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6 - 강의(3)
소설계에서 아주 유명한 밈이 있다. 다들 말하는 빛길 엔딩이다.
빛길 엔딩의 계보를 잇는 것이 '여름이었다'라는 문장이며, 대부분 아시발꿈으로 귀결된다.
사실 꿈 엔딩은 어디에서나 자주 쓰이는 클리셰지만, 앞뒤 잘라먹고 사용하면 욕을 얻어먹기 쉽다.
충분한 개연성을 갖춰야 되지만 설령 개연성을 갖춰도 욕을 얻어먹는 편이다. 여태까지의 행보가 전부 의미 없는 일이라는 뜻이니.
하지만 빛길 엔딩은 차원이 다른 엔딩을 보여줬다. 중간중간 복선을 챙기면서도 마지막에 거대한 메테오를 떨어뜨렸다.
나도 그 엔딩을 보고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모른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여름이었다가 아시발꿈의 계보를 잇고 있지만, 그 엔딩만큼 두고두고 회자되지는 않을 것이다.
"콜록! 콜록!"
"괜찮아? 여기 손수건."
너무 놀라 사레가 들린 나머지 기침을 토하자 아델리아가 옆에서 손수건을 건네줬다.
나는 그녀로부터 손수건을 받아 입을 주위를 황급히 닦았다. 등까지 두드려줘서 그나마 빨리 해결됐다.
이후로 자잘한 기침을 하면서 체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뭐가 문제인 건지 몰라 눈을 느릿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지난번 여름이었다 사건도 그렇고 이번 신작 제목도 그렇고. 알고 저러는 건지 아니면 진짜 우연인지 헷갈린다.
'······우연이겠지.'
그래도 불길함의 상징 중 하나였던만큼 우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기침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용을 약간만 알려주면 안되겠니? 제목만 들으니 감이 안 잡혀서."
"음······"
체리도 별 의심없이 넘어가는 듯했다. 그녀는 내 질문을 듣고 고개를 살짝 내렸다.
눈을 느릿느릿하게 깜빡이는 버릇을 보았을 때 고민의 시간을 거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손수건으로 미처 닦지 못한 부분을 정리했다. 체리 얼굴에 분사하지 않아 다행이다.
"······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가 세상을 구하고 부흥시키는 이야기?"
짧은 고민 끝에 체리의 입에서 전반적인 내용을 알려줬다. 나는 그 내용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클리셰로 지정될만큼 흔한 설정이었으나 저 내용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다.
"그거 제논 일대기 아니야?"
때마침 아델리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줘도 십중팔구 제논 일대기라 답할 것이다.
지구였다면 너무 많은 나머지 쉽게 대답할 수 없을 질문. 하지만 이 세상은 제논 일대기로 통일할 수 있다.
"아뇨······ 제논 일대기 같은 소설은 아니에요······ 그냥······ 그런 게 있어요······ 네······"
체리는 마땅히 설명할 게 없는지 어물쩍 넘어갔다. 말투 자체는 어두워도 할 말은 다 하는 그녀다.
지금처럼 뭔가를 숨기는 경우는 더 없었기에 의아해졌다. 대체 무슨 소설을 쓰길래.
"이번 작품의 주인공도 여자니?"
"아뇨······ 남자에요······"
"로맨스?"
"음······ 로맨스도 있을 거예요······"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결국 꼬치꼬치 캐묻는 건 그만뒀다.
하지만 우려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참견일수도 있으나 한 번쯤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계속 물어봐서 미안해.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났거든."
"안 좋은 기억이요······?"
"응. 어떤 거냐면······"
나는 납득이 될법한 거짓말을 지어냈다. 어렸을 적에 한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데, 행복했던 일상이 모두 꿈이었다는 내용.
여름이었다 당시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약간 다르다. 거짓과 진실이 반반씩 섞여있다.
체리 입장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이야기지만, 내 전생을 알고 있는 아델리아는 또다른 반응을 보였다.
뭐 그딴 악마 같은 내용이 다 있냐는, 듣고도 못 믿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와······ 나로 치면 이때까지 겪은 행복들이 다 꿈이고 눈을 떠보니 테르스 왕국이라는 거야? 다시 돌아가기 싫은 그곳에서?"
"그것보다 심하지. 빈민가에서 비참하게 지내다가 악마 숭배자에게 제물로 넘겨지는 수준?"
"으으······"
상상만 해도 끔찍했는지 아델리아가 진저리를 쳤다. 그녀도 체리 못지 않게 불우한 과거를 겪었으니 더 실감날 것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만약 이 모든 행복들이 꿈이고 지구의 김유환으로 돌아간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자살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구멍이 난 마음인데 더 크게 날 테니까.
각기 다른 입장이지만 공통된 생각 속에서, 체리는 눈을 두어번 깜빡이더니 조용히 반응했다.
"우와······"
탄성을 지르는 것으로. 그녀도 불우한 가정 환경을 가지고 있으니 공감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공감이라기보다는 감탄에 가까운 반응을 보여서 살짝 당황스러웠다.
"평생 꿈을 꾸고 싶겠네요. 당사자 입장에서는."
"으, 응? 그렇······ 겠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테니까."
"으음······"
체리는 내 말을 듣고 영감이라도 떠올랐는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이럴 때는 최대한 조용하고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다. 괜히 건드렸다가 집중이 끊기기라도 한다면 짜증이 솟구칠 테니.
그 후로 몇 분 정도 지났을까. 체리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특유의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그런 책도 써야겠네요······ 저번에 들었을 때는 쉬이 지나쳤는데 다시 들으니 뭔가 잡힐 것 같아요······"
"다행이네."
"혹시 선배님께서 쓰실 건가요······?"
"아니. 체리가 써."
딱 잘라 답했다. 꿈과 관련된 소재는 꽤 어려운 난이도에 속한다.
더군다나 나는 앞으로 쓸 책이 많다. 피와 강철을 마무리해야 되는데다가 신화 관련 소재도 남아있다.
여기서 더 늘렸다가는 감당하기 힘들고 시간도 부족하다. 언제까지고 통조림 속에 갇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감사합니다······ 때마침 좋은 소재가 떠올라서······"
"노파심에 말하지만 내가 말한 엔딩은 최대한 피해줘. 인지도는 얻을 수 있어도 귀찮은 일이 많아질 거거든."
"그런 엔딩은 저도 싫어요······ 저는 언제나 해피 엔딩을 추구하는 걸요······"
여름이었다의 여파 때문에 그렇지, 실제로 체리의 처녀작은 해피 엔딩으로 귀결됐다.
최근에 발매한 외전도 주인공들의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 및 육아 일기다. 반응도 상당히 좋았다.
단지 육아 부분에서는 몇몇 지적을 받았는데 이건 어쩔 수 없다. 그녀가 아이를 키워봤어야 알지.
그 때문인지 사람들은 체리의 나이를 얼추 많아봐야 10대 후반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아리엘을 모티브로 삼은 것 같긴 하던데.'
장난꾸러기 같은 부분은 누가 봐도 아리엘이었다. 중간중간 천사처럼 귀엽다는 묘사도 있었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체리는 수첩을 꺼내며 이것저것 쓰기 시작했다.
설정은 잊을 수도 있으니 반드시 기록하라는, 내 조언에 충실히 따르는 모습이었다.
"이거면 되겠다······ 정말 제가 써도 되는 거 맞죠······?"
"난 따로 써야하는 게 있거든. 그건 언제 쓸 거야?"
"아마 시간이 나는 대로 쓸 거 같아요······ 아까 말한 신작은 사정이 있어서 조금씩 쓰고 있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듯했다.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묻는데다가 체리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
"알았어. 그러고 보니 체리도 이제 슬슬 3학년이지? 전공은 어디로 갈 거야?"
"인문학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리 말하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체리. 나는 탁한 분홍빛을 띄는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아무래도 교수가 된 내 밑으로 들어오고 싶은 모양이다. 그걸 보며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식으로 교수가 된다면 신청해. 받아줄게."
"정말요······?"
"응. 정말로."
"와아······"
고저없는 목소리는 그대로였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기쁨'이었다. 실제로 입이 살짝 벌어진 걸 보면 알 수 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녀인지라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체리 정도면 학부생이 아니라 조교로 와도 충분하지 않나?'
겸사겸사 조교로 온다면 연구실에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물론 나와 달리 그녀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지라 차차 생각해볼 문제다.
"옆에 같이 있으면서······ 히히."
"··· ···"
행복한 거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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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의 만남 이후로도 내 강의는 이어졌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이라지만 강의를 할 때마다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온갖 질문거리가 날아오는 건 기본이요, 가끔 가다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도 간간이 섞여있다.
다행히 전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질문들이어서 대답은 수월했다.
가장 큰 예를 들자면 언어의 '통제'와 관련된 사안이었다.
"언어는 신이 필멸자들에게 선물해주신 축복이오. 그런 축복을 마구잡이로 난립시키면 신을 향한 모독이 아니겠소?"
평소 나에게 안 좋은 시선을 보내던 사람의 질문이다. 리나에게 들은 바로는 꽤 명망이 깊던 작가였다고.
하지만 이 세상의 작가가 그렇듯이 철학도 뭣도 아닌 문제집을 제출하고 있었기에 썩 좋지 않다. 지금은 거의 묻혔고.
어떻게 해서 강의에 참석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감하게 밝혔다.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네. 언어가 진정으로 그 가치를 잃을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유롭게 난립할 때? 아닙니다. 바로 '통제'를 당할 때죠."
언어는 그 민족의 문화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괜히 언어가 곧 민족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문화적으로 침탈하기 가장 쉬운 방법 또한 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의사소통은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그 부분을 차단시킨다면 점령이 쉬워지는 법이니.
동시에 극도로 어렵다. 대한민국의 일제강점기 시절조차 창씨개명을 했을지언정 언어는 완벽히 통제하지 못했다.
"언어는 절대 통제해서는 안 됩니다. 씨를 뿌리고 그 씨에서 식물이 자라나듯이, 신들은 우리에게 축복이라는 씨앗을 뿌린 겁니다. 식물이 자라지 못하도록 통제하는데 과연 신들이 좋아할까요?"
"··· ···"
"자유의 반대는 질서가 아니라 통제입니다. 착각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가르침 아닌 가르침 이후에 나에게 언어와 관련된 딴지를 거는 사람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덕분에 강의가 좀 더 편해졌지만······ 여기에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아이작 교수. 실례지만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어······ 무슨 부탁이죠? 비루스 교수님."
신입생 시절부터 나를 눈여겨 보던 인문학 교수, 비루스 교수가 나에게 부탁을 건넸다.
강의가 막 끝나려던 찰나에 부탁을 건넨 거라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질문이니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단지 방금 교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서요."
진짜배기 전문가(고인물)에게 질문을 받으니 절로 긴장된다. 여태까지 흥미롭게 지켜보시던 분이 갑자기 왜 질문을 하시는 거지.
내가 속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을 때쯤, 비루스 교수는 인문학 교수다운 질문을 나에게 건넸다.
"교수께서는 질서와 자유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까?"
"음······ 이건 다음 시간에 대답하겠습니다. 대답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요."
다행히 시간을 핑계로 어찌저찌 생명 연장은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비루스 교수에게 질문을 받으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리하여 다음 날.
"어제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만. 아이작 교수."
내 밑천을 드러낼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