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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558)화 (559/763)

Chapter 557 - 통조림(3)

칼즈로부터 동의까지 받았겠다, 남은 건 통조림이 되는 것뿐이다.

 

대신 곧바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나는 집필할 타자기와 책상만 있으면 되지만, 칼즈는 그림을 그려야 했기에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림 관련 도구가 더럽게 비싸다는 것. 칼즈가 괜히 개처럼 부려달라는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예술가가 배고픈 직업이라지만 자세히 파고 들면 약간 다르다. 명예고 나발이고 일단 돈이 있어야 예술에 종사할 수 있다.

 

지금 이름을 날리고 있는 예술가들 대부분이 원래부터 부유층 혹은 귀족이다. 애초에 돈이 많은 사람들.

 

돈이 없는 사람은 진짜 하고 싶어도 못 한다. 전생에서도 미술 도구는 더럽게 비쌌는데 지금은 오죽할까.

 

'이 참에 우리 영지를 기회의 땅으로 만들까?'

 

그나마 마이샬 영지가 문화 도시로 자리잡았기 때문인지 가격이 상대적으로 싼 편이다.

 

게다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수업을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

 

음악을 하고 싶은 사람,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 조각을 하고 싶은 사람 등등. 차별을 두지 않고 무료 강습을 펼치는 중이다.

 

물론 이건 내 쪽에서도 압박을 넣은 게 아니라 미네르바 제국이 직접 지원해준 것이다.

 

미네르바 제국은 돈이 많고, 예술에 종사하려면 돈이 우선적으로 필요했으니까. 당장 헤일로 아카데미의 교수들도 돈으로 유혹했지 않은가.

 

하물며 제논 즉, 내가 태어난 영지라서 굳이 홍보할 필요도 없다. 예술에 종사하고 싶은 사람들이 알아서 영지로 슬금슬금 모였다.

 

이중에 고인물도 간간이 섞여있어서 문제지. 꼰대가 아니라 자기 명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문하생을 포섭하려는 사람들이다.

 

명성은 이미 얻을대로 얻었겠다, 심심하니 예술이나 가르치자. 진짜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영지로 오는 것이다.

 

심지어 나조차 얼핏 들어본 이름들도 간간이 들어오더라. 그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마이샬 영지는 내가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 무궁무진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칼즈 씨는 문하생을 안 받으시나요? 제가 의뢰하는 사람이니 명성을 얻을 수 있잖아요."

 

칼즈의 그림 도구를 준비하기 위해 도착한 상점. 주로 미술 관련 도구들을 파는 곳이다.

 

아무래도 나라는 존재 자체가 관심을 끌 수밖에 없지만, 위에서 지시를 받은 기사들이 나를 호위하고 있다.

 

뭔가 방송 촬영 중인 연예인이 된 기분이다. 지금도 기사들 어깨 너머로 나를 힐긋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허허허. 마음 같아서는 받고 싶지만 제 그림은 그런 쪽과 거리가 멀어서요."

 

내 질문에 칼즈가 특유의 너털웃음을 흘리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수염을 모두 관리하여 마리오로 돌아왔다.

 

나는 그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아, 하며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칼즈의 그림은 순수 미술과 거리가 상당히 멀다.

 

내가 보내준 스케치와 설명을 통해서 삽화만 그리면 끝이다. 순수 미술이라기보다는 상업용 그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긴 이 세상 기준으로는 화풍이 독특한 것뿐이니까.'

 

칼즈를 고용한 건 단순히 내 눈에 익은 화풍이라 그렇다. 게임 원화에 가까운 화풍이라면 이해가 갈 것이다.

 

태블릿이 발명되지 않았는데도 그만한 퀄리티를 뽑는 것 자체부터가 그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아쉬운 점은 그가 말했듯이 시대를 앞서간 화풍이라 주목도가 덜하다는 점.

 

내가 고용하면서 명성을 얻긴 했지만 입문은 힘들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문하생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습니다. 사흘에 한 번 꼴로 그림을 보내야하는지라."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논 님께서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그림을 뽑아내고 있으니까요."

 

뼈가 실린 그의 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는 부르주 3세의 폭정 아래에 놓인 드워프들과 같을 터.

 

우연에 우연이 겹쳐 찾은 삽화가인데 이대로 놓칠 생각은 절대 없다.

 

피와 강철은 물론이고 평생동안 내 노예······ 아니, 삽화가로 굴릴 생각이다.

 

그런 내 사악한(?) 계획도 모르는지 칼즈는 미술 도구를 사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에게서 받은 돈만 해도 집 몇 채를 살 수 있겠지만, 문득 그 돈들로 뭘 했는지 궁금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때까지 제가 준 돈은 어디에 사용했어요? 역시 그림?"

"아뇨. 주식에 넣었습니다."

"주식이요?"

"네. 한 번 돈을 불려볼까 생각했거든요. 워낙 거금이라 눈이 돌아간 거죠."

 

뒤이어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공황이 터지는 바람에······"

"··· ···"

 

할 말이 없군. 바로 옆에 대공황의 원흉이 떡하니 존재하고 있다.

 

'머스크 씨도 많이 잃었다고 들었는데······'

 

칼즈도 칼즈지만 머스크도 대공항 때문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하마터면 뿌리가 뽑힐 뻔했다고.

 

천만다행히 만약을 대비해 비축한 자금들이 있어서 그걸로 버텼다. 설령 무너지더라도 내가 직접 자금을 조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정말로 식사도 안 하고 잠도 안 자고 작업만 하는 겁니까?"

 

구비한 물품들을 신전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 후였다. 칼즈는 썩 못 미덥다는 눈초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평소에도 신과 허물없이 대화하지만, 칼즈는 이번이 처음이다. 당연히 미심쩍을 수밖에.

 

심지어 그는 무교다. 신들의 존재 자체는 믿어도 신실하지는 않다. 신전은 아플 때 병원처럼 들리는 곳이고.

 

이것조차 감기처럼 증상이 가벼우면 약방에 가서 약초를 지급받는다.

 

"네. 믿기 어렵겠지만 잠도 잘 필요도 없고, 식사도 할 필요도 없어요. 대신 입이 심심할 것 같으시면 간식 정도는 챙기는 게 좋아요."

"아이작 님께서는 며칠동안 작업을 하셨죠?"

"한 달이요."

"하, 한 달?!"

 

한 달이라고 답하자 칼즈는 무슨 괴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가능하냐는 반응이다.

 

오히려 의아한 건 나다. 말이 한 달이지, 체감 시간은 그보다 적다.

 

제대로 집중하면 시간은 금방 흘러간다. 빨리빨리 써야 된다는 부담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중간에 미칠 것 같다거나 그런 건 없고, 환경도 제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죠?"

"예를 들자면 폭포수가 떨어지는 숲을 보여준다던지,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 아래에 모닥불을 피운다던지 등등. 일단 가보시면 알 겁니다."

 

내 설명에도 칼즈는 아리송한 표정이다.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체험하는 게 낫다고, 직접 가보면 알 것이다.

 

무엇보다 곧장 통조림이 되지 않고 약 일주일 동안 간단하게 체험만 할 예정이다.

 

이건 가족들과도 상의했으며 실제 시간으로는 약 3시간 정도 흐를 것이다.

 

'신성력도 문제 없고.'

 

모라가 전에 말했다. 신성까지 얻은 마당에 이제 그런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신성력을 소모한다면 회복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케이트여도 신성력이 바닥난다면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신성이 일종의 무한동력 역할을 하는지라 신성력을 소모시켜도 줄어들지가 않는다.

 

또한 신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신앙'과 '숭배'다. 이 두 가지가 충족돼야 무한동력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어딘가에서 나를 진심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 이걸 알고 나서 얼마나 떨떠름했는지 모른다.

 

'예수님이나 부처님도 이런 식으로 신이 된 건가······?'

 

당장 신경 쓸 건 아니다. 성자라 추앙받고 있지만 내가 그들처럼 '성인(聖人)'도 아니고 실례나 다름없다.

 

설사 자격을 얻는다 해도 부담스러워서 거부하겠지. 일개 글쟁이 따위가 성인이 된다니 말도 안 된다.

 

아닌 말로 내가 진짜 성자가 된다면 지구의 웹소설 작가들도 죄다 성자인 셈이다.

 

"아이작 님?"

"아. 죄송합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칼즈 님께서는 신전이 처음이신가요?"

"옛날에 몇 번 가본 적은 있습다만 최근에는 없군요. 특히 모라 님의 신전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실 칼즈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신의 존재는 믿어도 성직자처럼 열렬하게 신봉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전지전능한 신이라기보다는 절대적인 권력의 왕에 가까우니까. 폭정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자기 인생만 살면 끝이다.

 

물론 과거, 세이비어 교국이 저질렀던 패악질도 한몫하고 있다. 루미너스를 믿지 않는자에게는 죽음을! 이라며 광신에 빠졌으니까.

 

루미너스도 그걸 보고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기겁한 게 아닐까 싶다. 꽤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다.

 

"혹시 주의해야 할 거라도 있습니까? 예배도 처음 하는 거라서······"

"그냥 경건하게 눈 감고 무릎을 꿇으시면 됩니다. 어지간하면 제가 다 말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흐음······ 그럼 아이작 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아, 그전에 아까 말씀했던 것처럼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겸사겸사 나도 간단한 간식을 구매했다. 통조림 안에서는 음식이 상하지 않아 아무거나 사도 상관없다.

 

대신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은 배제했다. 상하진 않더라도 식으면 맛없는 건 매한가지였으니.

 

그리하여 모든 준비가 끝나고, 체험판을 위해 모라의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이작 님. 소식은 미리 전달받았습니다. 물품은 전부 예배실에 배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저곳으로 가면 됩니다."

 

사제의 안내에 따라 칼즈와 일주일 동안 머무를 예배실로 들어섰다.

 

모라의 신전이 처음인 칼즈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후다닥 내 뒤에 따라붙었다.

 

"모라 님의 신전은 많이 어둡군요. 루미너스 님의 신전은 밝은데 말이죠."

"모라 님은 어둠과 안식의 여신이니까요."

 

뿐만 아니라 평화의 여신이기도 하다. 이건 말할 필요가 없으니 넘어가자.

 

이윽고 사제가 말한대로 통조림이 될 개인 예배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는 책상을 비롯해 칼즈의 물품이 안치돼 있다.

 

"의외로 좁은 것 같습니다?"

 

예상보다 공간이 좁았는지 칼즈가 의외라는 투로 말했다. 하기야 겉보기에는 좁아보일 수밖에 없겠지.

 

"아. 이건 나중에 넓어질 겁니다."

"넓어질 거라고요?"

"네. 일단 기도부터 하죠."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체험하는 게 낫다. 칼즈는 내가 무릎을 꿇기 시작하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했다.

 

뒤이어 나는 늘 그랬듯이 눈을 감고 두 손을 맞잡았다. 인기척으로나마 칼즈도 따라하는 게 느껴졌다.

 

[왔니?]

"으허헉!"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모라의 목소리. 그와 동시에 뒤에서 터져나오는 칼즈의 기함.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화들짝 놀라 발라당 넘어거진 칼즈가 눈에 들어왔다.

 

표정만 본다면 귀신을 목도한 듯한 얼굴이다. 마리오를 닮은 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게 퍽 웃겼다.

 

"놀라지 마세요. 모라 님의 목소리니까요."

"저, 정말입니까? 방금 그게 여신 님의······?"

"네. 그러니 진정하시고 다시 기도합시다."

"네, 네."

 

내 말에 칼즈가 다시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기도한다. 뭔가 뉴비를 바라보는 고인물이 된 느낌이다.

 

잠깐 쓸데없는 생각을 한 후에 곧바로 모라와 접신했다.

 

[아이야. 너무 놀라지 마렴. 나 상처받아.]

"죄, 죄송합니다! 여신님께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푸흐. 굳이 입으로 말할 필요는 없는데. 생각만 하면 돼.]

 

나도 처음으로 루미너스와 접신했을 때 저랬던 걸로 안다. 바짝 긴장한 티가 느껴지는군.

 

[그러면 바로 시작하면 되는 거지?]

'칼즈 씨? 준비되셨나요?'

'예, 예. 준비됐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일주일이에요. 일주일동안 체험하시고 그 다음에 선택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 후로 나와 칼즈는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일주일 간 공동 작업을 거쳤다.

 

그리고 체감상으로 약 하루 정도가 흘렀을 때쯤.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어디 가요? 체감상 하루밖에 안 지난 거 같은데."

"당신 미쳤어?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작업만 하라고?! 사흘에 한 번 꼴로 책을 냈을 때부터 느꼈어야 됐는데! 말이 일주일이지 잠도 잘 필요가 없어서 2주나 다름없잖아!!"

 

칼즈가 버티지 못하고 폭주했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다.

 

"아니, 그냥······ 그림만 그리면 되잖아요. 그러면 시간이 잘 갈 텐데. 그쵸, 모라 님?"

[··· ···]

"모라 님?"

[······고행의 효과가 있긴 있나 보네.]

"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쯤, 칼즈는 밖으로 나가는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날 여기서 꺼내줘!!"

 

저래서 한 달은 어떻게 버티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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