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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561)화 (562/763)

Chapter 560 - 영국(1)

통조림 안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번 통조림은 어디까지나 맛보기에 지나지 않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 것 같다.

 

또한 진도는 바르바로사 작전 다음에 이어진 레닌그라드 공방전까지 이어졌다.

 

레닌그라드는 나치 독일의 공세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는데, 보다 못한 히틀러가 도시 전체를 포위하라고 지시했다.

 

지형적 특징으로 레닌그라드는 보급을 받을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아사자가 대폭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가죽이나 배낭을 끓여 젤리처럼 먹거나 영양 보충을 위해 나무를 갉아먹는 등. 이런 고생에도 아사자가 속출했다.

 

스탈린그라드가 지옥도를 표현했다면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아귀도'를 보여주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자유다! 씨발! 난 자유라고!"

 

대충 정리하고 있을 때 칼즈가 밖으로 뛰쳐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에 근처에 있던 사제들이 화들짝 놀란다.

 

모라의 신전은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엄숙함이 중요하다. 헌데 저리 소리를 지르니 놀랄 수밖에.

 

많은 사람들이 저 미친 놈은 뭐지라며 의아해하지 않을까. 민폐도 적당히 끼쳐야 화가 나지, 저러면 당황스럽다.

 

'어차피 며칠 뒤에 또 와야 할 텐데.'

 

나는 신전 밖으로 도망가는 칼즈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통조림은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부터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 동안 갇혀 있어야 할 텐데 저리 기뻐하니 내가 다 안타까웠다.

 

그래도 사람은 착하다. 지금도 무턱대고 도망간 게 아니라 정리를 꼬박꼬박 다 했으니까.

 

"천벌을 내리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죠?"

[내가 그 정도로 속이 좁아보이니?]

"칼즈 씨가 토한 거는요?"

[그건 너 때문이잖아.]

 

모라의 힐난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하기야 칼즈에게 피의 오마하 해변은 문화 충격 그 이상이었겠지.

 

다행히 통조림 속이라 토사물을 제거할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직접 처리해야 됐을 것이다.

 

이에 나는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거렸다가 고개를 돌렸다. 칼즈가 도망치면서 활짝 개방된 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문을 조용히 닫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온통 하얀색으로 가득 찬 배경이 펼쳐져 있다.

 

"모라 님."

[무엇이 묻고 싶은 거니?]

"묻고 싶은 건 많죠."

 

나는 의자에 앉으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신들의 과거를 집필하겠다고 마음 먹은 후부터 늘 갖고 있던 의문이다.

 

이 세상은 판타지다. 판타지인만큼 인간을 제외한 '이종족'들이 존재하는 세상.

 

또한 인간 사이에서도 다양한 민족이 분포돼 있다. 사막의 유목민족 남방민과 스타비르크 민족이 그 예시다.

 

그러나 피와 강철을 연재하면서 커다란 의문 하나가 피어올랐다.

 

"아시겠지만 저희 세계는 인간밖에 없지만 다양한 민족이 존재해요. 크게 구분을 짓자면 서양인과 동양인. 좀 더 구분하자면 백인, 흑인, 황인으로 구분할 수 있죠."

[··· ···]

"백인이야 널리고 널렸고, 흑인도 가끔씩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황인은 단 한 명도 못 봤어요."

 

가끔 가다가 혼혈인지 몰라도 비슷한 외모를 지닌 사람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슷한 외모지, 전반적인 생김새 자체는 서양인에 가깝다.

 

그나마 칼즈의 삽화 덕분에 사람들이 순수 동양인의 외모를 알게 됐지만, 여러모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여쭈어보겠습니다. 루미너스 님께서 소멸시킨 신들이 동양인들과 관계가 있나요?"

[··· ···]

"대답하기 힘드시면 안 해도 됩니다."

 

협박이 아니라 배려다. 난 단지 궁금해서 묻는 것뿐, 선택권은 그들에게 달려있다.

 

대답을 해준다면 의문이 해결되는 것이기에 상관없고, 설령 대답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이해해줄 것이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서 기다린 지 약 몇 분이 흘렀을까. 모라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건 왜 물어보는지 알려줄 수 있니?]

"칼즈 씨에게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줬듯이, 가족들에게도 제가 살던 세상을 보여줄 생각이라서요."

 

당연하지만 피의 오마하 해변은 보여주지 않을 거다. 특히 마리와 아버지에게는 더욱.

 

마리는 안정기에 돌입하기 전까지 자극적인 건 피해야 되고, 아버지는 지옥도를 직접 체험하신 분이라 PTSD를 앓으실지도 모른다.

 

물론 모라가 최대한 케어를 해주겠지만 기억 자체는 남아있기에 최대한 만류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까 의문이 들더라고요. 가족들과 애인들이 동양인을 보면 의아해하지 않을까? 라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부분에 의문을 가지니 자연스레 도달한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이해했어.]

"그러면 알려주실 수 있······"

[미안. 그건 아직 안 돼.]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망설임조차 없었다.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라 당황스럽지는 않아도 의아한 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모라답지 않게 칼 같이 거절했다.

 

[이건 오빠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거라서 내가 직접 말하기에는 껄끄러워. 오빠한테 직접 묻는 게 더 나을 거야. 대답해줄지는 미지수지만.]

"안 좋은 쪽인가요?"

[행복했던 기억과 끔찍한 기억이 섞여있어.]

 

비극이라는 거구나.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머나먼 과거에는 동양인이 존재했으며 그들의 신도 함께 있었다는 걸 말이다.

 

루미너스가 그 신을 소멸시켰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섞여있는지 모르겠다만 꽤나 복잡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이건 때를 기다려야겠네요. 그러면 순수 동양인은 아예 없는 건가요?"

[없는 건 아니야. 수인과 드워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창조주가 소멸해도 필멸자는 존재할 수 있거든.]

"설마 그들만의 문명을 이룩했다는 소리인가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종말 속에서 살아남은 동양인이 문명을 건국했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비록 종말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별로 없겠지만 악마 전쟁으로부터 3000년이 흘렀다.

 

지형과 더불어 커다란 강이 존재한다면 문명을 충분히 건국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응. 적어도 우리가 지켜본 바로는 그래. 대신 신과 관련된 기록들이 모두 사라져서 우리를 믿는 필멸자는 없어. 대부분 엄마 즉, 자연 그 자체를 믿고 있지.]

"설마 무협 같은 세계인가요?"

[무협이 뭔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잘 몰라. 엄마는 창조주에 가까워서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지극히 한정적이거든. 소수의 정보여도 모든 일을 중단해야 돼.]

"결국 바다를 건너 직접 확인해야 된다는 거네요."

 

드넓은 바다를 횡단하는 건 위험한 걸 넘어서 목숨을 버리는 도전이다.

 

해양 몬스터가 득실거려서 나무로 만든 배는 툭하면 부서지기 일쑤고, 전설 속의 몬스터 크라켄의 존재까지 증명된 지 오래다.

 

그러나 '철갑선'이 등장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철갑선이라면 해양 몬스터의 공격에 굳건히 버틸 테니까.

 

[그런 셈이지. 그래도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설마 무협인가 뭔가 하는 책도 쓰려고?]

"당장 써야 할 게 산더미인데 거기까지 생각하면 머리 아픕니다."

 

애당초 무협을 쓴 적도 심지어 본 적도 거의 없다. 취향에 안 맞을 뿐더러 고려할 게 너무 많다.

 

무협은 판타지와 다르게 틀이 정형화돼 있으며 역사도 길다.

 

이른바 고인물들이 넘쳐난다는 뜻이다.

 

내가 새로 쓸 수도 없는 것이, 그곳이 정말로 무협과 비슷한 배경인지 확실하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피와 강철에 집중하고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알았어. 그럼 다른 질문은 없니?]

"없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그래. 나중에 또 놀러와~]

 

마지막으로 모라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작업물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후에는 사제에게 안쪽의 뒷정리를 마저 부탁했다. 참고로 캔버스를 비롯한 미술품은 방금 전 칼즈가 직접 가지고 갔다.

 

뒤이어 밖으로 나오니 여름 특유의 고온다습한 기온이 나를 반겨줬다. 실제 시간은 3시간밖에 지나지 않아 해도 떠 있는 상태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

 

작업물도 정리할 겸, 가족들과 이야기도 할 겸, 아르웬에게 부탁도 할 겸 겸사겸사 할 게 많다.

 

마리가 임신하면서 피와 강철을 최대한 일찍 마무리하겠다고 다짐한 상황. 곧 있으면 제논 축제도 개최될 예정이다.

 

앞으로 1년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할 지 감히 예측하기 힘들지만, 마리의 안정을 위해서 마무리할 건 마무리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력 기관차 시승식도 있다고 들었는데.'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마키나는 혁명의 영향으로 바쁘다지만 마력 기관차의 시승식은 유지된다.

 

기간은 오늘을 기준으로 정확히 일주일 후. 당연하지만 세계 각국의 인사들이 참여할 예정이며 나는 못 간다.

 

원래는 갈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나 예기치 못한 마리의 임신으로 인해 마음을 접었다.

 

'거기서 악마 숭배자가 테러를 저지를까?'

 

악마 숭배자 입장에서는 전세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기회다. 설령 내가 참여하지 않아도 말이다.

 

물론 보안에 신경을 쓰겠다만 악마 숭배자는 자폭 공격도 서슴치 않는 집단이다.

 

다만 내 예상대로라면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러다이트 운동 때도 그랬지 않았는가.

 

이번 시승식으로 악마 숭배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피와 강철을 연재하다 보면 입질이 오겠지.'

 

어쨌거나 피와 강철을 빠르게 매듭지어야 된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이후에 작성할 신들의 과거도 마찬가지.

 

시간이 널널한 것 같으면서도 촉박하다. 나는 저택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 움직였다.

 

"왔느냐."

 

저택에 도착하고나서는 가장 먼저 아버지와 마주쳤다. 저택으로 들어오자마자 우연히 만났다.

 

"네. 마리랑 어머니는요?"

"지금 방에서 얘기하고 있단다."

 

보아하니 별일 없이 평범하게 대화하고 계시는 모양이다. 아마 주의해야 될 부분을 면밀히 알려주시고 계시겠지.

 

마리로서는 경험자의 조언이 가장 중요할 시기다. 특히 안정기까지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된다.

 

"결혼식을 언제 잡을지는 아직 안 정했죠?"

"결혼식은 양가에서 합의해야 되니까 조금 걸리겠지. 그래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게다. 아마 제논 축제 이후에 하지 않을까 싶구나."

"저도 그 기간을 고려하고 있어요. 다른 건 없나요?"

"아이 이름을 뭘로 정할지 고민하는 것 정도? 너는 생각해둔 게 있느냐?"

"어······"

 

갑작스럽게 훅- 들어오는 질문에 머리가 잠깐 멍해진다. 임신도 임신이지만 이름까지 생각해야 된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자식의 이름이다. 평범하게 짓자니 미안하고, 유별나게 짓자니 너무 눈에 띌 것 같다.

 

눈을 데록데록 굴려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결국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미룰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생각해도 될까요?"

"그러렴. 대신 배가 불러올 때는 염두하는 게 좋을 거란다. 혼나기 싫으면."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는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리셨다. 왠지 몰라도 뼈가 실린 조언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의 조언 아닌 조언에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 이름은 최대한 빨리 정하는 게 좋을 듯했다.

 

"아참. 아버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네. 제논 축제 전에 보여드릴 게 있어서요. 아버지뿐만 아니라 가족들 전부에게."

"보여줄 것?"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버지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살던 세상에 대해서요. 정확히는 제가 살던 나라죠."

 

오해 아닌 오해를 풀 때가 온 것 같다.

 

******

 

제논 축제가 실시간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그렇다고 피와 강철을 연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번에 발매된 신간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보며 영국이 나치의 대항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프랑스 해군을 공격한 영국. 굳이 공격했어야 됐나?]

 

캐터펄트 작전을 펼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영국은 전부터 꾸준히 깡패짓을 하고 다녔다는 언급이 있다.]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등 뒤에 칼을 꽂는 행위다.]

[정작 독일은 프랑스 해군에 관심이 없었다.]

 

'혐성국'은 어디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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