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7 - 뽕(2)
J. R. R. 톨킨의 작품,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의 기본적인 틀과 개념을 다듬은 역작 중의 역작이다.
판타지의 범위는 셀 수도 없이 넓지만, 당장 판타지하면 떠오르는 세계관은 톨킨이 전부 만들었다 해도 무방하다.
인간, 엘프, 드워프, 오크, 드래곤 등등. 흔히 신화에서 볼 법한 종족들을 재구성시켜 등장시킨 게 바로 반지의 제왕이다.
비단 종족뿐만 아니라 세계관도 주목해야 된다. 정말로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이 정교한 세계관과 역사.
판타지에 큰 족적을 남긴 것도 남긴 거지만 영화가 어마어마한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다. 심지어 약간의 각색을 거쳤는데도!
전까지는 기술력의 한계로 스케일이 작은 것밖에 없었다. 완성도마저 떨어졌으니 판타지의 영화화는 독이 든 성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은 보란듯이 해냈다. 3부작 모두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으며 이후에도 아성을 뛰어넘는 작품은 등장하지 않았다.
20년 후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어벤져스조차 완성도에 한해서는 상당히 뒤떨어지는 편이다. 재미있으니 그만이라는 사람들이 많았을 뿐.
오죽하면 반지의 제왕이 너무 일찍 나온 영화라 아쉽다는 말까지 있었다. 훗날 CG와 모션 캡쳐 기술을 고려하면 동감이 가는 말이다.
"로한의 후예들이여!!"
뿌우우우!
기마대를 독려한 장군이 소리치자마자 터져나오는 뿔피리 소리. 뿔피리 소리는 하늘까지 뻗어나가 온 세상을 진동시켰다.
현재 내가 보여주고 있는 건 반지의 제왕의 명장면 중 하나, 로한의 기마대.
내가 영화를 보는 형식이 아니라 마치 3D처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두두두두두!
뿔피리가 울려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기마대의 군세가 적을 향해 달려간다.
대지가 진동하는 소리와 긴장감을 돋구는 배경 음악. 마지막으로 적을 향해 소리치는 기사의 표정까지.
하늘에서 화살비가 내려와도 말들을 투레질을 하며 묵묵히 나아갔다. 앞에 뾰족한 창이 세워져도 기마대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게 완벽한, 그야말로 중세뽕을 채우는 장면. 당시 기술력으로 어떻게 저런 장면을 찍었는지 실로 놀랍다.
콰지직! 콰득! 콰앙!
거대한 기마대의 군세가 적군을 해일처럼 덮친다.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면서 파괴력을 과시했다.
그와 동시에 장면이 끝났다. 로한의 기마대는 여기까지만 보여줘도 충분하다 생각했으니.
나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지닌 채 사람들을 쳐다봤다. 생생한 기마대의 돌진에 다들 넋이 나간 표정이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거 전부 영화입니다. 화살에 당해서 쓰러지는 장면이라던지, 누군가 말들에게 밟히는 장면이라든지 걱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전부 촬영한 거니까요."
"저, 저게 전부 영화······ 란 말이냐?"
"말도 안 돼. 숫자는 그렇다 쳐도 기마대의 돌진을 어떻게 재현하는 거야? 마법도 없이?"
제논 일대기 영화화에 열심히 투자 중인 아르웬과 세실리가 말도 안 된다는 어조로 물었다.
그 대답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넘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지, 촬영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건 나도 잘 몰라. 그래도 진짜로 찍힌 영상이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이라는 것만 알아줘."
"대체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길래 우리 세상에서 볼 법한 장면까지 찍을 수 있는 건지······"
"솔직히 말해. 너희 세상도 마법 쓸 수 있지? 마법이 아니고서야 저런 장면을 어떻게 찍어?"
마리가 내 옆구리를 쿡- 쿡- 찌르며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칼즈에게 했던 것처럼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임산부에게 심히 좋지 않을 뿐더러 아버지의 PTSD까지 유발시킬 수 있기에 포기했다.
"누누이 언급하고 있지만 마법이 아니라 과학이야. 아까 내가 욕을 하면서 했던 게임 있지? 그런 곳이 현실에 있을 리가 없잖아? 그 기술을 이용한 거야."
"이해가 가는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어렵네. 굉장하다는 건 똑같지만."
이제 반쯤 포기한 얼굴이다. 비행기를 간접적으로 탑승했을 때부터 마리는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반응이었으니.
오히려 내 쪽에서 묻고 싶은 게 많다. 나는 무언가 속닥거리는 세실리와 아르웬에게 질문했다.
"아까 마법도 없이 어떻게 기마대의 돌격을 구현시킬 수 있냐고 물었지? 그럼 마법으로 저런 장면을 찍는 게 가능하다는 거야?"
"음? 가능하고 말고. 작업이 조금 힘들긴 하겠다만 알븐하임의 마법사들을 동원하면 어렵지 않은 작업이니라."
"나도 아르웬 여왕님께 이론을 들었어. 처음에는 헤맸지만 괜찮더라고. 스칼 감독도 아마 유용하게 쓸 거야."
역시 개사기 종족들. 지구는 텔레포트조차 못 쓰는데 여기는 가볍게 사용하는 곳이다.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가 일단 들어나 보자라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떤 방식인지 알려줄 수 있어?"
"그러니까 어떤 방식이냐면······"
세실리는 아르웬에게 들었던 대로의 이론을 나에게 알려줬다.
그리고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분명 공용어로 말을 하고 있는데 외국어처럼 들리는 걸까.
마법에 문외한인 나를 배려하여 가장 쉬운 마법, 파이어볼을 기점으로 두고 설명하고 있지만 역시 모르겠다.
"알아들었어?"
"아니.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 ···"
당당한 내 대답에 세실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라는 반응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저 반응을 원했으니까.
"아마 내가 저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설명해도 비슷했을 거야.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냥 머리를 비우고 보는 게 좋겠네."
"혹시 피와 강철을 영화화할 때 참고할만한 영화는 없느냐?"
세실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고 있을 때 아르웬이 불쑥 끼어들었다.
질문을 들어보니 제논 일대기뿐만 아니라 피와 강철의 영화화에도 관심이 있는 모양.
어쩌면 이세계판 반지의 제왕이 될 수도 있는 영화이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겠지. 그 마음 이해하고 있다.
"있긴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어째서냐?"
"아버지랑 마리가 있어서 안 돼."
하지만 안 된다. 아까 말했듯이 마리는 내 아이를 임신한 상황이고, 아버지는 PTSD를 심하게 유발시킬 수도 있다.
처음에 마리와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이 본인들이 언급됐으니 어리둥절할만 하지.
하지만 이내 피와 강철이 '전쟁'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로한의 기마대는 '웅장함'을 보여준다면 피와 강철은 '처참함'을 중시했으니. 이 분위기만큼은 세밀하게 묘사했다.
"미, 미안하구나. 내 생각이 짧았어."
아르웬도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곧바로 사과했다. 마리와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건 덤이다.
물론 저 둘은 겨우 이거 가지고 트집을 잡거나 화를 낼 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웃으며 넘길 뿐이지.
"괜찮아. 나중에 나랑 시아버님을 빼고 보면 되잖아. 눈치 볼 필요는 없어."
"······고맙구나. 그대의 넓은 아량에 감사를 표하마."
"뭘 이정도 가지고. 솔직히 나도 궁금하긴 하지만 아이를 위해서 참아야지."
마리는 그리 말하면서 아직은 평평한 자신의 배를 살살 매만졌다. 그 행동에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현재 그녀는 지켜야 할 대상이다. 아리엘처럼 예상치 못했다지만 선물은 선물이니까.
나는 마리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안으며 그녀와 마주했다. 그녀도 베시시 웃으며 사랑스러움을 과시했다.
"······혹시 다른 거 보고 싶은 거 있어?"
"우리 세상이 아니라 너희 세상을 기준으로 둔 영화는 없어?"
오묘해진 분위기 속에서 질문을 꺼내자 레오나가 손을 번쩍 들며 부탁했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골똘히 생각했다. 우선적으로 전쟁과는 거리가 먼 영화여야 된다.
당연하지만 잔인한 것도 포함이다.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서사가 중점이 되도록 해야겠지.
아니면 두 마리 토끼를 잡거나. 그런 의미에서 적절한 영화가 하나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줄까, 아니면 아까 전처럼 중요한 장면만 보여줄까? 참고로 시간은 2시간 정도 걸릴 거야."
"그걸로 너희 세상을 보여줄 수 있어?"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어. 이것도 일종의 판타지거든. 제논 일대기처럼 가상의 이야기라고 보면 돼."
영화는 현실과 동떨어진 대중문화다. 예술을 표현하기 위해서 제작하기도 하지만 대리만족을 위해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
제논 일대기가 예언서 취급을 받으면서 문학계에 큰 진동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모험가들의 숫자가 폭증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앞으로 보여줄 영화도 마찬가지. 과학은 물론 마법으로도 절대 불가능한 기술을 선보일 테지만 '서사' 자체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전반적인 스토리가 어떻게 돼? 그걸 알고 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은데."
때마침 니콜이 좋은 타이밍에 적절한 질문을 꺼냈다. 지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습득해도 영화는 궤를 달리한다.
나는 수많은 시선들을 하나하나 마주하다가 눈을 조용히 감았다. 동시에 백색방이 아닌 영화의 도입부를 떠올렸다.
'초등학생 때 나온 영화지만 지금도 명작이라 평가받고 있지.'
반지의 제왕이 판타지라는 장르 자체에 큰 족적을 남겼다면, 이 영화는 전설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이나 표현보다는 서사에 집중하고, 중간중간 적당한 유머를 넣어주면서도 마냥 가볍지 않은 영화.
상업 영화의 가장 성공적인 예시로 두기에 적당한 유니버스의 시작.
나는 눈을 천천히 떴다. 눈을 뜨니 그 장면의 도입부가 펼쳐졌다.
"스토리 자체는 쉬운 편이야. 자기밖에 모르는 천재 귀족 망나니의 영웅 성장기거든."
"······뭔가 싸구려처럼 느껴지는데?"
니콜의 떨떠름한 평가처럼 다른 사람도 비슷한 얼굴이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서사 자체는 간단하다.
그러나 그 간단한 서사를 맛있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 특히 이건 거대한 서사시의 시작이었으니 더욱 의미가 깊다.
이에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 번 이 영화를 보고나서 그 말이 나오는지 궁금하다.
"따지고 보면 제논 일대기도 평범한 모험가의 영웅 성장기잖아? 혹시 제논 일대기를 폄하하는 건······"
"그,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이, 일단 빨리 보기나 하자."
"제목이 뭔지 알려줄 수 있느냐?"
니콜이 허둥지둥거리는 동안 아버지가 나지막히 입을 여셨다.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이언맨'이요."
"아이언맨?"
"네."
반지의 제왕이 중세 판타지를 제대로 보여준다면.
"약 10년 동안 영화계를 평정한 서사의 위대한 시작이죠."
아이언맨은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과학이 무엇인지 보여줄 것이다.
'물론 영화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