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1 - 구멍(2)
사람마다 전환점 즉, 터닝 포인트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떤 계기를 통해 사람이 180도 달라지는 일.
이번 생에서 터닝 포인트는 당연하게도 제논 일대기 집필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족의 인식을 뒤바꾼 5권의 발매다.
그 이후부터 내 인생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요동쳤다. 이때부터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졌지.
그렇다면 전생의 터닝 포인트는 어디일까.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다.
"유환아! 어디 가니! 유환아!"
사춘기가 심하게 왔던 중학교 3학년 시절. 나는 부모님과의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가출을 감행했다.
갈등의 원인도 별로 시덥지 않은 문제다. 안 그래도 학원을 가기 싫었는데 여기서 더 늘리려고 했으니.
모두 알다시피 저 나이대는 속박받는다는 느낌 자체가 싫다. 자아가 확립되는 시기라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친구랑 한창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을 때여서 학원을 가기가 엄청 싫었다.
"후우······ 더럽게 춥네."
문제는 가출했을 때가 한파가 몰아치던 겨울이었다는 것. 홧김에 나온 거라 양말조차 못 신었다.
그나마 패딩을 입고 나왔으니 다행이라 해야되나. 하지만 추운 건 변하지 않았다.
"아이작이 저랬다니 신선한데?"
"그러게 말이에요. 말을 꼬박꼬박 잘 듣는 아이였는데."
부모님은 그런 내 가출 소동이 신선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성급한 건 몰라도 현재의 나는 저런 식으로 즉흥적이지 않다. 부모님과 갈등을 벌였던 적도 없었고.
가출? 가출을 해봤자 어디로 가겠나. 지금과 달리 옛날 영지는 시골 깡촌 그 자체였으며 가끔 가다 짐승이나 몬스터가 내려온다.
객사하기 싫어서라도 저택 안에 처박힌 채 책만 보면서 지냈다. 겸사겸사 제논 일대기도 쓰면서 말이다.
띠리리링-
"······에이씨."
새로 산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엄마의 전화. 전생의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 번호를 차단했다.
혹시 몰라 아빠의 번호까지 차단하는 건 잊지 않았다.
"······피시방이나 갈까."
현재 시간은 오후 5시. 한파라 몰아치는 겨울이라 벌써부터 해가 뉘엇뉘엇 지려고 한다.
때마침 지갑도 들고 나왔으니 시간을 떼우기에는 피시방이 적당할 터. 나는 발걸음을 움직이며 피시방으로 향했다.
물론 집 근처도, 학교나 학원 근처도 아닌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뒷모습이 참 쓸쓸하면서도 처량······
"아. 씨발. 좆 같은 새끼들. 겜 더럽게 못하네."
······하지 않고 피시방에서 게임하기 바쁘구나.
가출한 것과 별개로 게임은 참 즐겁게 하고 있다. 정작 부모님은 자기를 찾기 바쁘다는 걸 모른 채.
하지만 청소년에게 허락된 시간은 밤 10시. 밤 10시가 되면 피시방에서 나가야 된다. 나라고 다를 게 없다.
그리하여 밖으로 나오니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나를 반겼다. 이대로 노숙을 했다가는 얼어 죽을 게 분명하다.
"어. 승찬아. 난데. 혹시······"
친구들에게 전화를 한 통씩 돌렸다. 혹시 하루만 재워줄 수 있냐고. 지금 부모님이랑 싸워서 밖이라고.
친구들은 내가 가출했다는 소식에 놀라면서도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자기들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아쉬워하면서도 납득하며 정처없이 배회하기 시작했다. 양말조차 신지 않아서 미친듯이 시릴 텐데.
"하아······"
결국 다시 집 근처로 돌아왔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고, 홧김에 가출한 거라서 뭐 하나 계획된 게 없다.
돈은 피시방에서 다 썼지, 겨울이라 더럽게 춥지, 바깥은 어두컴컴하지.
집이 그리울 시점이다. 나는 집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부모님의 전화번호를 차단해서 그런지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풀자."
나는 추위로 새빨개진 손으로 차단을 풀었다. 차마 자존심 때문에 연락을 못 하겠지.
이윽고 차단을 풀자마자 수많은 메세지가 쏟아졌다.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까지.
[유환아. 어디니? 제발 돌아오렴. 학원 다 뺄 테니까.]
[유환아. 빨리 돌아와. 밖에 많이 춥다.]
의외로 문자는 많이 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 둘 포함해서 10통은 될까 말까다.
그것 때문인지 내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당연히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이에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던 찰나, 새로운 문자가 도착했다. 부모님 중 한 명이라 생각했다.
[야. 너네 어머니께서 너 찾고 계신다.]
[동영상]
[그냥 빨리 집에 들어가. 새꺄. 안 그래도 추운데 저리 고생시키냐?]
어릴 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인연을 맺었던 친구 놈들 중 한 명이다.
친구가 보낸 사진에는 밤늦게까지 나를 찾는 엄마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우연히 찍은 건 아니다. 안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나를 찾는 게 우선이라며 거절했단다.
"··· ···"
친구의 문자를 확인한 내 표정이 점점 복잡해졌다. 얼마나 급했으면 문자조차 주지 않고 두 발로 찾고 다녔을까.
정작 나는 피시방에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기라도 했지, 엄마는 그런 것도 없이 찾기만 했다.
나를 강압적으로 몰아세우던 게 아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매번 톱니바퀴처럼 맞물는 경우는 없다.
방식은 약간 잘못됐을지언정 부모님이 나에게 쏟는 '사랑'은 진심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버선발로 뛰쳐나오지 않았을 터.
"······에이씨."
하지만 나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 단지 문자만 보냈을 뿐.
집으로 갈 거라는 문자만 달랑 남겨놓은 채로 나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양말조차 신지 않은 두 발은 시렸으나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인해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집 앞으로 도착했을 때쯤.
"유환아!"
문자를 먼저 받았는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가 나를 반겨줬다. 그 뒤에 아빠가 안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학원 안 보낼 테니까······"
나를 찾느라 얼마나 소리를 지르셨는지 몰라도 목이 쉬었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를 놀라게 만들었던 건 따로 있었다.
"어, 엄마. 양말은?"
"유환아. 내 아들······"
"양말도 없고 옷도······"
나처럼 양말을 신지도 않은 건 물론이요, 방한복조차 제대로 입지 않았다.
그나마 나는 피시방에서 몸을 녹이기라도 했지만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이미 손과 발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누가 봐도 동상의 초기 단계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닌 것이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날이 춥다."
"······네."
나는 아버지의 무뚝뚝한 부탁에 군말없이 따랐다. 집으로 들어가는 도중에도 엄마의 손과 발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엄마는 그저 눈물만 흘리시며 내 이름을 하염없이 부를 뿐이었다.
불우한 가정 환경을 지녔던 엄마는 기껏 힘겹게 꾸린 가족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
"자기는 몸 좀 녹이고 있어. 따뜻하게 유지하면 별일 없을 테니까. 그리고 유환이는······"
"··· ···"
나를 찾느라 지칠 대로 지친 엄마를 먼저 재우고, 아버지는 나를 말없이 지켜봤다.
이미 동상이 걸리기 직전이었던 엄마의 손발을 지켜봐서 그럴까. 나는 죄책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홧김에 나간 가출에 비해서 돌아온 대가가 너무나도 컸으니까. 잠깐의 일탈을 위해 엄마를 심하게 고생시켰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죄책감밖에 들지 않는 상황. 나는 잠자코 아빠의 호통을 기다렸다.
"······유환이도 추울 테니까 안에 들어가서 쉬워. 당분간 학원은 가지 말고."
"······끝이에요?"
허나 예상했던 아빠의 호통은 돌아오지 않았다. 늘 그랬던대로 담담하게 말했을 뿐.
살짝 놀란 내가 소심하게 물어도 아빠는 흐뭇하게 웃으시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뭘 혼내겠니?"
"··· ···"
"고생했을 텐데 안에 들어가서 푹 쉬어."
"······엄마랑 같이 자도 돼요?"
15살의 소년은 여전히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그런 소년의 부탁에 아빠는 기꺼이 수락했다.
나는 씻지도 않고 엄마가 잠든 침실로 향했다. 나를 찾는 데에 기력까지 소모한지라 엄마는 곤히 잠들어있었다.
꾸물꾸물-
혹여 엄마가 깰까 봐 애벌레처럼 기어들어가는 나.
초등학교 때부터 따로 자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엄마와 나란히 누웠다. 뭔가 어색하면서도 아늑한 느낌.
"으음······"
"··· ···"
눈물 자국이 선명한 엄마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붙잡았다.
나보다 차디 찬 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발도 다를 게 없다. 얼음장처럼 차갑다.
자칫하다가 동상에 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셨다.
목이 쉬도록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살이 에는 듯한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해서.
"······엄마."
"··· ···"
내가 조용히 부르자 엄마가 미소를 지으셨다. 분명 자고 있을 텐데 내가 부르는 것만으로도 좋으신 모양이다.
"우리 아들······"
"··· ···"
저 한 마디가 뭐라고 가슴을 울리게 만드는 건지. 나는 엄마의 부름에 입을 앙 다물었다.
그러나 솟구치는 죄책감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엄마의 손을 꽉 붙잡으며 감정이 폭발했다.
"흐윽······ 윽······"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 하루. 내가 진정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기 시작했을 시점.
저 날 이후로 부모님의 말을 꼬박꼬박 잘 듣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랑을 준다면 나도 주려고 애를 썼고.
남들은 전부 다니는 학원도 안 다녔다. 그냥 내가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유환아."
"네. 아빠."
"나중에 할 게 없으면 아빠 회사에 들어와. 대신 학교만큼은 그거랑 관련된 과목은 다니고. 알겠니?"
아, 물론 미래 걱정만큼은 해주셨다. 다른 건 몰라도 공부는 진짜 안 했거든.
공부에 집착할 바에야 차라리 시원하게 놓아주자. 가출 소동 이후 우리 가족 사이에 생긴 마인드다.
다행히 판타지 소설을 줄기차게 읽은 덕분에 글솜씨를 키울 수 있었다.
"우리 유환이한테 이런 소질이 있었네! 나도 소싯적에 글을 썼었는데!"
"계약에는 딱히 문제가 없어 보이는구나. 장하다, 우리 아들."
첫 계약 당시 엄마는 박수까지 치며 제일 기뻐하셨고, 아빠도 무덤덤하지만 기쁜 감정을 숨기지 않으셨다.
당사자인 나도 기뻐한 건 마찬가지다. 대신 계약 자체보다 부모님을 기쁘게 만들었다는 것에 집중했다.
물론 시작은 쉽지 않았다. 대학교도 다녀야 하고, 소설까지 집필하려니 상당히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천천히 익숙해지고 완결까지 낼 수 있었다. 군 입대가 살짝 늦어진 게 흠이었으나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행? 우리 둘이서?"
"정말 괜찮겠니?"
군 복무 이후, 새로 따낸 계약으로 여행을 보내드렸으니.
그것도 상당히 비싼 패키지였다. 어지간한 수입으로는 꿈도 못 꾸는 여행 패키지.
나는 꼬박꼬박 돈을 모아 부모님을 위해 여행을 보내드릴 계획이었다.
"네. 한 번쯤 여행도 다녀야죠."
"유환이 너는? 너는 안 가도 돼?"
"전 괜찮아요. 그냥 편안~ 하게 갔다 오면 됩니다."
"이걸 받아도 될지······ 엄마는 해준 게 없는데······"
여행 패키지를 받은 것에 기쁜 것도 잠시, 엄마가 미안하다는 눈초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걸 듣고 얼마나 울컥했는지 모른다. 나를 위해서 제 한 몸 희생하셨는데 정작 본인은 한 게 없단다.
그렇기에 더 보내드려야겠지. 두 분의 추억을 위해서라도.
"에이. 한 게 없긴요. 제가 계획은 다 짰으니까 엄마랑 아빠는 오붓하게 갔다 오면 돼요."
"유환이 말대로 하자. 얘가 우리를 위해 크게 마음 먹은 거잖아?"
"우리 아들 정말 고마워. 나중에 자랑해야지."
행복하게 웃으시는 얼굴을 보니 나도 절로 미소가 나왔다. 모처럼의 효도여서 더욱 뿌듯하다.
그걸 지켜보는 내가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
"······어?"
뭔가 이상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갑자기 기억에 혼선이 발생한다.
저 날 이후에 부모님의 얼굴을······
저렇게 행복하게 미소 짓는 표정을······
"어, 어······?"
볼 수 있었던가?
내 기억에는 없던 걸로 안다. 정확히는······
"··· ···"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기억은 재생되고 있었다. 뒤이어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여기는······"
"장례식······ 장인 거 같은데?"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비탄만이 가득한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