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606)화 (607/763)

Chapter 605 - 스탈린그라드(1)

모라의 조언 아닌 조언 이후로도 세상은 질량-에너지 동등성으로 열띤 토론을 나누었다.

마나 때문에 불가능하다니, 마나를 제외하면 가능하다는 등등. 아무래도 입증할 방법이 없어 이론만 난무하고 있다.

대신 마나가 있어도 성립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데, 엘프의 금지된 마법 합일을 증거로 내세우는 중이다.

문제는 합일조차 이론만 무성한지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아르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

핵폭탄은 방사능도 방사능지만 위력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종말로 이끌기에 내가 도움을 줬다.

[허면 그대가 책을 다 쓸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것이냐?]

수정구 너머로 아르웬의 미성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약간의 피로가 묻어있는 듯했다.

괜히 나 때문에 골치 아픈 상황과 직면하게 된 그녀에게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응. 이론을 연구하는 건 괜찮지만 실험만큼은 막아줬으면 해. 제논 일대기에 그 위력이 나왔잖아?"

[······진짜로 그런 위력이 나온다고? 세계수를 완전히 소멸시킬 정도로?]

아르웬이 당황과 떨떠름함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의 반문에 의아해진 건 도리어 나다.

합일이 금지된 마법이라는 건 과거, 원로원의 수장이었던 피렌을 통해서다.

그 전까지 아르웬도 합일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으며, 이후로 이론만 살펴봤다고 들었다.

"안 믿고 있었어? 난 믿을 줄 알았는데."

[합일이 금지된 마법으로 지정된 이유가 비윤리적이어서 아니었느냐? 정말로 그런 위력이 나온다고?]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지구에는 세상을 멸망시킬 무기가 수천 개 넘게 있다는 것까지 알려줘야 되나.

지난번 리나에게 말해줬을 때는 차를 아주 시원하게 분사했다. 황녀의 체통조차 뛰어넘을 정도로 경악한 것이다.

만약 합일이 일종의 핵분열을 일으키는 거라면 핵폭탄에 버금가는 위력이 나올 것이다. 세계수는 가뿐히 소멸시키겠지.

"설명하자면 긴데, 우리 세상에도 합일의 원리를 따라 만든 무기가 있어. 그 무기의 파괴력으로만 따지자면 세계수도 사라질 거야. 이건 장담할 수 있어."

[못 믿겠지만······ 일단 알겠다. 이론은 허락하되 실험은 금지하는 걸로 해야겠구나. 하아······]

아르웬이 긴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더 복잡한 일인 듯했다.

원래라면 나에게 선물을 줬을 테지만 그건 뒷일로 미루어진 상황.

나는 미안한 마음에 위로가 되게끔 조용히 말했다.

"시간이 남는다면 언제든지 우리 저택에 놀러와도 돼. 난 항상 여기에 있으니까."

[본심을 말해도 되겠느냐?]

"물론이지."

이후로 온갖 투정과 음담패설이 흘러나왔다. 고된 정무로 인해 스트레스가 꽤 쌓인 모양이다.

나는 그걸 하나하나 들어주면서 주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혹여 다른 사람이 듣기라도 할까봐.

다행히 마리는 침대에서 꿀잠을 자는 중이고, 아리엘은 바깥에 나가서 친구와 놀기 바빴다.

이외의 여인들은 아카데미를 재학 중이다. 아마 지금쯤 열심히 공부하고 있겠지.

[서둘러 정리하고 그대에게 가도록 하마. 한시라도 그대를 보고 싶구나.]

"나도. 괜히 이상한 일을 벌여서 미안해."

[괜찮다. 오히려 더 좋지 않느냐? 그대 덕분에 학문이 크게 상승했으니. 어쩌면 그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헬리움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고.]

질량-에너지 동등성은 물리학도 물리학이지만 화학의 힘도 필요하다. 원자인가 뭔가를 먼저 발견해야 된다.

그리고 헬리움은 화학이 아니더라도 연금술이 크게 발달된 나라. 엘프조차 한 수 접을 정도로 극히 뛰어나다.

아르웬의 말은 최초로 엘프와 마족이 서로 협동하여 이론을 입증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상이 한층 더 발전되겠지.

[내 투정을 들어줘서 정말 미안하구나.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하면 안 되는데······]

"감정이 아니라 욕구 쓰레기통도 되는데?"

[······정말 짓궂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웃어주는 아르웬이다. 나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마.]

"응. 기다리고 있을게."

아르웬과의 통화는 이런 식으로 끝났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통신용 수정 구슬의 빛이 조용히 꺼졌다.

원래라면 마법사 한 명을 대동해야 통신이 가능하지만, 세실리와 아르웬의 마개조 끝에 마나만 주입하는 것으로 끝났다.

통신의 지대한 발전을 이끈 셈이지만 어디까지나 개조에 지나지 않았기에 효율이 극도로 나쁘다. 마나를 엄청 잡아먹는다는 뜻이다.

나야, 신성이 가득한 몸인지라 마나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모라의 말도 허투가 아니었는지 마나를 소모해도 물만 마셔도 채워졌다.

'마나가 파란색인 거랑 물이 파란색인 거랑 관련이 있나?'

잠깐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나는 내 할 일로 돌아왔다.

지금은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시간인지라 누구에게도 방해받을 일도 없다.

대신 마리가 잠에 들었으니 조용히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책 페이지를 넘기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북아프리카 전선도 연합군 측으로 기울어졌고, 슬슬 그 전투가 나와야겠네.'

룸멜의 똥꼬쇼로도 어찌할 수 없었던 북아프리카 전선. 이제 다시 붉은 군대로 돌아올 차례다.

미군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정비 겸 자잘한 전투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현세의 지옥이라고도 칭해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2차 세계 대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들은 전투일 것이다.

만약 2차 세계 대전이 배경인 FPS 게임? 그러면 무조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등장했다.

그만큼 치열했으며 이후로 전쟁의 판도는 소련 쪽으로 넘어갔다.

물론 나치 독일도 만만치 않은지라 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다시금 팽팽해졌다.

하지만 그전까지 방어하기에 급급했던 소련이 공격까지 나서게 되서 대부분 기점으로 삼는 편이다.

'최대한 지옥처럼 묘사했긴 했는데······'

아까 말했듯이 현세에 펼쳐진 지옥이라 칭해질만큼 끔찍한 전투다. 일단 6개월간 지속된 시가전인 것부터 말 다했다.

시가전은 도심부 내에서 싸워야 하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군인과 민간인 구별할 것없이 전투에만 집중한다.

사실 시가전 자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던 거지만, 스탈린그라드가 '도시'였던 게 변수였다.

'현대의 시가전이 곧 공성전이라는 말도 있으니.'

공성전은 성을 뚫느냐 마느냐의 싸움이다. 그 후로 시가전에 돌입하는 것이고.

그러나 스탈린그라드는 시가전과 공성전이 둘 다 합쳐져 있는 형태다. 건물을 일일이 다 파괴시키지 않는 이상 항복을 얻어낼 수 없다.

게다가 아파트 같은 건축물은 정말 튼튼해서 어지간한 폭격 및 포격으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보병이 직접 나서야 된다는 것이다.

'나치 독일의 최대 장점인 기갑전력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극한의 소모전만 치렀지.'

서로가 지칠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나치 독일군은 어떻게든 뚫기 위해 기를 썼고, 소련군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방어했다.

또한 하루 생존 시간이 24시간이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실제로 1분마다 병사 몇 명이 죽어나갔으니.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할 수도 없었는데, 지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소련에게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스탈린의 입장일 뿐, 히틀러는 달랐다. 그놈의 똥고집이 발동된 것이다.

'자존심 싸움이 참 무섭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한 이유가 히틀러의 아집 때문이었는데 스탈린그라드에서도 그 아집을 또다시 드러냈다.

결국 보급 문제와 동장군의 도래, 마지막으로 소련의 반격으로 나치 독일은 완벽하게 패배한다.

심지어 패배할 때 히틀러는 장군을 원수로 진급시켰는데, 나치 독일의 원수는 항복한 적이 없다는 전통이 있었다.

다시 말해 항복할 바에야 자결하라는 의미로 진급시킨 것이다. 당연히 빡친 장군은 시원하게 '좆까' 한 마디 하고 항복했지만.

'실제로는 보헤미아의 상병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 했지?'

아무튼 스탈린그라드는 시가전의 정의를 새롭게 쓴 전투이자 6개월 간 지옥이 강림한 전투다.

북아프리카와 태평양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는 동안 나치 독일과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하나만 집중했다.

'당분간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만 보여주겠네. 재미없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과 광기만이 가득한 전투를 보여줄 예정이다. 꽤 오랫동안 진행되겠지.

이 점 때문에 조금 불안해졌으나 붉은 군대는 거인과 달리 사람이 파리마냥 죽어나가는 게 특징이다.

애당초 컨셉 자체를 그런 식으로 잡아놓았으니 부진하면 어쩔 수 없는 거라며 넘어갈 수밖에 없다.

나는 원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가 조용히 우편물 안에 넣었다. 이제 출판사로 넘기면 된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북부 지역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비슷했던가?'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 잘 모르겠다.

더구나 잔학성 하나만 봤을 때 그런 거지, 북부는 시가전도 아니었다.

허나 죽고 죽이는 것밖에 없던 상황 자체는 똑같았으니 괜스레 PTSD를 유발시킬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누가 봐도 강인한 분이시지만, 과거의 트라우마가 나 못지 않게 심하신 분이었으니.

신전을 꾸준히 방문하고, 가정에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단련했다지만 마음의 흉터는 절대 아물지 않는다.

'······혹시 모르니 아버지에게만큼은 말씀드리자.'

보여드리는 게 아니라 말씀드리는 거다. 글로도 상황을 보여주는 건 충분하다.

이에 마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난 후, 아버지가 계시는 집무실로 향했다.

뒤이어 기나긴 복도를 지나간 후, 아버지의 집무실이 있는 문 앞에 도착했다.

[아이. 이 사람도 참. 대낮부터 이러기에요? 누가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어떡하려고.]

노크를 하려던 찰나 내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나는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본래 집무실은 방음이 되지만 몸이 바뀌고 난 후에는 다 들린다. 정말 어지간히 작은 소리가 아닌 이상 다 들린다.

동물의 마음까지 다 들리긴 하지만 이건 넘어가자. 지금은 집무실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어차피 다들 바빠서 아무도 안 올 텐데 괜찮잖아? 당신만 보면 참을 수가 있어야지.]

[이러다가 다섯째까지 생기면 어쩌려고요? 우리도 나이를 생각해야죠.]

[그래서 싫다는 거야?]

[설마요. 이리 오세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대화 소리다. 시간이 지나도 두 분의 열기는 꺼지기는커녕 더 타오르는 것 같다.

나는 노크를 하려던 팔을 조용히 내리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두 분이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데 방해할 수는 없지.

'그냥 바로 내도 되겠다.'

아버지에게는 어머니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약은 드시겠지?'

족보가 또 꼬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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