는다는 것. 해리포터에서 마법사가 머글을 무시하는 거랑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알븐하임 성지에 입성하는 학자들도 대부분 마법사다. 언밸러스한 발전의 원인이 이것 때문일수도 있다.
'겸사겸사 돈이 없어서 아카데미에 못 들어가는 학생들도 도와주고. 영지 홍보도 하고.'
좋은 게 좋은 거지. 어차피 지금 썩어넘쳐나는 게 돈이다.
얼마나 많냐면 이걸 한꺼번에 뿌리는 순간 제국에 인플레이션이 올 거라나 뭐라나.
어차피 돈을 쓸 곳이라 해봤자 마땅히 없으니 재단을 세워 이름값을 높일 예정이다.
"제 강의는 여기서 끝입니다. 부족한 강의를 들어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일주일에 달했던 강의가 드디어 끝났다. 나는 힘찬 박수 소리를 들으며 안도를 느꼈다.
이제 저택에서 마리와 탱자탱자 놀거나 축구 심판이나 봐야겠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아까 말했던대로 질문 타임을 해야겠지.
"마지막 날이니 한 명씩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바쁘신 분은 지금 나가셔도 괜찮습니다."
당연하게도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나에게 질문을 하고 싶어서 안달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더 늦게 끝날 듯하다. 나는 가장 먼저 왼쪽 끝 라인에 앉아있는 학생부터 시작했다.
진한 갈색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여학생이었는데, 동글동글한 눈동자와 청초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혹시 첩을 들일 생각은 없으신가요?"
"··· ···"
첫 질문부터 굉장한 게 튀어나오네. 나는 살짝 당황했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장은 없습니다. 바쁜 일이 워낙 많아서요. 죄송합니다. 다음 분?"
"무솔리니는 언제 활약하나요?"
"··· ···"
질문이 하나 같이 왜 이럴까. 심지어 무솔리니는 곧 있으면 주유소에 매달릴 예정인데.
그것도 자신의 애인과 사이좋게. 나는 떨떠름해져 조용히 되물었다.
"······스포일러라 쉬이 대답하기 어렵네요. 혹시 무솔리니나 이탈리아 팬이신가요?"
"아뇨. 제 이름이 무솔리니입니다."
"··· ···"
"가끔 가다 애들이 놀립니다. 히틀러보다 못한 놈이라면서."
얼굴을 반드시 기억해야겠다.
나중에 고소 당해도 할 말이 없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