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1 - 석유(1)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다. 자원이 깡패다.
실제로 자원이 없다면 그 나라는 멀쩡히 굴러가지 않는다. 간단한 농기구조차 철이 필요한데 철이 없다면 농사를 못 지으니까.
러시아와 유럽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이유도 러시아의 막대한 자원 때문이다. 다만 대부분의 주도권은 자원이 넘쳐나는 러시아에게 있다.
진주만 공습, 그러니까 일본이 미국에게 선제 공격을 가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석유 때문이다. 미친 짓거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선제 공격.
당시 일본의 입장은 이지선다에 걸린 셈인데,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석유를 얻느냐 아니면 체제를 포기하느냐의 싸움이다.
석유를 얻으려니 미국의 말을 들어야 하고,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중국 침략은 물론 군국주의 체제마저 포기해야 될 상황이다.
만약 '정상적인' 나라라면 체제를 포기할 테지만 그때의 일본은 상식과 거리가 먼 나라였다. 그것도 말이 안 나오는 수준으로.
그래서 바다를 건너서 미국을 공격했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 태평양도 끼여있으니 나름대로의 계산 하에 이루어졌다.
물론 미국이 분노한 걸 넘어 눈이 돌아간 나머지 추축국의 패망을 불렀다는 거지만.
아무튼 넘어가고, 상식과 거리가 먼 일본이라지만 그만큼 자원이 깡패다.
그리고 지구 문명의 알파이자 오메가, 석유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본의 아킬레스건이었던 석유. 석유는 정말로 미래의 자원이 될 것인가?]
[현재는 석탄이 대세지만 제논은 결코 허언을 할 인물이 아니다.]
일본이 석유 하나 때문에 미국을 친다는 무리수를 거두면서, 사람들은 석유에 지대한 관심을 보내기 시작했다.
사실 석유에 관심을 주는 건 내 입장에서 그리 이상한 건 아니다. 이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야 석유의 가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게 의외였다. 여태까지 석유의 중요성은 꾸준히 언급했으니.
나치 독일의 강력한 기갑 전력조차 석유가 없다면 운용하지 못하며 히틀러조차 한때 석유에 눈이 돌아갔다.
[어쩌면 제논은 한 국가가 비정상적인 일을 저지를 정도로 석유가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는 것일 수도 있다.]
[현재는 석탄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지만, 먼 미래에는 석유가 석탄을 밀어낼 수 있다.]
석유가 지구 문명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해서 석탄이 자리를 잃는 건 아니다.
그냥 에너지 소비가 미친듯이 올라가다 보니 석유고 석탄이고 가스고 뭐고 다 써야 된다.
이 세상은 마나라는 전기를 일찍 발견한 덕분에 에너지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
무엇보다 현재 석유 하나로 세상이 난리가 나고 있다는 게 요점이다.
[악마의 피라며 천대 받던 검은 물. 과연 이것이 미래의 자원으로 둔갑할 수 있을까?]
[현재 공식적으로 석유가 가장 많이 나는 지역은 헬리움의 서부와 남부. 헬리움의 공식 입장은 없어······]
[알븐하임조차 검은 물이 나오는 구역이 매우 적다.]
검은 물은 으레 지구가 그러했듯 계륵 취급을 받고 있다. 어딘가 쓸데는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유용한 자원은 아닌 물질.
보통 방수 작업이나 도로 포장에 사용되고, 불에 잘 타는 성질을 이용해 화공으로 이용되는 게 지금의 석유다.
이처럼 다른 건 몰라도 석유는 시대에 어울리는 사용 방법을 갖고 있었지만, 판타지는 언제나 내 예상을 깨뜨리는 법.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헬리움이 실로 놀라운 사실들을 연달아 밝혔다.
[검은 물은 하나로 분류하는 게 아니라 연금술을 통해 여러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그곳에 나오는 부산물을 통해 다양한 물품을 제작할 수 있다. 귀족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스타킹이 바로 그 예시.]
[이외에 등불로 사용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상하수도 건설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미 석유 정제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스타킹을 제작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을.
가끔 가다가 이 세상은 시대를 한참 앞선 물품들이 있었는데, 냉장고와 에어컨이 대표적인 예시다.
하지만 이것들은 기계에 가까웠으며 트레이닝복이나 스타킹 같은 의류품도 가끔씩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연금술사들이 만들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확인해보니 마족, 그것도 석유로 만든 것이다.
"이게 말이 돼? 우리 세상에서조차 100년도 안 지난 기술인데?"
아무리 판타지여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 세실리에게 물었다. 보통 세실리가 신문을 보고 나를 찾아오는 편인데 오늘은 반대다.
그녀는 내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본인 딴에는 너무 당연한 사실일 테니까.
"글쎄? 헬리움에서는 상용화된 지 몇 백년이 지나서······ 그리고 이건 대량 생산도 불가능해서 가격도 무시무시해. 스타킹 하나에 얼마인지 아니?"
알다마다. 스타킹은 트레이닝복과 함께 부유한 귀족의 상징으로 자리잡혀 있다.
특히 스타킹은 트레이닝복과 달리 올이 나가거나 자주 찢어지는 등. 돈 먹는 하마로 유명한 의류품이다.
한 짝에 무려 1골드 즉, 10만원이 넘는 게 대부분이다. 비싼 건 10골드가 넘는다고 들었으니 말 다했지.
오버 테크놀로지의 부산품인만큼 가격이 비싼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특유의 매력 덕분에 스타킹 없으면 못 사는 사람들이 많다.
"알기야 알지.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믿을 수 없다는 거야. 하다못해 냉장고도 마법을 이용하고 있는데 이거는? 이것도 마법을 이용한 거야?"
"마법과 연금술의 조합이라고 해야겠지? 너도 알다시피 헬리움은 땅만 팠다 하면 검은 물이 우수수 솟구쳐 나와. 정작 가장 필요한 건 식수인데 말이지."
지나가는 식으로 듣긴 들었다. 헬리움은 산유국, 그것도 어마어마한 석유가 매장된 나라라고.
어떻게든 살 곳을 찾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정착한 곳이 현재의 헬리움. 하지만 당시 헬리움은 지독하리만큼 혹독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기술도 발전하고 외교도 하고 있다지만 그전까지는 우물 안의 개구리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헬리움의 대표적인 음식 문화 중 하나가 '괴식'인 점을 보면 얼마나 척박했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난 쥐 대가리를 먹고나서 토할 뻔한 전적이 있다.
"다행히 식수가 나는 곳을 찾고나서는 검은 물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했어. 상하수도용에 쓰기도 하고, 등불로 쓰기도 하고, 무기에 쓰기도 하고. 그냥 많이 나오다 보니 어떻게든 쓰자는 생각으로 한 거야. 그것밖에 없어."
"연금술과 마법을 포함해서?"
"물론이지. 다른 건 몰라도 연금술은 알븐하임보다 수준이 높을 걸? 기초 학문이 부족하다지만 분석하고 분류하는 건 우리가 더 우위일 거야."
그리 말하면서 자부심이 드는지 가슴을 쭈욱 내미는 세실리. 나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 자체인 가슴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드워프가 공학에만 몰빵한 종족이라면, 마족은 화학에 몰빵한 종족인 것 같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면 드워프는 천성이 그런 거고, 마족은 마법 및 환경 덕분에 가능한 거겠지.
본래 석유를 분류시키는 작업은 근대에서나 가능한 기술인데 마족은 마법으로 해결해버렸다.
판타지답다면 실로 판타지다운 방식이다. 정작 그 석유를 에너지로 사용하지 못 했다는 게 유머다.
'그러고 보니 번개를 내려쳐서 지력을 회복시키는 방법도 마족이 먼저 했었지?'
워낙 가혹한 나머지 헬리움은 농사를 할 수 있는 곳마저 한정적이다. 그들의 대표적인 문화가 괴식인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어떻게든 농사를 지내야 하는데 모두 알다시피 농사는 '지력'이 다하면 최소 1년은 쉬어야 된다.
하지만 한 번 쉬는 순간 헬리움의 국민들은 쫄딱 굶을 수밖에 없다. 외교적으로도 고립돼 있으니 여러모로 곤란했겠지.
이런 상황에서 콩을 심었으며 더 나아가 아예 마법으로 번개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풍년을 거듭하여 버틴 거고.
'진짜 알다 가도 모를 나라네.'
마법이 없었다면 전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악마의 저주가 축복으로 바뀐 거나 다름없다.
"그런데 석유가 정말로 석탄처럼 에너지로 활용될 수 있는 거야?"
세실리의 가슴을 마음껏 감상하고 있을 때 그녀가 기대감을 품으며 나에게 물었다.
이에 나는 황급히 시선을 떼며 그녀와 마주했다.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다.
"응. 저번에도 말했잖아. 우리 세상은 석유 없이는 문명 자체가 멈춘다고. 기계공학만 발달된다면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어."
"기계공학이라······ 드워프의 도움이 필요하겠네. 석유만 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으니까."
"현명한 생각이야."
석유 하나만 믿고 설쳤다가는 베네수엘라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더군다나 세실리 본인도 알고 있다시피 헬리움은 기초 학문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
지금이야, 인재들을 곳곳의 아카데미 혹은 성지로 보내고 있다지만 아직 모자른 수준이다.
'마족 특유의 강력한 힘도 도움을 줄 거고.'
만약 마족이 엘프와 비견될 정도의 힘이 없었다면 훗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가 됐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국제 사회가 '힘'에 기반하여 흘러간다는 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조차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온갖 비난이란 비난은 다 받고 있음에도 자원 하나로 땡강을 부리고 있지 않는가.
"그럼 앞으로 헬리움의 위상이 높아지는 건 결정된 사안이겠네? 자원은 곧 무기라고 아빠한테 들었거든."
"그 말도 맞지만 방심해서는 안 될 걸? 미네르바 제국의 북부 지역도 석유가 나는 걸로 알거든."
네이비 기사단에서 전해지는 전설적 일화다. 심심해서 땅 파기 시합을 했더니 석유가 분수처럼 솟구쳤다는 일화.
하지만 북부 지대는 야만수인 문제가 겹치는 탓에 어찌 될 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형제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이건 걱정되지 않는다.
'리나가 해결해준다고 했으니.'
본격적으로 북부 지대를 점령한다면, 네이비 기사단이 아닌 정규군이 출동할 것이다.
여태까지 북부 지역을 네이비 기사단이 맡은 이유도 아버지의 활약도 있으나 교환비 때문이다.
네이비 기사단이 북부 지역을 맡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야만수인이 쉽게 활동할 수 없을 뿐더러 설령 습격해도 가뿐히 막을 테니까.
하물며 북부 지대는 미개척지대다. 개척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것이다.
"아이작."
"응?"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있을 때 세실리가 나를 불렀다. 그녀를 바라보니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이 시야에 포착됐다.
뒤이어 그녀는 내 손을 꼭 붙잡더니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며 유혹하듯이 물어봤다.
살덩이 속으로 푸욱 들어가는 내 손과 그 감촉 때문에 잠깐 이성이 날아갈 뻔했다.
"혹시 석유로 할 수 있는 거 없어?"
"할 수······ 있는 거?"
말랑말랑한 가슴의 감촉에 홀린 것도 잠시, 나는 그녀의 의중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석유로 할 수 있는 건 많다. 기술력의 한계로 지금 할 수 있는 게 적을 뿐.
"응. 우리 헬리움의 검은 물, 아니 석유 정제 기술이 너희 세상과 비슷하다며? 그럼 너희 세상에서 석유로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거 아냐?"
"음······"
"실패해도 상관없어. 시도할 가치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글쎄······ 석유 자체가 연료 정도로만 사용해서."
석유가 에너지 취급을 받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 에너지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류로 분류된다지만 대부분 에너지로 귀결되는 편이다.
이에 세실리가 약간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을 때, 나는 그나마 알고 있는 지식을 꺼냈다.
"에너지가 아닌 다른 게 있다면 도로 포장 정도?"
"도로 포장?"
"응. 연료로도 못 쓰는 끈쩍한 찌꺼기를 도로 포장에 쓰는 걸로 알아."
물론 이것조차 콘크리트 발명 이후로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이제 막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 도로 포장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메리트를 안고 있다.
텔레포트? 물류 이동을 위해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비용이 어마어마할 뿐더러 도중에 물건이 사라질 수도 있다.
애당초 그게 가능한 종족이 엘프와 마족 이 둘밖에 없고. 그러니 도로 포장 자체만으로도 국가의 위상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대충 알 것 같아. 그거 정말 어디에도 쓸데가 없어서 방수용으로나마 쓰고 있던 건데······ 도로 포장으로 쓸 수도 있구나."
그리 말하면서 나를 향해 달콤한 눈빛을 보내는 세실리. 나는 말없이 그녀의 접근을 허락했다.
이윽고 우리의 얼굴이 닿을 듯이 가까워졌을 때, 그녀는 내 어깨에 얼굴을 얹더니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고마워. 아이작. 원하는 거라도 있어?"
"······나보다는 누나가 더 원하는 거 같은데?"
"역시 잘 아네. 대신 오늘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예를 들자면······"
잠깐 말을 멈춘 그녀. 나는 서서히 손을 올려 세실리의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등이 훤히 파인 드레스여서 그녀의 살결이 전부 느껴졌다. 내가 오는 걸 알고 이런 걸 입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 손길을 느끼기라도 했을까. 그녀는 나를 천천히 감싸안더니 남자라면 결코 참을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스타킹을 찢게 해준다던가?"
정말 사람 못 참게 만드는 데에 재주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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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석유 파동이 일어났을 때쯤.
[석탄이 아닌 석유를 이용한 마력 기관? 개량하면 쉽다.]
난쟁이들이 또다시 이상한 걸 만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