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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577)화 (578/763)

Chapter 576 - 업보(3)

현재 히틀러는 스탈린과 맞먹는 '악당'이자 '악'의 대명사로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원래는 내가 교묘히 비틀어서 선역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결국 그도 전쟁을 추구하는 악당에 지나지 않았다.

이걸 깨달은 사람들은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르는 히틀러를 천하의 쌍놈으로 취급하면서도 열심히 응원했다.

뭔가 심히 아이러니한 상황이긴 하지만 피와 강철은 어디까지나 판타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치는 세상을 향해 마수를 뻗기 시작한 악이고, 그 악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는 자가 바로 히틀러다.

그나마 상대가 될 수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힘에 무너졌다.

이제는 그 마수가 소련을 향해 뻗어나가기 직전이었으나 이 타이밍에 딱 멈췄다.

덕분에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매력 즉, 악당으로서의 평가를 좀 더 끌어올릴 수 있었다.

영국의 처칠이나 프랑스의 샤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일본의 도조 히데키,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등등.

다른 지도자들도 충분한 매력과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히틀러에 비해서는 다소 존재감이 묻히는 편이다.

절대 용서받지 못할 악. 전쟁에서 선악을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지만 나치 독일과 히틀러만큼은 악으로 규정됐다.

그나마 상대할만한 존재가 바로 소련과 스탈린이다. 과연 악마와 괴물 중에 누가 이길지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래서 히틀러의 수염을 따라한 것도 모자라 헤어 스타일까지 따라한 거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왜 많고 많은 등장인물들 중에 히틀러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말했다. 근육질 히틀러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남자.

이어서 그는 이유 모를 미소를 짓더니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제논 님의 신작에서 등장한 주인공이니까요."

"겨우 그거 하나?"

"이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 ···"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옛날이었다면 저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냐고 했겠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온갖 억까를 당하다보니 이 정도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랑받는 제논 일대기와 달리 피와 강철은 호불호가 갈리는 장르다.

처음에는 더러운 정치 파트가 이어지는데다가 다음에는 잔혹한 전쟁 이야기로 흘러가니까.

게다가 매력적인 등장인물이라 해도 대부분 남자밖에 없다. 성질머리가 죄다 괴팍한 사내들.

물론 제논 일대기에서 얻은 인기와 '판타지'라는 장르를 구축한 덕분에 제논 일대기 못지 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

'따라하기에는 제논 일대기만한 게 없지만······'

피와 강철도 준비만 할 수 있으면 충분히 따라할 수 있다. 복장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하지만 준비만 철저히 할 수 있다면 '코스프레'를 하기 쉬운 편이다. 그냥 수염이랑 머리만 다듬으면 끝이니.

단, 앞의 이 근육질 히틀러, 로이는 히틀러가 피와 강철의 주인공이라서 코스프레한 거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논 일대기에 등장하는 주조연들은 전부 미형이라 따라하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평범한 얼굴이지 않습니까?"

"그렇······ 죠?"

"저는 제논 님의 글이 좋습니다. 특히 제논 일대기를 읽고 모험가로서의 꿈을 키울 수 있었죠. 하지만 정작 저의 정성을 보여드리지 못했기에······"

이후로 나를 향한 찬양이 주를 이루었으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내가 다 민망해진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있는 또다른 모험가 앤 또한 나와 비슷한 심정이겠지.

그녀는 거친 인생을 사는 모험가 치고는 예쁘장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델리아보다 짧은 단발머리에다가 호리호리한 몸매. 전반적으로 날렵한 인상이다.

"······대신 사과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얘가 좀 중증이라서요."

로이가 과도하게 찬양하는 동안 앤은 나지막히 사과의 말을 전달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로이의 시도때도 없는 찬양에 완벽히 적응한 모양이다.

나는 해탈의 경지에 들어선 듯한 앤의 반응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가 헛기침을 했다.

헛기침을 하니 그나마 눈치가 있던 로이도 찬양을 중단했다. 머쓱하게 웃는 걸 보아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안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제논 님과 식사를 해서 그런지 기분이 들떴던 모양이군요."

"이해합니다. 그나저나 두 분께서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모험가 일을 하다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앤도 제논 일대기의 팬이거든요."

"솔직히 모험가 중에 제논 일대기 팬이 아닌 사람이 없긴 하죠."

전에 말했듯이 제논 일대기 덕분에 모험가들의 숫자가 폭증한 시기가 있었다.

너도 나도 할 것없이 제논이 되겠다며 포부를 밝혔던 시기. 그러나 그 포부는 얼마 가지 않아 대부분 쪼그라들었다.

"제논 일대기 덕분에 모험가들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들었습니다. 로이 씨는 그런 케이스라 들었고 앤 씨도 비슷한가요?"

"예. 처음에는 환상과 너무 달라서 애를 먹었지만······ 시간이 차츰 지나니까 익숙해지더라고요. 그리고 이상은 이상으로 남기자라는 교훈도 얻었고요."

앤의 말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무시무시했다. 고블린 토벌도 못 하겠다며 도망가는 모험가들이 태반이었단다.

설령 객기로 나섰다고한들 어디서 객사하거나 실종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이로 인해 몬스터의 숫자가 도리어 증가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게 낭만이지!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을 나가는 것! 모험가라면 한 번쯤 이상을 품어야 하는 법이야!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로이는 아무렴 상관없는 모양이다. 그는 낭만을 외치더니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했다. 로이가 언급한 낭만은 언듯 보기에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낭만은 말 그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는 '도전'이다. 성공한다면 낭만이요, 실패한다면 개죽음밖에 안 된다.

'그래도 저런 사람들이 있으니 세상이 발전하는 거겠지.'

다만 이것도 조건이 있다. 바로 확실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것.

무작정 이상을 쫒아가는 게 아니라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이상에 접근해야 되는 것이다.

"로이 씨의 말에는 동의해요. 낭만이 괜히 낭만이라 부르는 게 아니죠. 대신 차근차근 계획을 설립해야 낭만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렇습니까? 새겨듣겠습니다."

"그러면 하나 물어볼게요. 로이 씨의 목표는 뭐죠?"

내 질문에 로이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논 일대기처럼 낭만을 추구하는 것. 그게 제 목표입니다."

"추상적이네요."

"추상적이라는 게 뭐죠? 듣기 좋군요."

"··· ···"

가방끈이 짧은 것 같기는 해도 모험가로서의 활약은 뛰어나다고 들었다. 그냥 그의 목표를 열심히 응원해야겠지.

"앤 씨의 목표는요?"

"얘가 죽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보는 겁니다."

"상당히 어렵겠네요."

"네. 그래도 가치 있는 일일 것 같아 만족하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앤은 로이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로이가 계속 헛소리를 해도 부끄러워할 뿐이지 반박하지 않았다는 게 증거다.

게다가 이따금씩 로이를 힐끔거리는 걸 보아하니 반쯤 확실하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이 만남도 끝낼 때가 왔다.

"혹시 사인을 받을 책이나 종이는 가져왔나요? 없으시다면 제가 따로 구해드리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저는 여기에 가능할까요?"

사인도 끝냈겠다, 로이와 앤은 축제를 즐기러 저택 밖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 건······"

아버지를 도와주러 가야겠지. 나는 아버지가 계시는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축제 직전까지 바쁘디 바쁜 몸이었다.

*******

아이작으로부터 사인을 받은 로이와 앤. 그들은 행복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마이샬 거리로 나왔다.

로이는 피와 강철 1권에 아이작의 사인을, 앤은 제논 일대기 1권에 사인을 받은 상황.

특히 로이는 지난번에도 사인을 받았기에 희소성이 강한 물건을 갖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앞으로 암살까지 조심해야겠네. 그 책 한 권만 경매에 내놓아도 난리를 칠 걸?"

앤의 농담 아닌 농담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현재 아이작에게 사인을 받은 사람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다.

가르츠를 비롯하여 주변 지인 몇몇이 받기는 했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사인본이다.

하물며 가르츠는 사인본은 뺏기고 나서 아직까지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신세.

다시 말해 아이작의 사인은 로이만 갖고 있는 셈이다.

"훗. 어림도 없지. 앞으로 제논 일대기뿐만 아니라 피와 강철도 껴안고 잘 거니까. 정 안 되면 은행에 맡기고."

"그냥 은행에 맡겨라. 껴안고 자면 더러워서 못 가져가겠다."

"내 품이 얼마나 따듯하고 아늑한지 모르나 보네. 오늘 밤에 한 번 안아줘?"

"······너 진짜 이상한 소리하지 마."

로이는 진심이었으나 앤에게는 다소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녀는 뜨거워진 귀를 감추기 위해 머리를 정돈했다.

다행히 제논에게 흠뻑 빠져있던 로이는 눈치채지 못한 모습. 앤은 둔해빠진 그의 행동에 안도하면서도 답답해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감정적인 면모가 전부 제논에게 향한 놈이다. 머리 스타일과 수염을 전부 히틀러처럼 따라했으니 말 다했지.

'그래도 얘만큼 병신 같은 놈들이 없어서 다행이네.'

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축제가 점점 다가오면서 가지각색의 복장과 외모를 지닌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다.

행인들 중에는 로이처럼 변장 즉, 코스프레를 한 사람도 있었는데 대부분 제논 일대기 관련이다.

피와 강철이라고 해봤자 제복을 입거나 수염을 따라한 사람들밖에 없다.

로이처럼 고퀄리티(...) 근육질 히틀러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그놈의 멋진 악당이 뭐라고.'

나치 독일과 히틀러는 분명 멋진 악당이긴 하다. 하지만 악당은 그래봤자 악당이다.

언젠가 등장할 선역에게 갈갈이 찢겨나갈 악당. 심지어 히틀러는 학살까지 방조한데다가 유대인을 탄압했다.

앤은 그의 최후가 좋지 못할 것이라 직감하고 있었다. 악당의 최후는 대부분 비참했으니까.

'나중에 이 놈도 좋은 놈이었다라는 것만 없었으면 좋겠네.'

현재 나치 독일은 명백한 악당이었으나 '쓰레기'까지는 아니다. 그들의 역사를 본다면 충분히 납득이 갈만한 부분들이 많다.

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배와 베르사유 조약에서의 불평등함. 더 나아가 내부에 산재한 문제들까지.

불우한 사정이 있는 악당이었기에 동정심마저 드는, 미묘한 케이스다.

이런 설정이 마음에 들지 않던 앤으로서는 차라리 완벽한 악당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도축장에 밀어넣는 것마냥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는 이상 힘들겠지. 소련과 전쟁도 해야 되고.'

미쳤다고 그 귀중한 노동력을 도축장에 밀어넣겠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앤이 앞으로의 전개를 유추하며 길거리를 걷고 있을 때쯤이었다.

둥! 둥! 둥! 둥!

거리를 걷던 도중에 귀에 들어오는 북소리. 앤은 물론이고 로이도 그 북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보니 다른 행인들도 자리에서 멈춘 모습이다.

[우리는······ 것들도 신경······ 않으나······]

북소리를 제외하고 귀에 알음알음 들리는 노랫소리. 그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소리지?"

"글쎄. 점점 커지는데?"

"이리로 오나 봐."

척! 척! 척! 척!

얼마 지나지 않아 절도 있는 발걸음 소리마저 귀에 꽂혔다.

동시에 어디서 들은 듯한 노래까지. 음이 익숙한 게 아니라 가사가 익숙하다.

"이거 그건데? 나치 친위대 행군가."

"뭐?"

"1부 막바지에 등장한 행군가 있잖아. 원래 콘로드 군단의 분열행진곡이었다가 개사된 거."

모르는데. 앤은 로이의 설명을 듣고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는 로이와 다르게 앤은 줄거리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글 중간에 등장하는 행군가라면 알겠다만 이외에 세세한 건 모른다. 로이니까 아는 거다.

[우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전진뿐이고.]

[악마는 이를 보고 그저 웃는다.]

[하. 하. 하. 하. 하.]

어느새 코 앞까지 도달한 노랫소리. 웅장한 북소리와 딱딱한 발소리가 합쳐지며 묘한 중독성을 이루었다.

그 소리에 집중하던 와중에 진정한 '덕질'을 한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복이 아니라 평범한 병사가 입는 군복. 딱딱한 철모. 모형으로나마 제작한 총기들까지.

가장 큰 키를 지닌 병사는 맨 앞에 서서 나치 독일의 기장을 높이 들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나치 독일의 휘장이 참 쓸데없이 멋지다.

[우리는 독일을 위해 싸우고.]

[우리는 히틀러를 위해서 싸운다.]

[빨갱이들은 결코 안식을 취하지 못하리라!]

척! 척!

후렴구와 함께 로이와 앤 앞에 우뚝 멈춘 정체불명의 군인, 아니 컨셉러들.

앤은 어째서 자신들 앞에서 멈췄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내 로이가 어떤 모습인지 깨달았다.

현재 로이는 히틀러에 근접할 정도로 꾸며놓은 상태. 아이작이 평가하기를 근육질 히틀러.

특유의 수염뿐만 아니라 헤어 스타일마저 비슷하게 꾸몄기에 누가 보면 히틀러라고 착각할 정도다.

"하일-!!"

그 순간 기장을 든 자가 크게 외치더니.

"히틀러!"

근육질 히틀러(로이)에게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며 크게 외쳤다.

"""하일! 히틀러!"""

그 직후 뒤에서 행군하던 사람들도 나치식 경례로 크게 외쳤다.

앞에 코스프레 아닌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로이를 향해서.

정말이지, 쓸데없이 우월한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컨셉'에 제대로 잡하먹힌 자들이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만약 이대로 넘어간다면 그저 그런 해프닝으로 취급했겠지. 앤도 처음에는 그럴 거라 생각했다.

"훌륭하다! 제군들! 군기가 제대로 잡혀있군!"

남자들 특유의 '병신짓'에 감화된 로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앤은 로이의 돌발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이미 상황은 늦었다.

"제군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겠네! 그대들이라면 그 더러운 빨갱이들의 영토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을 터!"

"미리 구상한 연기인가?"

"그런가 본데?"

행인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연기에 극단의 연극이라 추측했다. 물론 연극이 아닌 즉흥적인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아이작이 이걸 봤다면 전생을 떠올렸을 것이다. 놀이동산에서 몇몇 캐릭터가 아이들을 위해 직접 연기를 해주는 것.

그러나 그건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함이지, 지금처럼 단순히 '병신짓'을 위한 건 아니다.

유흥 문화가 너~무 없다보니 새로이 탄생한 문화 아닌 문화.

"어서 움직이게나! 용맹한 22집단군에 소속되어 그 더러운 빨갱이놈들을 더욱 빨갛게 물들이게! 나, 히틀러가 그대들의 뒤를 보필하도록 하지!"

"""하일! 히틀러!"""

로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렁차게 퍼지는 나치식 경례. 흥미롭게 지켜보던 행인들도 열띤 박수로 호응해줬다.

멀리서 본다면 나라의 열병식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이곳은 제논 축제가 펼쳐질 마이샬 영지.

이런 장면이 연출되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연극'이었으니.

이윽고 휘장을 든 남자가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행군가가 널리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독일을 위해 싸우고.]

[우리는 히틀러를 위해서 싸운다.]

[빨갱이들은 결코 안식을 취하지 못하리라!]

척! 척! 척! 척!

로이를 지나쳐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하는 병사들. 빙글빙글 돌 작정인 건지 저택이 아니라 옆으로 꺾었다.

앤은 그들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쳐다보다가 로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뭐가 뿌듯한 건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키야! 이게 추억이고 낭만이지! 어때? 좀 괜찮았냐?"

"······아는 척하지 마."

어떻게 된 게 남자들은 다 저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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